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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주재로 이뤄지는 이번 비상 정상회담에는 독일, 영국, 이탈리아, 폴란드, 스페인, 네덜란드, 덴마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무총장, 유럽연합 이사회 및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의장이 참석한다. 이는 유럽이 우크라이나 안보를 책임져야 한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에 따른 것이지만, 미국을 중심으로 유럽의 안보체계를 확립했던 지난 75년 체제를 지속할 수 없다는 근본적 위기인식이 깔려 있다.
미러 정상회담 이르면 이달 말…우크라·유럽 ‘빠져’
폭스뉴스 등 미국 언론에 따르면 스티브 위트코프 미국 백악관 중동특사, 마이크 왈츠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러시아 측과의 회담을 위해 16일 사우디 방문길에 올랐다. 이들은 사우디에서 현재 중동 순방 중인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과 합류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매체 악시오스는 소식통 2명을 인용해 미국과 러시아 당국자 회담이 오는 18일 열린다고 밝혔다.
러시아는 참석자 면면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 소식통은 악시오스에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참석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이번 고위급 회담은 지난 12일 트럼프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전화 통화를 해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협상에 즉각 착수하기로 한 것의 후속 조치다. 이번 논의에서 어느 정도 성과가 도출될 경우, 이르면 이달 말 양국의 정상회담이 개최될 수 있다.
이번 고위급 회담에서 우크라이나 정부는 참여하지 않는다. 안드리 예르마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비서실장은 이날 텔레그램에 올린 글을 통해 “지금까지 진행된 회담도, 계획된 회담도 없다”고 밝혔다. 이뿐만 아니라 키스 켈로그 미국 우크라이나 특사는 유럽이 평화회담에 참여할 것이냐는 질문에 “그럴 일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미국이 유럽의 참여를 필요로 한다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이는 미국이 더이상 유럽을 자동으로 지원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고 밝혔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유럽에 헌신하기보다 ‘왕따 국가’인 러시아와 ‘전범’ 푸틴 대통령에 동조하려고 “편을 바꿨다”면서 “우리는 75년간 알고 있었던 대서양 관계에 더 이상 의존할 수 없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유럽평화유지군·핵우산 힘 받을까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 정책 변화로 인해,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미국과 유럽의 노력은 이미 타격을 받고 있다. 미국 국제개발처(USAID)에 대한 예산 삭감과 대외 원조 동결로 인해, 우크라이나의 전력망 유지에 필요한 핵심 부품 생산이 중단된 상태다.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이번 겨울에 더 오랜 시간 동안 전력 부족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을 벗어난 자주적인 안보 체계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힘을 받고 있다.
앞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등장을 “전격적 충격”(Electroshock)이라고 묘사하며 유럽이 자체적으로 미래를 보장하고 우크라이나 안보를 책임지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영국 총리가 우크라이나에 군을 배치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영국이 가세하면서 마크롱 대통령이 제안한 유럽 평화유지군 아이디어도 힘을 받을 가능성이 커졌다.
그동안 우크라이나 파견과 유럽 평화유지군 등의 제안에 소극적이었던 독일 역시 변화의 기류가 보인다. 가디언에 따르면 오는 23일 총선에서 독일 총리로 유력한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독교민주당(CDU) 대표는 유럽 공동 핵우산을 만들자는 마크롱 대통령 제안에 관심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유럽연합(EU) 의회 다수당인 유럽국민당(EPP)의 만프레트 베버 대표 역시 마크롱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일 때가 됐다고 밝혔다. 이번 독일 총선에 녹색당 총리 후보로 나선 로베르트 하베크 부총리 겸 경제기후보호장관은 유럽은 중국과 러시아보다 더 심각한 민주주의 위협이라고 밝힌 JD 밴스 미국 부통령의 연설이 유럽과 미국 관계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며 “뮌헨에서 서구의 가치 공동체가 종식됐다”고 말했다.
경제적 위기와 정치적 혼란에 빠져 있는 유럽은 그동안 나토에 대한 방위비 부담을 늘리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위협에도 속도를 보이지 않았지만, 당장 미국의 지원이 빠르게 줄 수 있는 상황에서 발밑에 있는 러시아는 실존적 위협이다. 보리스 피스토리우스 독일 국방장관은 러시아가 앞으로 5년 간 최소한 한 개의 나토 국가를 공격할 수 있다고 예측했다.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폴란드와 발트해 공화국은 비슷한 우려를 표명했다.
버지니아주 민주당 상원의원인 마크 R. 워너는 “만약 근본적인 신뢰와 동맹이 없이 모든 것이 협상전술에 의해 좌우된다면, (유럽) 사람들은 이제 미국과의 모든 것이 공유된 가치와 역사, 과거의 독재에 대한 공동 방어에 기반 하기보다는 거래적인 것으로 느끼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