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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일제 핍박으로 대규모 스포츠 이벤트가 거의 없던 시절이다보니 경평전은 1935년까지 계속되면서 서울, 평양시민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관심 속에 치러졌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독재 정부가 스포츠를 사람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하기 위한 수단으로 썼던 사례와 달리, 식민지에서 열린 도시 대항전은 오히려 피지배 대중들의 공동체 정체성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에는 팀이 아니라 군(軍)이라는 표현을 썼기 때문에 경평전은 경성군과 평양군 대결로 진행됐다. 양팀은 대체로 스포츠 활동 기반이 있던 대학 선수들이 주축이 되었고 분단 이후에 경성군과 평양군 자체가 남북한 국가대표팀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에 몰두하던 일제가 1942년 강제동원을 위해 조선 전역에서 구기종목대회를 금지해버리면서 경평전은 해방 후에야 다시 경기를 치를 수 있게 됐다.
북한 정부가 들어서기 전인 1946년 3월 25일 후일 동대문운동장으로 개칭 후 지금은 철거된 경성운동장에서 해방 후 처음이자 마지막 경평전이 열렸다.
축구에서 벌어진 감정싸움은 분단 체제 하 정부 수립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지던 당시의 정치적 혼란상도 어느 정도 반영한다. 이 갈등은 관중 난동과는 비교도 안될 전쟁이라는 비극으로 비화됐고, 그렇게 경평전은 예전 기록에서나 찾아볼 과거로만 남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