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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을 되짚어 보자. 세입자는 2020년 3월 집주인과 보증금 1억 6,000만 원, 월세 없는 임대차계약을 맺었다. 두 달여 뒤 집주인이 사망했고, 배우자와 네 자녀가 상속인이 되었다. 임대차 기간 만료를 앞두고 세입자는 대출 만기가 지나면 경매가 진행될 수 있다며 서둘러 달라는 문자를 보냈다. 자녀 중 한 명은 가정법원에 한정승인(물려받은 재산의 한도 안에서만 상속 빚을 갚겠다는 신고)을 신청했고, 바로 다음 날 상속인 전원이 종전과 같은 조건으로 기간만 2년 늘리는 계약서를 썼다. 계약서에는 이 계약이 종전 계약의 “2년 연장계약이며, 계약조건은 같다”는 것, 상속인들이 보증금을 “그대로 승계”한다는 것, 세입자의 전세대출 연장에 협조한다는 특약이 붙었다.
쟁점은 그 연장계약서였다. 민법은 상속인이 상속재산을 ‘처분’하면 상속을 통째로 받아들인 것, 곧 단순승인한 것으로 본다(제1026조 제1호). 단순승인이 되면 한정승인의 효력을 내세울 수 없으니, 물려받은 재산만이 아니라 자기 재산으로도 상속 빚을 갚아야 한다. 원심은 연장계약 체결이 바로 그 처분행위라고 보았다. 한정승인 신고 사실을 세입자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계약서까지 쓴 것은 보증금 반환채무를 자기의 채무로 떠안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고, 세입자도 상속인들이 책임지리라 믿었다는 논리다.
한정승인은 빚을 없애 주는 제도가 아니다. 빚은 전액 그대로 남되, 갚을 책임만 물려받은 재산의 범위로 줄여 주는 방어막이다. 상속재산 처분행위 한 번이면 이 방어막이 통째로 사라진다. 이번 판결은 유족이 일상적으로 하는 ‘있던 계약을 그대로 잇는 일’까지 그 함정에 빠뜨려서는 안 된다고 경계선을 그은 것이다.
상속인이라면 도장을 찍기 전에 그 서류가 없던 의무를 새로 만드는 것인지, 있던 관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인지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사건에서도 ‘연장’, ‘그대로 승계’라는 계약서 문구가 유족을 지켰다. 반대로 보증금을 올리거나 새 담보를 제공하는 등 조건을 바꾸면 처분행위로 평가될 위험이 커진다.
그날 상속인들이 찍어준 도장은 세입자의 대출 연장을 도우려는 목적이었지, 아버지의 빚을 떠안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사건을 돌려받은 법원은 그 전제 위에서 다시 판단한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유족이 갚을 범위는 물려받은 재산의 한도로 돌아올 것이다.
■하희봉 변호사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학과 △충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제4회 변호사시험 △특허청 특허심판원 국선대리인 △(현)대법원·서울중앙지방법원 국선변호인 △(현)서울고등법원 국선대리인 △(현)대한변호사협회 이사 △(현)로피드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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