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마켓in 허지은 기자] 경영권 분쟁 때마다 재계 오너들 사이에 등장하는 이른바 ‘백기사 동맹’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단순한 지분 매매를 넘어 교환사채(EB) 발행, 전략적 재매입 등 복잡한 금융 기법을 동원해 각자의 경영권 방어를 위해 헤쳐모이는 식이다. 최근 호반의 공격을 받은 한진그룹과 LS그룹이 맺은 ‘반(反) 호반’ 동맹이 대표적이다. 재벌 중심의 기업 환경 속에서 형성된 독특한 연대 양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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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아연(010130) 역시 위기에 빠진 한진그룹에 조력을 줬다. 호반과의 지분 격차가 1.5%포인트로 좁혀지자 한진칼은 보유 중인 자사주 0.66%를 사내복지기금에 출연하고 4년 전 고려아연에 팔았던 정석기업 지분도 되사왔다. 의결권이 없는 자사주를 복지기금에 출연하면 의결권을 부활시킬 수 있고, 정석기업은 한진그룹 지배구조 최상단에 있는 기업인 만큼 지배력 강화 목적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2021년 한진 오너 일가는 한진 오너 일가는 상속세 재원 마련을 위해 정석기업 지분 12.22%를 고려아연 측에 팔았다. 고려아연은 해당 지분을 481억원에 샀다. 4년 만에 되팔기로 한 금액은 521억원으로, 그동안 고려아연이 배당으로 챙긴 40억원 가량을 더해 80억원 상당의 차익을 남겼다.
앞서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 당시에도 비슷한 장면이 연출됐다.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은 분쟁 발발 직후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과 회동을 가졌다. 한화는 고려아연 지분 7.76%를 보유한 주요 주주로, 2022년 고려아연과 전략적 파트너십 강화 차원에서 자사주 맞교환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후 지난해 11월 고려아연은 보유 중이던 ㈜한화 지분 7.25%를 한화에너지에 넘겼다. 한화에너지는 김동관 부회장을 비롯한 3형제가 지분 100%를 보유한 가족 회사로, 사실상 고려아연이 한화 3형제의 지배력 강화에 기여한 양상이 됐다. 고려아연은 지분 매도로 약 1500억원의 유동성과 한화라는 우군을 확보했고, 한화는 승계 조력을 받은 ‘윈-윈’으로 평가된다.
이같은 백기사 동맹에 대한 시장의 평가는 엇갈린다. 재벌 위주의 국내 환경에서 경영권 안정이 곧 기업의 안정이고, 장기적인 시너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선 긍정적인 반응이 나온다. 반면 시장 교란이자 담합, 사적 이익의 수호 수단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일종의 파킹딜이나 다름없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 공정거래위원회는 총수 일가의 우회 지분 거래, 우호 지분 활용 등에 대해 감시와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우호 지분을 빌려주고 되사오는 방식이 사익 편취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에서다. 다만 광범위하게 이뤄지는 기업 간의 연대가 명시적인 불공정거래로 규정되긴 어려워, 법적 판단보다는 시장의 해석과 압박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많은 실정이다.
IB업계 관계자는 “지배구조가 안정되면 경영도 안정되고, 장기적 시너지로 이어질 수 있다”면서도 “해당 지분 투자 과정에서 회삿돈이 활용되는 만큼 배임 이슈가 불거질 가능성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