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라밸? 생존이 걱정" 근로시간 단축, 중기 인력난 우려

  • 등록 2018-02-27 오전 11:30:10

    수정 2018-02-27 오후 12:51:34

[이데일리 정태선 기자]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국가 중에서 근로시간이 최고 수준이지만, 생산성은 선진국의 절반도 안된다.” 지난해 OECD가 구조개혁 평가보고서에서 한국을 두고 내린 평가다. 우리나라 근로자의 평균 노동시간은 연 2069시간으로 OECD 국가 중 1위 멕시코(2255시간)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 근로자가 1시간에 33.1달러의 부가가치를 창출할 때 미국 근로자는 두배인 63.3달러를 만들어낸다.

문재인 대통령이 연초 신년 기자회견에서 근로시간 단축을 네 차례나 언급하며, 올해 정부의 역점사업으로으로 꼽은 것도 같은 이유다. 세계 최고 수준의 노동시간을 기록하면서 삶의 질을 개선하기 불가능하다는 판단이다. 특히 정부는 노동시간을 줄여 여가를 늘리면 생산성 향상과 내수 경기 진작의 선순환 효과가 생길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분석에 따르면 5인 미만 사업체와 특례 산업, 적용제외 산업에 속하는 회사를 빼고 나머지 기업에 주 52시간 상한제를 적용하면 새 일자리 13만~16만개를 만들 수 있다.

이에 따라 신세계와 롯데 등 유통 업계를 시작으로 금융계, 대기업들이 9시 출근, 5시 칼퇴근, 유연근무, 야근 금지에 점심·휴식시간 절대 엄수 등 하반기부터 300인 이상 대기업부터 적용하는 근로시간 단축에 대비하고 있다. 중소·중견기업 역시 일과 생활의 균형을 맞춰는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을 추구하고 생산성을 올려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힘쓰고 있다. 주성엔지니어링은 이미 출퇴근시간을 없앴다. 다만 팀장급은 오전 7시에 출근하도록 했다. 팀장들은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 하루 업무 파악을 완전히 끝내고 직원 출근과 동시에 업무지시가 이뤄지도록 한 것이다.

혁신 전도사인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회장은 “기존 일하는 방식을 바꾸지 않고는 살아남지 못한다”며 “업무시간에 몰입도를 최대한 끌어올려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박성택 중소기업중앙회장도 “에너지나 물류비, 구매비 등을 줄여 본격적으로 혁신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노동인력 감소를 앞두고 있는 가운데 공멸할 수 있다“며 스마트공장 도입 확산에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중소기업들은 산업별로 상이한 근로시간 현황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자칫 반쪽짜리 정책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서병문 한국주물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은 ”주물업계에 종사하는 숙련공들의 평균 나이는 50대 후반으로 대부분의 회사들이 젊은 인력을 구하기 어려운 실정“이라며 ”종사하는 인력을 최대한 활용하고 외국인 근로자들을 더해야 그나마 생산 납기라도 맞출 수 있을 정도“라고 호소하고 있다. 경기도 화성 향남산업단지의 자동차 부품기업, 근로자들은 대부분 50~60대 장년이다. 영업직 경력사원 모집 공고를 작년 말 냈는데 두 달째 못 뽑고 있다. 중소기업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데다 각종 복지혜택이 대기업에 비해 적은 탓이다.

서비스업이나 대기업들은 근로시간이 짧아진다고 해도 일손을 구할 수 있지만 도금, 열처리, 주물 등 뿌리산업을 담당하는 지방 중소기업의 상당수는 현재도 생산인력을 구하기 어렵다. 외국인근로자 추가공급정책이 뒷받침 되지 않은 상황에서 근로시간을 일시에 단축시키면 자칫 중소기업들만 범법 지대로 내몰수 있다고 보고 있다.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탄탄한 중견기업들은 근로시간 단축으로 인한 비용증가보다 우수 인재 이탈 등을 더 우려하고 있다. 중견기업에 다니는 직원들이 안 그래도 대기업의 높은 연봉을 부러워하는 상황에서 근로시간까지 차이가 나면 누가 중견기업에 입사하려고 하겠냐는 것이다.

우리와 근로환경이 가장 비슷했던 일본의 경우 법정 근로시간은 주 40시간이며, 시간외 근로 시 25% 이상 가산임금을 지급하고 있다. SPA(패스트패션)업체으로 유명한 유니클로는 지난 2015년 10월부터 1주일에 4일 근무하고 3일을 쉬는 근무제를 도입했으며 육아나 간호를 하면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등 유연근무 체계를 마련해 우수 인재를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도 10년 이상의 긴 시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근로시간을 줄이는 노력을 했다. 1987년 노동기준법 첫 개정 후 주간 법정근로시간을 46시간에서 44시간, 40시간 등으로 순차적으로 줄였고, 대부분 사업장까지 주 40시간 근무가 안착된 시기는 1999년이었다. 또 일본은 10인 미만 특별조치대상 사업장은 현재 주44시간까지 가능하도록 허용하고 중소기업이 근로시간을 단축하면 지원금을 주고 있다.

중소기업계는 최저임금보다 근로시간 단축의 충격이 더 클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노민선 중소기업연구원 박사는 “과도한 노동시간은 우리나라 생산성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근로시간 단축은 분명히 필요하다”면서도 “일본처럼 중소기업의 현실을 고려해 단계적인 근로시간 단축 뿐만 아니라 인센티브 등 여러 지원 제도를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중소기업의 입장에서는 인력난이 심화할 가능성이 존재하고, 근로자의 입장에서는 실질소득이 감소할 가능성이 높다”면서 “정부는 영세 중소기업에 대한 근로시간 단축 유예나 특별연장근로 허용 등에 대해서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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