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동서남북] 천수이볜은 범죄자인가, 희생양인가

  • 등록 2016-04-22 오후 1:49:04

    수정 2016-04-22 오후 2:32:06

천수이볜(陳水扁) 전 총통은 사면될 수 있을 것인가. 마잉지우(馬英九) 총통의 임기가 불과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대만 정계에 최대 관심사로 떠오른 문제다. 마잉지우가 전임자에 대해 마지막으로 인간적인 예우를 베풀 것인가 하는 것이 관심의 주안점이다. 사면은 최고 정치 지도자인 총통의 고유 권한이기 때문이다. 천수이볜은 재임 당시 직무와 관련해 뇌물을 받은 혐의로 19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상태에서 현재 신병 치료차 보석 중이다.

그러나 천수이볜에게 사면을 베풀 것이라는 조짐은 아직 엿보이지 않는다. 마잉지우가 그런 생각이 없는 것처럼 비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법적인 여건에도 모자란다. 혐의 사실 가운데 미처 사법처리가 마무리되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다 천수이볜 스스로 정치보복을 받는 것처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따져서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죄수에게 사면을 내린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차이잉원(蔡英文) 당선자가 다음달 취임한 이후 그에 대해 사면조치를 내릴 가능성이 적지 않지만 그것은 또 다른 문제다. 물론 종결되지 않은 혐의 사실에 대한 사법 절차가 모두 끝난 뒤의 얘기다. 차이 당선자는 천수이볜의 총통재임 시절 대륙위원회 주임위원(장관급)과 행정원 부원장(부총리)을 지낸 측근이었다. 대만의 민주화와 독립을 내세우며 출범한 민진당 소속으로 천수이볜에 이어 두 번째 정권교체를 이룬 주인공이 차이잉원이다.

주목되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가오슝 및 타이난 시의회가 최근 마잉지우 총통에게 천수이볜의 사면을 건의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는 점이다. 두 곳 모두 민진당 세력이 장악한 지역이다. 타이베이에서도 민진당 소속 시의원들을 중심으로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민진당 진영 일각에서는 그의 무죄를 주장하는 분위기이기도 하다. 이에 비해 국민당 측에서는 천수이볜 스스로 과오를 인정하는 것이 선결과제라고 내세운다.

(사진=AFPBBNews)
결국 민진당 주변의 사면 건의는 마잉지우 총통의 직접적인 처분을 바란다기보다 차이잉원의 취임 이후 사면 단행을 위한 요식적 절차에 가깝다. 일종의 분위기 띄우기라는 해석이다. 사면 논의가 실제 효과를 떠나 정치적 공방에 치우쳤다는 뜻이다. 지금은 설사 사면을 해주고 싶어도 법률적인 요건이 충족되지 않았으므로 논의 자체가 무의미하다.

천수이볜이 뇌물수수와 자금세탁 혐의로 법정에 선 것은 2009년의 일이다. 자신의 총통 임기가 끝난 바로 이듬해다. 1심에서 2억 위안(圓)의 벌금과 함께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3심에서 19년형으로 확정됐다. 타이중 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중 지난해 1월 보석으로 풀려나 지금은 가오슝 자택에서 기거 중이다.

그가 풀려난 것은 신병 악화에 따른 결정이었다. 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동안 인식 장애, 기억력 쇠퇴, 실어증, 수면 무호흡증을 포함한 갖가지 만성질환 증세가 나타나고 있었다. 파킨슨병 초기 증세도 엿보이던 중이었다. 2014년 6월에는 교도소 병원에서 병상에 수건으로 목을 매고 자살을 기도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정신적 충격을 견디지 못한 탓이었을 것이다.

결국 법무부가 의료진의 소견을 받아들여 가석방 조치를 취하게 됐던 배경이다. 현 타이베이 시장인 커원저(柯文哲)도 의료진의 일원이다. 그 직전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국민당이 참패를 겪으면서 정치적 여건이 요동치던 국면이었다는 점도 감안됐음을 무시할 수는 없다. 법무부 당국은 그의 건강이 회복되는 대로 다시 수감하겠다는 입장이지만, 법적인 형평성을 강조하는 선언적인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이 가석방 기간은 수감 기간에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돼있다. 현재 6년의 형기를 채운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천수이볜에 대한 고등법원 법정이 다시 열리도록 예고돼 있다는 점이다. 심리 날짜는 5월 13일로 지정된 상태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혐의에 대해 공판을 속개하겠다는 취지다. 정치적 공방으로나마 사면이 논의되는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기류다. 민진당 측에서는 이런 결정 배후에 마잉지우 총통의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그의 총통임기 만료를 불과 며칠 남겨놓고 법정이 열린다는 자체가 이례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진당 주변에서는 천수이볜이 건강상 문제로 법정에 출두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나돌고 있다. 지난해 보석으로 풀려날 때도 휠체어를 타고 지팡이에 의지한 채였다. 65세의 나이치고는 건강이 썩 좋지 않은 편이다. 건강도 건강이지만 이제 정권이 교체되는 마당에 굳이 법정에 나설 필요가 있겠느냐는 주장도 없지 않다. 재판을 받더라도 차이잉원이 취임한 다음에 받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도 있을 법하다.

한편 천수이볜에 대한 사면과 무죄 주장을 떠나 그가 검찰 수사를 받고 재판을 받기까지 과정에 중대한 절차적 하자가 있었으므로 이에 대한 의혹부터 밝혀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차이잉원 정부가 출범하게 되면 천수이볜 사법처리의 잘못을 가리는 특별위원회를 설치하자는 주장이다. 당시 국민당 측으로 정권이 넘겨지면서 사법부의 유죄 판단에 정치적 개입이 있었는지를 밝혀내야 한다는 얘기다.

문제는 천수이볜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결국 차이잉원의 발목을 잡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지난날 미국에서 리처드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했을 때 뒤를 이어받은 제럴드 포드의 경우가 그러했다. 포드가 다음 대선에서 민주당 지미 카터 후보에게 패배한 가장 큰 이유가 닉슨에 대해 사면을 내린 데 있었다. 스위스은행에 거액의 자금을 빼돌린 천수이볜이 과연 어떤 식으로 사면을 받게 될 것인지 지켜보게 된다. 대만의 민주적 척도를 확인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허영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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