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도 원치 않았던 '절필' [국현열화]<9>

△일제강점기 독보적 여성 동양화가 '정찬영'
매일 창경원 찾아 그린 2m 공작
조선미전 동양화부 첫 여성 특선
가정·화업 양립 신여성이었으나
불운한 시대 가족 비운까지 겪어
섬세한 묘사 수작들 최근 재조명
  • 등록 2025-05-09 오전 7:40:00

    수정 2025-05-09 오전 7:40:00

정찬영의 ‘공작’(1937). 꽃이나 풀, 새를 주요 소재로 삼아 세필로 섬세하게 그려냈던 작가가 유독 눈길·붓길을 자주 내준 대상은 ‘공작’이었다. 2m를 훌쩍훌쩍 넘기는 화면에 깃털 하나하나까지 공을 들여 묘사했다. 1909년 일제가 조선의 궁궐인 창경궁에 동물원·식물원을 들이고 유원지로 개조·개명한 ‘창경원’은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작가가 유일하게 공작을 눈앞에서 볼 수 있는 장소였다. 한 달 이상 관찰하고 사생한 뒤 4폭 병풍으로 제작한 이 작품은 1937년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수상한 작가의 마지막 입선작이 됐다. 지난 5월 1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막한 ‘MMCA 과천 상설전: 한국근현대미술Ⅰ’에 걸렸다. 비단에 색, 154×232.4㎝(4폭 병풍).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문득 사는 일을 돌아보니 그랬습니다. 지켜내는 일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오롯이 세월을 지키는 일 말입니다. 한국미술이 먼저 떠오릅니다. 척박한 세상살이에 미술이 무슨 대수냐고, 그림이 무슨 소용이냐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데일리가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그 쉽지 않았던 한국근현대미술 100년을 더듬습니다. 이건희컬렉션을 입고 더욱 깊어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을 통해섭니다. 5월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과천에서 ‘MMCA 상설전’이란 타이틀 아래 미련 없이 펼쳐내는 300여 점, 그 가운데 30여 점을 골랐습니다. 주역을 찾진 않았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오롯이 세월을 지켜온 작품을 우선 들여다봤습니다. ‘열화’입니다. ‘뜨거운 그림’이란 의미고, ‘식을 수 없는 그림’이란 의지입니다. 전시에 한발 앞서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께 다가섭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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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윤 미술평론가] 일제강점기 경성의 창경원. 한 젊은 여인이 공작장 앞에 조심스레 앉는다. 눈앞에는 커다란 공작 한 마리가 고개를 치켜들고 서 있다. 조용히 연필을 꺼내 들고 숨을 고른 여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종이에 첫선을 그어 내린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늦춘다. 고요한 풍경 속 여인의 모습이 그들을 사로잡는다. 공작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여자라니. 흔치 않은 풍경이었다. 1931년 일이다.

쏟아지는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림에 몰두한 이 여인은 정찬영(1906∼1988)이다. 당시로선 드물게 조선의 여성 동양화가로 촉망받은 신예였다. 1929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1931년에는 바로 그 공작 그림(‘여광’ 1931)으로 특선을 받았다. 길이 2m가 넘는 대형 한국화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조선 여자로서 동양화부에서 처음 특선의 영예를 차지한 작품”이라며 크게 보도했다. 이는 그 시절 여성 예술가가 미술계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안타깝게도 이 그림은 남아 있지 않다. 우리의 근대 작품들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많이 사라졌고, 정찬영의 작품도 한국전쟁 무렵 대부분 자취를 감췄다. 다만 비슷한 소재의 대형작품이 한 점 있기는 하다. 4폭 병풍으로 제작한 ‘공작’(1937)이다. 화면 가득 힘이 넘치면서도 섬세한 묘사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이 작품을 위해서도 정찬영은 창경원을 찾았다. 종이와 연필을 들고 공작을 관찰하며 스케치를 반복했다. 한두 번 다녀온 것이 아니었다. 한 달 넘게, 거의 매일같이 걸음을 했다. 그 열정에 스승 이영일(1903∼1984)은 “평생 미술에 몸바칠 인재”라며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스승 이영일 “평생 미술에 몸바칠 인재”

혜성같이 미술계에 등장한 정찬영은 등단한 지 1년 만이었던 1930년 결혼을 했다. 상대는 식물학자이자 약학자였던 도봉섭(1904∼?). 1930년에 일본 도쿄제대 의학부 약학과를 졸업한 뒤 경성약학전문학교(지금의 서울대 약대) 교수가 된 엘리트였다. 결혼을 앞두고 정찬영은 ‘가정을 이루더라도 작품활동은 계속한다’는 조건을 내밀었다. 화가로서의 삶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비슷한 시기 화가로 활약하던 나혜석(1896∼1984)과 박래현(1920∼1976)의 결혼조건과 같았다. 그만큼 가정과 화업을 병행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는 방증일 것이다.

약속받은 대로 정찬영은 결혼 이후에도 열정을 다해 그림을 그렸다. 결혼한 바로 그해인 1930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을 했고, 그 뒤에도 2년 간격으로 출품하며 입선·특선에 이어 최고상인 창덕궁상(1935)까지 거머쥐었다. 대단한 성과다. 단지 수상 이력 때문만은 아니다. 연이은 수상에 담긴 정찬영의 열정과 열심이 보여서다. 작품을 발표하는 것은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생계를 위해서도, 강요를 받아서도 아니고 그저 좋아서 자발적으로 그리고 또 그렸던 것이다.

하지만 하루종일 그림만 그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정찬영에게도 아내·엄마라는 역할이 있었던 거다. 한정된 시간과 체력을 화업과 가정에 나누어야 했다. 결혼 3년이 지날 즈음 정찬영은 이렇게 말했다. “결혼 전에는 그야말로 그림에 전심전력이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살림이 복잡해지고 아기까지 있다 보니 그림에 열중하기가 어렵습니다. 열의도 줄고 마음도 해이해져요. 창경원에 가서 새를 그리다가도 시곗바늘만 보면 그림 생각은 십리 만리 달아나고 아기 생각, 살림 생각이 먼저 떠오르네요.” 이 고백처럼 아무리 정찬영이어도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된 후에는 예전 같지 않았을 거다. 일도 많아졌지만 마음도 분산되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만큼 작품활동을 이어갔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1939년 무렵 정찬영의 작품은 큰 전환점을 맞는다. 둘째 아들이 세상을 뜨는 일을 겪으면서다. 작품을 발표하거나 전시회에 출품하는 일을 멈췄다. 대신 ‘다른 일’이 생겼다. 집 한 귀퉁이에 심긴 식물을 그리기 시작한다. 남편 도봉섭의 연구를 돕기 위해서였다. 당시 도봉섭은 전국을 돌며 식물을 채집·연구해 식물도감을 만들려고 했다. 정찬영은 그런 남편을 위해 정성껏 그려냈다. 천도백산차, 노란만병초, 동의나물, 금매화, 송악, 독미나리, 개발나물 등등. 공통점이라면 한국 곳곳에서 자라는 독초라는 것. 바로 ‘한국산유독식물’(1940s) 연작이다.

정찬영의 ‘한국산유독식물’(천도백산차·애기백산차·노란만병초·흰만병초, 1940s). 식물학자이자 약학자인 남편 도봉섭의 연구를 돕기 위해 시작한 식물세밀화 연작 중 하나다. ‘한국산유독식물’이란 제목 그대로 ‘독 있는 식물’이 대상이다. 4종씩 큼직하게 확대해 1m 길이의 종이에 정교하게 옮겨냈다. 지난 5월 1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막한 ‘MMCA 과천 상설전: 한국근현대미술Ⅰ’에 걸렸다. 종이에 색, 107×75㎝.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세밀화지만 작품은 역시나 크기가 상당하다. 식물 4종만을 큼직하게 확대해 담은 각 화면은 길이만 1m가 넘는다. 정찬영은 그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관찰해 정밀하게 묘사했고 은은하고 담백하게 칠했다. 정확하고 섬세한 묘사 덕분에 표본처럼 생생하며, 우아하고 기품있는 색채 덕분에 단아하게 아름답다. 게다가 과학자의 정확성과 예술가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품고 있다.

과연 정찬영은 자연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그 아름다움을 깊이 있게 그려내는 화가였다. 공작을 그릴 때처럼 식물을 그릴 때도 다르지 않았다. 내재한 열정을 정제해 조용하면서도 강한 화면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한국전쟁 중 남편 납북 후 그림 멈춰

하지만 1950년 이후 정찬영은 완전히 붓을 내려놓았다. 또 한 번 불어 닥친 인생의 풍파 때문이었다. 광복 이후 서울대 약학대 학장을 지내던 남편 도봉섭이 한국전쟁 중 납북된 것이다. 그날로 정찬영은 가장이 되었다. 삶의 무게가 달라졌다. 가족의 생계가 온전히 그의 어깨에 놓였다. 자신과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미술교사로 취직했다. 학교에서 일하며 집안일과 육아를 해야 했다.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이유도, 여유도 사라졌다. 1988년까지 살았지만 노년에도 그림을 그렸던 것 같지는 않다.

정찬영은 결국 화가로 살지 못했다. 열정이 아무리 컸다 한들 불가항력적인 삶의 조건을 이겨낼 수 없었던 거다. 연이어 차선에 차선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인생. 그럼에도 정찬영은 그 선택에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화가로서뿐만 아니라 아내로, 엄마로, 가장으로서도 단단하게 살아냈다. 그런 정찬영의 삶은 그의 작품 못지않게 깊은 울림을 준다.

정찬영, 아직 우리에게 낯선 이름이다. 불운했던 시대 잇따른 가족의 비운으로 화가로서 활동한 기간이 짧았고, 남겨진 작품 수도 비교적 적다. 여기에 시대의 억압이 얹혔다. 한국전쟁 이후 이념 갈등은 극단으로 치달아 북으로 간 사람들에 대해서는 함구해야 했고, 그 가족들은 숨죽여 살아야 했다. 납북된 남편을 둔 정찬영이 작품을 전시하거나 그림을 연구하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렇게 속절없이 시간이 흘렀고 정찬영은 우리 미술사에서 점점 희미해져 갔다.

정찬영의 작품이 본격적으로 재조명된 것은 최근 일이다.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린 ‘절필시대’ 전이 주요한 계기가 됐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묻혀 있던 정찬영의 작품들이 다시 빛을 보고 관람객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화려한 날개를 활짝 편 공작새의 영롱한 자태. 정찬영의 시대는 지금부터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려 했다는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일찌감치 작가의 길은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이후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 가을·겨울’(2025 출간 예정), ‘꽃피는 미술관: 봄·여름’(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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