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마켓in 송재민 기자] 정부가 추진하는 연간 40조원 규모의 벤처투자 시장 조성 구상이 본격화하고 있다. 국내 최대 공적 자본인 국민연금이 대규모 벤처펀드 출자에 나서며 ‘제3 벤처붐’의 마중물이 될 수 있을지 시장의 이목이 쏠린다. 단순한 정책 선언을 넘어, 실제 자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 |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9월 17일 경기도 성남시 스타트업 스퀘어에서 자율주행 순찰 로봇 시연을 지켜보고 있다. (사진=대통령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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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는 올해 총 4000억원 규모의 벤처펀드 출자 계획을 확정했다. 연간 출자 규모가 1500억~2000억원 수준에 머물던 과거와 비교하면 두 배 이상 확대된 수치다. 연말까지 위탁운용사(GP) 6곳 내외를 선정해 운용사별 250억~750억원을 배분할 예정이다. 출자 비율은 약정액의 2% 이상으로 제한하고, 공동운용(Co-GP)은 허용하지 않는다.
운용 조건 역시 보수적이고 성과 중심이다. 국민연금은 내부 기준을 통해 펀드의 목표수익률(IRR)을 8% 이상으로 설정했다. 운용기간은 4년, 만기는 8년 이내로 정해 리스크 관리 장치도 강화했다. 국민연금이 직접적인 모험자본 역할을 맡되, 성과 중심의 투명한 펀드 구조를 설계했다는 점에서 의미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번 출자는 이재명 정부가 추진하는 ‘벤처투자 40조원 시대’ 구상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정부는 지난 상반기부터 정책금융과 연기금 등 공적 자금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벤처투자 생태계 조성을 예고한 바 있다.
현재 국내 벤처투자 규모는 연간 약 12조원 수준이다. 정부는 이를 40조원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글로벌 4대 벤처강국 실현을 목표로 제시하며 연기금·퇴직연금의 벤처투자 허용과 모태펀드 예산 확대 등의 구체적 방안을 내놓았다. 그동안 성장금융·모태펀드가 중심이었던 정책자금의 흐름에 국민연금이 가세하면서, 공적 자본이 민간 벤처시장으로 유입되는 통로가 넓어질 전망이다.
시장에서는 국민연금이 사실상 ‘앵커 LP’로서 벤처투자 시장의 기준점을 제시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국민연금이 움직이자 다른 연기금·퇴직연금·공제회 등 대형 기관의 후속 참여도 기대되고 있다. 한 운용사 관계자는 “공적 자본이 움직이면 민간 LP도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얻는다”며 “국민연금 출자가 민간 펀드레이징에도 레버리지 효과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국민연금의 출자가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국민연금은 본래 안정적 자산운용을 원칙으로 해온 기관이다. 벤처투자 확대가 성과로 이어지지 못할 경우, 국민적 비판과 정치적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다. IRR 8%라는 높은 허들은 운용사들에게 실질적인 압박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다.
벤처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정책적 방향성을 갖고 시장에 진입한 만큼, 단기 수익률보다 중장기 산업 육성 효과를 함께 봐야 한다”며 “이번 출자가 단순한 일회성 펀드가 아니라, 향후 공적 자본의 투자 철학을 바꾸는 전환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