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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 안에 거대한 성벽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노동시장이 나뉘어 있다. 성벽 안에는 대기업과 공기업의 정규직이 있다. 근속은 보상이 되고 경력은 지위 상승의 사다리가 된다. 외부 충격에도 성벽은 방어막이 되고 해고는 마지막까지 미뤄진다.
성벽 밖은 중소기업·비정규직·하청·플랫폼 노동의 세계다. 시간은 경력을 축적하기보다 불안을 누적시킨다. 임금은 낮고 계약은 반복되며 위험은 일상이고 단절은 상시화된다. 대·중소기업의 임금 격차는 연령이 높아질수록 벌어진다. 한 번 성벽 밖으로 밀려나면 재진입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는 단순한 고용 형태의 차이가 아니다. 보호는 성벽 안쪽에 머무르고 위험은 바깥으로 밀려난 위계적 구조의 산물이다. 역설적으로 이직에 대한 공포는 성벽 안에서 더 강하게 작동한다. 성벽 밖에서 이직은 수평적 이동의 일상이다. 반면 성벽 안에서 이직은 궤도 이탈의 신호탄이다.
노동시장을 둘러싼 갈등이 동시다발적으로 분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청 노동자의 반복되는 산업재해, 원·하청 간 단체교섭권 충돌, 대기업 내부의 성과급 논란 그리고 정년 연장을 둘러싼 세대 간의 날선 대립까지, 겉보기엔 파편화한 문제 같지만 본질은 하나다. 보호는 성벽 내부에, 위험은 외부로 흘러간다.
노동정책도 이 구조 위에서 작동한다. 정부는 고령자 소득 공백을 막기 위해 법정 정년 연장을 예고하고 동시에 ‘근로자 추정제’를 도입해 보호의 사각지대를 줄이려 한다. 두 정책 모두 취지는 명확하다. 그러나 노동 이동이 막힌 구조를 그대로 둔 채 제도만 덧대면 성문은 더욱 굳게 닫힐 뿐이다. 성벽 내부의 보호 수준이 높아질수록 기업은 비용 부담과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신규 채용에 더욱 보수적으로 변한다.
최근 대통령이 고용유연성의 필요성을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도 이 구조적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기업은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유연성을 요구하고 노동은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안정성을 요구한다. 문제는 이 두 요구가 같은 구조 위에서 충돌한다는 데 있다. 유연성은 성벽 외부에 먼저 적용되고 안정성은 성벽 내부에 먼저 남는다. 그 결과 정책은 의도와 달리 갈등을 증폭시킬 수 있다.
가장 큰 비극은 청년 세대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청년들은 늘 성벽의 입구에 서 있지만 그 문턱은 갈수록 높아진다. 설상가상으로 인공지능(AI)과 로봇은 청년들이 성벽 안으로 진입하며 디뎠던 첫 번째 사다리를 걷어내고 있다. 신입 사원이 현장에서 부딪히며 성장하던 초입의 일자리 자체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성벽의 입구는 AI가 좁히고 출구는 정년 연장이 막는다. 그 틈바구니에서 청년들은 더 긴 시간을 스펙 쌓기에 허비하고 일부는 진입 자체를 포기한다. 노동시장은 더 이상 기회의 공간이 아니다.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의 좌절이 머무르는 곳이 되고 있다.
반면 한국은 법적 해고도 어렵지만 이동은 더 어렵다. 길이 막힌 노동시장에서 모두가 성벽에 매달려 생존 투쟁을 벌이는 형국이다.
‘성을 쌓는 자는 망하고 길을 뚫는 자는 흥한다.’ 이 경구는 오늘날 우리 노동시장에 그대로 들어맞는다. 우리는 그동안 보호라는 명목으로 성벽을 높이는 데만 몰두해 왔다. 그 결과 성벽 안의 안정을 얻었을지 모르나 전체 노동시장의 활력과 공정성은 잃어버렸다.
이제 방향을 바꿔야 한다. 해고를 쉽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해고가 죽음이 되지 않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이동의 길을 열어야 한다. 해고의 정당성 여부는 예측 가능해야 하고 직무와 성과에 맞지 않는 경우에는 합리적으로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자는 기업의 울타리에 머무르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역량을 기반으로 시장을 넘나들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이동이 곧 추락이 되지 않도록 안전망이 작동해야 한다. 재교육과 전직 지원, 중소기업 일자리의 질이 함께 뒷받침될 때 성벽 밖으로 나가는 일은 파멸이 아니라 전환이 된다.
해고가 죽음이 되는 사회는 결코 안전한 사회가 아니다. 그것은 길이 막힌 사회일 뿐이다. 이제 선택의 문제만 남았다. 성을 더 높이 쌓을 것인가, 아니면 길을 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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