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면 심리치료는 환자의 표정과 몸짓 등 다양한 정보를 확인하며 상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시간과 장소의 제약, 비용, 정신건강 치료를 받는 데 대한 사회적 낙인과 심리적 부담 등으로 접근이 쉽지 않은 경우가 있다. 화상상담이 이러한 한계를 일부 줄였지만, 화면을 통한 상담에서는 심리적 몰입이나 비언어적 소통을 충분히 유지하기 어렵다는 과제도 남아 있다. 이에 실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아바타를 이용하면서도 표정과 움직임을 전달하는 새로운 형태의 원격 심리치료가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으나 이에 대한 근거와 기준은 부족한 실정이었다.
이번 연구는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조철현 교수 연구팀, 국민대학교 스마트경험디자인학과 허정윤 교수 연구팀,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USC) 애넌버그 커뮤니케이션·저널리즘 스쿨 연구진과 공동으로 진행됐다. USC 애넌버그 스쿨 박사과정 이혜리와 국민대학교 스마트경험디자인학과 황지현 석사가 공동 제1저자로, 조철현 교수와 허정윤 교수가 공동 교신저자로 참여했다.
연구에 사용된 가상환경에서는 참여자의 실제 얼굴 대신 익명 아바타가 활용됐다. 다만 카메라를 통해 이용자의 얼굴 표정과 눈의 움직임, 몸짓과 고개 움직임 등을 실시간으로 아바타에 반영해 상담자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가상공간도 단순한 상담실 하나로 구성하지 않고, 상담 전 준비공간과 개인 상담실, 상담 후 성찰 공간, 익명으로 다른 이용자와 간접적인 연결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 등으로 나눴다.
연구팀은 심리건강 관리의 필요성을 느끼는 만 19세부터 70세까지의 성인 60명을 대상으로 아바타 매개 원격 심리치료를 진행했다. 이 가운데 다양한 연령과 특성을 반영해 30명을 선정하고, 상담 경험에 대해 심층 면담을 진행해 질적 분석을 실시했다. 최종 심층면담에는 여성 16명, 남성 14명이 참여했으며 면담에서 나온 2,233개의 초기 분석 항목을 508개로 정리한 뒤 4개의 핵심 주제를 도출했다.
첫째는 ‘익명성과 자기표현의 균형’이었다. 실제 외모가 드러나지 않는 아바타가 심리적인 부담을 낮춰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보다 편안하게 표현하도록 도울 가능성이 확인됐다. 특히 자신의 모습과 똑같이 생긴 아바타보다 표정이나 몸짓이 자연스럽게 반영되는 ‘행동의 사실성’이 이용자가 아바타를 자신의 분신처럼 느끼는 데 중요한 요소로 나타났다.
셋째로 연구팀은 가상공간에서의 상담과 현실의 일상을 이어주는 지속적인 피드백 구조가 필요하다고 봤다. 연구팀은 이러한 연결을 ‘메타-커넥션(meta-connection)’으로 설명했다.
가상공간에서의 상담 경험이 그 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의 감정 점검과 행동 변화로 이어지고, 다시 다음 상담으로 연결되는 구조를 뜻한다. 상담 이후 감정이나 상태를 기록하고, 정기적인 심리평가나 알림, 개인 상태에 맞는 콘텐츠 등을 통해 다시 자신의 상태를 돌아볼 수 있게 하는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상담자의 역할과 기술적 안정성도 핵심 요소로 나타났다. 실제 얼굴을 마주하는 상담과 달리 아바타 상담에서는 고개 끄덕임이나 시선, 반응과 같은 제한된 신호가 상대적으로 더 중요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참여자들은 상담자의 아바타가 적절하게 반응하지 않을 경우, 내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있는가‘라는 불안감을 느끼기도 했다.
이에 따라 연구팀은 아바타를 통한 언어·비언어 소통 방법을 익힐 수 있는 상담자 교육과 함께 안정적인 네트워크, 다양한 기기에서의 접속, 쉬운 이용 안내 등이 함께 마련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한 연구팀은 향후 실제 서비스로 확대하기 위해서는 실시간 표정 정보 등 민감한 정보를 안전하게 처리할 수 있는 개인정보 보호와 보안 체계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구팀은 익명 아바타가 가진 장점의 이면도 함께 짚었다. 사회불안이나 수치심이 큰 사람이 아바타 뒤에서만 계속 대화하려 할 경우 ’숨어 있어야만 말할 수 있다‘는 생각이 굳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이를 불안을 당장은 줄여주지만 장기적으로는 회피를 지속시킬 수 있는 ’안전행동(safety behavior)‘의 가능성으로 설명했다. 아바타 매개 원격 심리치료를 대면치료와 완전히 분리된 장기적인 대체수단으로 보기보다는, 필요한 치료 수준에 따라 방법을 연결하는 ’단계적 돌봄‘ 안에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연구팀은 향후 장기 추적 연구와 대면·화상 상담과의 비교, 메타버스 환경에 맞는 치료자 교육, 비용효과 분석과 의료체계 연계, 다양한 문화권과 디지털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조철현 교수는 “이번 연구의 핵심은 ’익명성과 정서적 연결은 양자택일이 아니다‘라는 점”이라며 “얼굴을 가리면서도 표정은 전달하는 설계가 오히려 자기개방의 문턱을 낮출 수 있다는 것을 사용자 경험 수준에서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어 “다만 이 장점은 그대로 위험이 될 수도 있다”며 “숨을 수 있다는 안도감이 회피를 고착시키지 않도록 아바타 기반 상담은 대면 진료와 단절된 대체재가 아니라 단계적 돌봄 체계 안에서 설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허정윤 교수는 “메타버스 심리치료를 ’상담실 하나를 가상으로 옮기는 일‘로 보면 절반만 설계하는 셈”이라며 “사용자는 상담실에 들어가기 전과 나온 후에도 여전히 치료 여정 위에 있었고, 대기 공간과 성찰 공간이 그 여정을 지탱하고 있었다. 사용자 경험 관점에서 공간을 단계적으로 설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 ’Avatar-Mediated Telepsychotherapy in a Metaverse-Informed Virtual Environment: Qualitative Study of User Experiences and Design Requirements‘는 2026년 8월 디지털 헬스 분야 국제학술지 ’Journal of Medical Internet Research‘에 게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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