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한전진 기자] 정권 교체기를 맞은 유통업계가 조심스레 숨을 고르고 있다. 탄핵과 조기 대선이라는 정치적 불확실성에 고물가, 고환율까지 겹치며 내수 한파가 장기화하는 상황. 기업들은 불안정한 환경 속에서도 시장을 지켜냈지만 더는 자구책만으로 버티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정책 변화가 뒤따르지 않으면 구조적 경쟁력 저하가 현실화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업계 전반에 퍼져 있다.
 | 서울의 한 대형마트 채소 코너에서 시민들이 장을 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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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유통업계는 최근 수년 간 산업 환경이 빠르게 변화한 데 반해 법·제도는 여전히 과거 기준에 머무르고 있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현장의 흐름과 괴리된 규제가 누적되면서 이제는 단순한 손질을 넘어 구조 개편 수준의 대응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대표적인 것이 2012년 제정된 유통산업발전법이다. 대형마트와 준대규모점포에 대한 출점 제한·의무휴업일 지정 등을 골자로 한 이 법은 10여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한 대형마트 관계자는 “처음엔 전통시장 보호라는 명분이 있었지만, 당시와는 유통 구조도 소비 흐름도 전혀 다르다”며 “온·오프라인의 경계가 사실상 사라졌는데, 법은 여전히 오프라인에만 작동한다”고 지적했다.
이커머스 업계 역시 낡은 규제 손질을 바라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알리익스프레스(알리), 테무, 징둥 등 C커머스(중국 이커머스)와의 역차별 문제가 대표적이다. 국내 업체들은 KC인증, 부가세 납부, 각종 안전·환경 규제를 모두 준수해야 하지만, 해외직구 제품은 사실상 규제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지적이다. 예컨대 국내 아동복 업체는 1만원짜리 셔츠 하나를 팔기 위해 인증 절차와 각종 행정 비용을 부담해야 하지만, 중국산 저가 제품은 별다른 제약 없이 대량으로 유통되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국내 온·오프라인 유통 채널이 여전히 낡은 법에 발이 묶인 사이 C커머스는 빠르게 국내 소비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앱(애플리케이션) 분석업체 와이즈앱·리테일에 따르면 지난 4월 기준 국내 이커머스 월간 활성 사용자 수(MAU) 순위에서 알리익스프레스는 880만명으로 쿠팡(3391만명), 11번가(893만명)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테무는 847만명으로 알리를 바짝 뒤쫓으며 4위에 올랐다.
 | 2025 서울국제화장품미용산업박람회 및 국제건강산업박람회를 찾은 외국인 바이어와 관람객들이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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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뷰티(화장품) 업체들도 새 정부에 대한 기대가 작지 않다. 특히 최근 몇 년간 K패션 브랜드의 해외 진출이 가속화하면서, 국내외를 막론한 제도 정비의 필요성이 커졌다는 데 업계의 시선이 모인다. 한 패션 브랜드 관계자는 “C커머스나 보세 쇼핑몰을 통해 국내 디자이너 제품을 모방한 유사 상품이 국내외 무분별하게 유통되고 있지만 제재는 사실상 전무하다”며 “이는 단순한 판매 피해를 넘어 창작 생태계 전반을 위협하는 지식재산권 침해로, 정부 차원의 개입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뷰티 업계도 정부 지원 없이는 수출 성장세를 이어가기 어렵다고 본다. K뷰티는 지난해 처음으로 연간 수출 102억달러를 돌파하며 글로벌 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웠지만, 특정 국가에 편중된 수출 구조와 외교 리스크는 여전히 부담 요인이다. 한 화장품 업체 관계자는 “관심은 커졌지만 지정학적 변수도 더 복잡해졌다”며 “보다 안정적인 수출 환경을 위한 외교적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제 업계의 목소리는 단순한 경기 부양 요구를 넘어서는 분위기다. 낡은 정책이 산업 현실과 동떨어진 채 수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규제 정비 없이 방치될 경우 유통 산업 전반의 경쟁력이 구조적으로 약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반면 해외에서는 디지털 전환과 소비 행태 변화에 맞춰 온·오프라인 규제를 함께 손보고, 산업 구조를 재설계하려는 움직임이 확산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기업들이 버텨온 시간이었다면 앞으로는 정책이 산업을 끌어줘야 할 때라는 지적이다. 전문가들도 이번 정권 교체가 유통 산업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길 기대하고 있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대형마트 의무휴업제처럼 낡은 규제는 시장 환경과 맞지 않기 때문에 지자체 자율 운영이나 폐지 방향으로의 검토가 필요하다”며 “지금처럼 소비 위축이 심각한 시기에는 규제보다는 소비 진작과 시장 활성화가 우선돼야 한다”고 했다. 또 “온·오프라인의 경계가 사라진 시대인 만큼, 과거 사고에 머물지 말고 새로운 환경에 맞는 정책 전환이 시급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