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부동산부

전재욱

기자

오너의 취향

  • '성공회 가문' 한화의 성공[오너의 취향]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한화 창업주 현암(玄巖) 김종희는 어려서 별명이 ‘대갈 장군’이었다. 출생(1922년)하고 유년기를 보낸 충남 천안군 천안면 부대리(현 천안시 서북구 부대동)에서 머리 크기로 현암을 당할 친구가 없었다. 머리가 크면 공부를 잘한다는 속설은 그에게 해당했다. 총명하던 현암은 마을의 북일학교(현 천안부대초)를 다녔다. 부대리 성공회 신자들이 세우고 영국 성공회 신부 세실 쿠퍼(한국명 구세실)가 교편을 잡은 서양식 교육 기관이었다.인천 남동구 옛 한화화약공장 부지에 있는 예배당 성 디도 채플. 화약 제조 공정에 투입된 임직원 안전과 회사의 안녕을 기도하는 공간이다. 공장은 현재 한화기념관으로 바뀌었다.(사진=한화)현암은 북일학교에서 공부하며 독실한 성공회 신자로 자랐다. 당시 세실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디도. 북일학교에서 받은 교육은 디도가 1937년 서울의 경기도립상업학교(도상·현 경기상고)에 입학하는 데에 밑거름이 됐다. 도상은 국내 제일의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최고 실력을 갖춘 한국과 일본 학생이 모여서 치열하게 경쟁했다. 디도는 여기서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시련은 뜻밖의 순간 닥쳤다. 한국 학생이 일본 학생에게 구타를 당하는 모습을 보고 디도가 싸움에 끼었다. 기골장대 디도의 완력에 일인 학생은 나가떨어졌다. 이 일로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았다.애초 디도의 부친은 아들이 가업을 이어받아 농사짓기를 바랐다.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학업을 이어간 상황에서 퇴학 처분을 받은 것이다. 크게 좌절한 디도가 찾아간 곳은 서울 성공회 대성당이었다. 마침 부대리에 있던 세실 신부가 한국교구장으로 부임해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련을 주시면서 키운다네.” 신부의 격려에 힘을 낸 디도는 원산상업학교로 전학하고 학업을 마쳤다.졸업한 디도는 1942년 일인이 운영하는 조선화약공판주식회사에 취업했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전을 선언하자 회사의 일인 경영진은 고국으로 돌아갔다. 디도는 지배인으로 임명돼 사실상 회사를 인수했다. 미 군정이 들어서고 화약 수요가 늘어 회사 매출은 크게 뛰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회사는 1952년 한국화약(한화) 주식회사로 재출범했다. 디도는 회사의 인천 화약공장 한편에 성 디도 채플 공간을 마련했다. 위험한 화약 공정에 투입된 임직원의 안전과 회사의 안녕을 기원하는 예배당이다.해방과 회사의 성장과 더불어 디도를 기쁘게 한 것은 세실 신부의 귀환이었다. 세실 신부는 대한성공회가 반일 성명을 낸 것을 계기로 1941년 한국에서 추방당했다. 세상이 바뀌고 1946년 그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디도는 세실 신부를 면담하면서 유년기를 회상했다. 영국인 세실 신부는 인도 총독의 아들로서 유복하게 자란 영국 귀족이었다. ‘세실 신부의 헌신이 아니었으면 부대리 마을 아이들은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디도가 1975년 천안북일고를 설립해 교육 사업에 뛰어드는 데에는 세실 신부의 영향이 지대적이었다.김종희 한화 창업주.(사진=한화)한화 가(家)는 디도의 조부부터 장남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세례명 프란시스)과 손자 대에 이르기까지 성공회 신자다. 김 회장은 1988년부터 성공회대 이사를 지내다가 1997년 5대 이사장에 취임할 만큼 독실하다. 한화그룹은 성공회대 대학본부 건물 건립을 후원했고, 학교 측은 1992년 본관을 ‘승연관’이라고 명명했다. 프란시스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불어닥친 1999년 전국경제인연합회 구조조정특별위원장을 지낼 당시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를 자문위원으로 위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성공회는 한화가 분가할 당시 집안을 결속하는 역할을 했다. 디도가 1981년 갑작스레 숨을 거두자 한화가 장남(김승연)은 그룹을, 차남(김호연)은 빙그레를 각각 맡게 됐다. 1990년 초반, 이 과정에서 승계와 상속 문제를 두고 형제는 크게 다퉜다. 두 사람은 1995년 부친의 영정에서 눈물로 화해했는데, 디도의 부인 강태영 여사(세례명 아가다)는 이를 새기고자 가톨릭 종교시설 꽃동네에 10억 원을 헌금으로 냈다. 김 회장 3남매는 이듬해 모친의 고희를 기념해 꽃동네에 다시 1억 원을 기부했다. “내게는 잔치보다 가족의 화합이 큰 선물”이라는 게 아가다 요청이었다.성공회는 영국 개신교 교회로서 그리스도교 가운데 가톨릭과 정교회에 이어 교세가 크다. 대한성공회는 1890년 설립돼 올해로 선교 132주년을 맞았다.
    전재욱 기자 2022.12.13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한화 창업주 현암(玄巖) 김종희는 어려서 별명이 ‘대갈 장군’이었다. 출생(1922년)하고 유년기를 보낸 충남 천안군 천안면 부대리(현 천안시 서북구 부대동)에서 머리 크기로 현암을 당할 친구가 없었다. 머리가 크면 공부를 잘한다는 속설은 그에게 해당했다. 총명하던 현암은 마을의 북일학교(현 천안부대초)를 다녔다. 부대리 성공회 신자들이 세우고 영국 성공회 신부 세실 쿠퍼(한국명 구세실)가 교편을 잡은 서양식 교육 기관이었다.인천 남동구 옛 한화화약공장 부지에 있는 예배당 성 디도 채플. 화약 제조 공정에 투입된 임직원 안전과 회사의 안녕을 기도하는 공간이다. 공장은 현재 한화기념관으로 바뀌었다.(사진=한화)현암은 북일학교에서 공부하며 독실한 성공회 신자로 자랐다. 당시 세실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디도. 북일학교에서 받은 교육은 디도가 1937년 서울의 경기도립상업학교(도상·현 경기상고)에 입학하는 데에 밑거름이 됐다. 도상은 국내 제일의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최고 실력을 갖춘 한국과 일본 학생이 모여서 치열하게 경쟁했다. 디도는 여기서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시련은 뜻밖의 순간 닥쳤다. 한국 학생이 일본 학생에게 구타를 당하는 모습을 보고 디도가 싸움에 끼었다. 기골장대 디도의 완력에 일인 학생은 나가떨어졌다. 이 일로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았다.애초 디도의 부친은 아들이 가업을 이어받아 농사짓기를 바랐다.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학업을 이어간 상황에서 퇴학 처분을 받은 것이다. 크게 좌절한 디도가 찾아간 곳은 서울 성공회 대성당이었다. 마침 부대리에 있던 세실 신부가 한국교구장으로 부임해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련을 주시면서 키운다네.” 신부의 격려에 힘을 낸 디도는 원산상업학교로 전학하고 학업을 마쳤다.졸업한 디도는 1942년 일인이 운영하는 조선화약공판주식회사에 취업했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전을 선언하자 회사의 일인 경영진은 고국으로 돌아갔다. 디도는 지배인으로 임명돼 사실상 회사를 인수했다. 미 군정이 들어서고 화약 수요가 늘어 회사 매출은 크게 뛰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회사는 1952년 한국화약(한화) 주식회사로 재출범했다. 디도는 회사의 인천 화약공장 한편에 성 디도 채플 공간을 마련했다. 위험한 화약 공정에 투입된 임직원의 안전과 회사의 안녕을 기원하는 예배당이다.해방과 회사의 성장과 더불어 디도를 기쁘게 한 것은 세실 신부의 귀환이었다. 세실 신부는 대한성공회가 반일 성명을 낸 것을 계기로 1941년 한국에서 추방당했다. 세상이 바뀌고 1946년 그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디도는 세실 신부를 면담하면서 유년기를 회상했다. 영국인 세실 신부는 인도 총독의 아들로서 유복하게 자란 영국 귀족이었다. ‘세실 신부의 헌신이 아니었으면 부대리 마을 아이들은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디도가 1975년 천안북일고를 설립해 교육 사업에 뛰어드는 데에는 세실 신부의 영향이 지대적이었다.김종희 한화 창업주.(사진=한화)한화 가(家)는 디도의 조부부터 장남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세례명 프란시스)과 손자 대에 이르기까지 성공회 신자다. 김 회장은 1988년부터 성공회대 이사를 지내다가 1997년 5대 이사장에 취임할 만큼 독실하다. 한화그룹은 성공회대 대학본부 건물 건립을 후원했고, 학교 측은 1992년 본관을 ‘승연관’이라고 명명했다. 프란시스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불어닥친 1999년 전국경제인연합회 구조조정특별위원장을 지낼 당시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를 자문위원으로 위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성공회는 한화가 분가할 당시 집안을 결속하는 역할을 했다. 디도가 1981년 갑작스레 숨을 거두자 한화가 장남(김승연)은 그룹을, 차남(김호연)은 빙그레를 각각 맡게 됐다. 1990년 초반, 이 과정에서 승계와 상속 문제를 두고 형제는 크게 다퉜다. 두 사람은 1995년 부친의 영정에서 눈물로 화해했는데, 디도의 부인 강태영 여사(세례명 아가다)는 이를 새기고자 가톨릭 종교시설 꽃동네에 10억 원을 헌금으로 냈다. 김 회장 3남매는 이듬해 모친의 고희를 기념해 꽃동네에 다시 1억 원을 기부했다. “내게는 잔치보다 가족의 화합이 큰 선물”이라는 게 아가다 요청이었다.성공회는 영국 개신교 교회로서 그리스도교 가운데 가톨릭과 정교회에 이어 교세가 크다. 대한성공회는 1890년 설립돼 올해로 선교 132주년을 맞았다.
  • 재벌 일상이 궁금해? 이들의 SNS를 보라[오너의 취향]
    [이데일리 김영환 기자] 최근 JTBC 금토일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이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일반 대중이 스타만큼이나 열광하는 존재가 재벌이다. 시대가 지나도 재벌가의 이야기는 다양하게 변주되고 뭇사람들의 시선을 이끈다. 다만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재벌들은 다소 작위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호화로운 저택에서 명품 양복을 차려입고 값비싼 와인을 마신다. 키우는 반려동물에게는 일반인들은 생각도 못할 만큼 비싼 먹이를 준다.이런 거리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줄이는 재벌들이 있다. 특히 창업주의 3~4세들은 자신들을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는 MZ세대(밀레니얼+Z세대)들로,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을 보여준다.박서원 전 오리콤 부사장(왼쪽)과 배우 이제훈(사진=박서원 인스타그램)박용만 두산그룹 9대 회장의 장남인 박서원 전 오리콤 부사장은 영민하게 SNS를 활용하는 인플루언서다. 오리콤 부사장과 두산매거진 대표이사 등을 거쳐 독자 노선을 선언하고 묵묵하게 자신의 길을 걷는 경영인이다. 박 전 부사장은 SNS에 자신을 ‘예술가’로 소개하고 있다.박 전 부사장은 괴짜 재벌 4세로 주목받았다. 지난 2011년 펴낸 책 제목도 ‘생각하는 미친놈(세상을 유혹하는 크리에이터 박서원의 미친 발상법과 독한 실행력)’이다. 박 전 부사장은 단국대를 중퇴한 후 도망치듯 2000년 뉴욕으로 떠났다. 대학생 시절 전공인 경영학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과를 6번이나 바꿀 만큼 자신의 길을 모색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그러나 진로를 디자인으로 정한 뒤 뉴욕 스쿨오브비주얼아트를 졸업하고, 한국인 최초로 국제 5대 광고제를 석권하면서 유망한 크리에이티브디렉터로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박 전 부사장은 재벌가의 정석이라 할 수 있는 경영 수업을 마다하고 ‘광고인 박서원’의 길을 걸었다. 최근 부친인 박용만 전 회장과 함께 두산그룹의 지분을 모두 청산하고 크리에이터의 길을 걷고 있다.박 전 부사장의 SNS에는 다양한 유명인이 등장한다. 배우 이제훈, 래퍼 그레이, 로꼬, 그루비룸, 미란이, 비비, 창모, 아이돌 샤이니 민호 등이 박 전 부사장의 SNS에 흔적을 남긴 스타들이다. 블랙핑크, 송중기, 박보검 등도 다녀갔다.가장 최근에는 지난 3월 이제훈과 콜래보레이션(협업)한 콘텐츠 개발 소식을 알렸다. 박 전 부사장은 “하로킨(HAROKIN)이라는 스토리텔링 집단과 함께 새로운 콘텐츠 개발에 나선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이제훈과 함께 찍은 사진을 게재했다.(사진=함연지 유튜브 ‘햄연지’ 캡처)배우라는 직업을 택한 오뚜기 3세 함연지는 가장 활발하게 대중과 소통하는 재벌 중 하나다. 인스타그램은 물론 유튜브 채널 ‘햄연지’를 개설해 자신의 일상을 자주 공유하고 있다.함연지는 가족사진도 거리낌 없이 공개한다. 가족들이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모습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함연지의 남편은 ‘햄연지’에도 자주 등장한다. 지난 2020년 어버이날에는 아버지인 함영준 오뚜기 회장을 출연시켜 화제가 되기도 했다.최근에는 뉴욕으로 이사해 뉴욕 생활을 영상으로 담아 전하고 있다. 남편이 뉴욕대학원 전액 장학생으로 진학하게 되면서다. 한편으로는 오뚜기의 신제품 홍보에도 나서면서 회사에도 도움을 준다. 이해욱 대림산업 회장의 동생 이해창 켐텍 대표의 장녀 이주영 역시 SNS 활동이 활발한 재벌가다. 2000년생인 그녀는 현재 미국 조지타운대에서 국제경영학과 마케팅을 전공하고 있다고 알려졌는데, 호화로운 생활을 유튜브 채널로 공개해 인기를 얻고 있다.‘쥴스 다이어리 julesjylee’라는 이주영의 채널은 현재 4만명이 넘는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다. 패션과 뷰티에 대한 관심사를 영상에 담아 공개하고, 해외여행과 미국 유학 생활을 공유하면서 일상을 자연스럽게 알리고 있다. 10만명이 넘는 인스타그램 팔로어를 보유한 이주영은 환경보호나 소외계층 돕기에 힘쓰는 중소 브랜드 소개에도 열심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난민, 생리 빈곤 등 다양한 사회 문제를 환기시키고 있다.(사진=이주영 인스타그램)언론 노출을 극도로 꺼리는 삼성가이지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못 말리는 것이 막내 이원주 양의 ‘인싸력’이다. 지금은 동영상이 모두 삭제됐지만 한 유튜버 채널에서 절친인 홍정욱 올가니카 회장의 차녀 홍지수 양과 자연스러운 모습이 담긴 영상이 노출됐다.이 양이 직접 운영하는 채널은 비공개지만 학교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노는 모습을 담은 영상은 다른 채널을 통해 여러 차례 공개됐다. 수수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친구들과 함께 간식을 먹거나 춤을 추는 등 10대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네티즌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됐다.
    김영환 기자 2022.12.08
    [이데일리 김영환 기자] 최근 JTBC 금토일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이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일반 대중이 스타만큼이나 열광하는 존재가 재벌이다. 시대가 지나도 재벌가의 이야기는 다양하게 변주되고 뭇사람들의 시선을 이끈다. 다만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재벌들은 다소 작위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호화로운 저택에서 명품 양복을 차려입고 값비싼 와인을 마신다. 키우는 반려동물에게는 일반인들은 생각도 못할 만큼 비싼 먹이를 준다.이런 거리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줄이는 재벌들이 있다. 특히 창업주의 3~4세들은 자신들을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는 MZ세대(밀레니얼+Z세대)들로,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을 보여준다.박서원 전 오리콤 부사장(왼쪽)과 배우 이제훈(사진=박서원 인스타그램)박용만 두산그룹 9대 회장의 장남인 박서원 전 오리콤 부사장은 영민하게 SNS를 활용하는 인플루언서다. 오리콤 부사장과 두산매거진 대표이사 등을 거쳐 독자 노선을 선언하고 묵묵하게 자신의 길을 걷는 경영인이다. 박 전 부사장은 SNS에 자신을 ‘예술가’로 소개하고 있다.박 전 부사장은 괴짜 재벌 4세로 주목받았다. 지난 2011년 펴낸 책 제목도 ‘생각하는 미친놈(세상을 유혹하는 크리에이터 박서원의 미친 발상법과 독한 실행력)’이다. 박 전 부사장은 단국대를 중퇴한 후 도망치듯 2000년 뉴욕으로 떠났다. 대학생 시절 전공인 경영학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과를 6번이나 바꿀 만큼 자신의 길을 모색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그러나 진로를 디자인으로 정한 뒤 뉴욕 스쿨오브비주얼아트를 졸업하고, 한국인 최초로 국제 5대 광고제를 석권하면서 유망한 크리에이티브디렉터로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박 전 부사장은 재벌가의 정석이라 할 수 있는 경영 수업을 마다하고 ‘광고인 박서원’의 길을 걸었다. 최근 부친인 박용만 전 회장과 함께 두산그룹의 지분을 모두 청산하고 크리에이터의 길을 걷고 있다.박 전 부사장의 SNS에는 다양한 유명인이 등장한다. 배우 이제훈, 래퍼 그레이, 로꼬, 그루비룸, 미란이, 비비, 창모, 아이돌 샤이니 민호 등이 박 전 부사장의 SNS에 흔적을 남긴 스타들이다. 블랙핑크, 송중기, 박보검 등도 다녀갔다.가장 최근에는 지난 3월 이제훈과 콜래보레이션(협업)한 콘텐츠 개발 소식을 알렸다. 박 전 부사장은 “하로킨(HAROKIN)이라는 스토리텔링 집단과 함께 새로운 콘텐츠 개발에 나선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이제훈과 함께 찍은 사진을 게재했다.(사진=함연지 유튜브 ‘햄연지’ 캡처)배우라는 직업을 택한 오뚜기 3세 함연지는 가장 활발하게 대중과 소통하는 재벌 중 하나다. 인스타그램은 물론 유튜브 채널 ‘햄연지’를 개설해 자신의 일상을 자주 공유하고 있다.함연지는 가족사진도 거리낌 없이 공개한다. 가족들이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모습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함연지의 남편은 ‘햄연지’에도 자주 등장한다. 지난 2020년 어버이날에는 아버지인 함영준 오뚜기 회장을 출연시켜 화제가 되기도 했다.최근에는 뉴욕으로 이사해 뉴욕 생활을 영상으로 담아 전하고 있다. 남편이 뉴욕대학원 전액 장학생으로 진학하게 되면서다. 한편으로는 오뚜기의 신제품 홍보에도 나서면서 회사에도 도움을 준다. 이해욱 대림산업 회장의 동생 이해창 켐텍 대표의 장녀 이주영 역시 SNS 활동이 활발한 재벌가다. 2000년생인 그녀는 현재 미국 조지타운대에서 국제경영학과 마케팅을 전공하고 있다고 알려졌는데, 호화로운 생활을 유튜브 채널로 공개해 인기를 얻고 있다.‘쥴스 다이어리 julesjylee’라는 이주영의 채널은 현재 4만명이 넘는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다. 패션과 뷰티에 대한 관심사를 영상에 담아 공개하고, 해외여행과 미국 유학 생활을 공유하면서 일상을 자연스럽게 알리고 있다. 10만명이 넘는 인스타그램 팔로어를 보유한 이주영은 환경보호나 소외계층 돕기에 힘쓰는 중소 브랜드 소개에도 열심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난민, 생리 빈곤 등 다양한 사회 문제를 환기시키고 있다.(사진=이주영 인스타그램)언론 노출을 극도로 꺼리는 삼성가이지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못 말리는 것이 막내 이원주 양의 ‘인싸력’이다. 지금은 동영상이 모두 삭제됐지만 한 유튜버 채널에서 절친인 홍정욱 올가니카 회장의 차녀 홍지수 양과 자연스러운 모습이 담긴 영상이 노출됐다.이 양이 직접 운영하는 채널은 비공개지만 학교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노는 모습을 담은 영상은 다른 채널을 통해 여러 차례 공개됐다. 수수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친구들과 함께 간식을 먹거나 춤을 추는 등 10대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네티즌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됐다.
  • 사진작가 꿈을 이룬 재벌총수 박용만[오너의 취향]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사진기자를 꿈꾼 재벌가 자제고등학교 시절 언뜻 어울리지 않는 이런 꿈을 꿨던 이가 있다. 두산그룹 회장을 역임한 박용만(67) 벨스트리트파트너스 회장의 이야기다.박용만 전 두산그룹 회장. (사진=라이카코리아)박 회장은 재계에서 유명한 사진 마니아다. 고교 시절부터 사진에 관심을 보인 박 회장은 부친인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 회장의 반대로 사진기자의 꿈은 포기했지만 기업인이 된 후에도 사진에 대한 열정만은 잊지 않았다. 두산 입사 후에도 사진작가로의 전직을 고심했을 정도다. 박 회장은 여전히 서가에 사진집이 가득 차있고, 즐겨 보는 책도 사진집일 정도로 사진에 대한 열정이 가득하다. 기업인으로 바쁜 생활 속에서도 그는 틈틈이 사진을 찍었다. 평소에도 사진기를 들고 다니며 거리 풍경, 주변 사람 등 일상을 사진으로 남긴다. 사진작가 박용만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실력자로 평가받는다. 오래전부터 운영해온 인스타그램 계정은 사진작가 박용만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온라인 전시장에 가깝다.박 회장이 찍은 사진은 유명 가수의 앨범에 실리기도 했다. 가수 양희은은 1998년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의 앨범을 발매할 당시 박 회장에게 허락을 받고, 미리 본 적 있던 박 회장의 작품 사진을 앨범 재킷에 사용했다. 박용만 회장의 촬영 사진을 앨범 표지로 사용한 양희은 ‘1991’ 앨범.박 회장이 지난해 초 발간한 산문집 ‘그늘까지도 인생이니까’의 표지에도 독일 고급 카메라인 라이카를 들고 있는 모습을 담았다. 작가 소개란 중에도 “소통하는 대기업 CEO로 잘 알려져있지만 쉬는 날엔 혼자 골목골목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고 적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2013년 7월 박 회장이 회장으로 추대된 이후부터 사진공모전을 개최하고 있다. 경제활동을 하는 상공인들의 삶을 사진을 통해 담아낸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박 회장에게 사진은 이처럼 단순히 취미활동에 그치지 않고 세상과의 소통 수단이다. 박 회장은 오래전부터 ‘소통하는 재벌’로 주목받았다. 소통보다는 ‘은둔’이 더 잘 어울리는 보통의 재벌가와 달리 박 회장은 언론이나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적극적인 소통을 해왔다. 소셜미디어에 자신의 소소한 일상을 공개하거나, 사내 메신저 등을 통해 그룹 직원은 물론 일반 시민과 직접 소통하기도 했다. 2010년엔 한 방송에 직접 출연해 자신의 집을 공개하며 재벌 회장의 생생한 일상을 보여주는 파격 행보에 나서기도 했다. 두산그룹 회장을 맡을 당시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박 회장은 올해 초 자신과 자녀들이 보유하고 있던 두산 지분 전량을 매각하고 두산과 완전히 결별했다. 결별을 결정한 후 박 회장은 지난 3월 배우 류준열, 포토저널리스트 신웅재, 20세기 초현실주의 사진 거장 랄프 깁슨, 미국계 한국인인 ‘앰부쉬’ 패션 디자이너 윤 안, 버추얼 아티스트 웨이드와 함께 ‘오! 라이카(O! Leica) 2022’에 작품을 전시했다. 오랜 꿈이었던 ‘사진작가’ 박용만이 현실화 된 것이다.‘오! 라이카2022’에 전시된 박용만 회장 작품. (사진=라이카코리아)
    한광범 기자 2022.11.30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사진기자를 꿈꾼 재벌가 자제고등학교 시절 언뜻 어울리지 않는 이런 꿈을 꿨던 이가 있다. 두산그룹 회장을 역임한 박용만(67) 벨스트리트파트너스 회장의 이야기다.박용만 전 두산그룹 회장. (사진=라이카코리아)박 회장은 재계에서 유명한 사진 마니아다. 고교 시절부터 사진에 관심을 보인 박 회장은 부친인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 회장의 반대로 사진기자의 꿈은 포기했지만 기업인이 된 후에도 사진에 대한 열정만은 잊지 않았다. 두산 입사 후에도 사진작가로의 전직을 고심했을 정도다. 박 회장은 여전히 서가에 사진집이 가득 차있고, 즐겨 보는 책도 사진집일 정도로 사진에 대한 열정이 가득하다. 기업인으로 바쁜 생활 속에서도 그는 틈틈이 사진을 찍었다. 평소에도 사진기를 들고 다니며 거리 풍경, 주변 사람 등 일상을 사진으로 남긴다. 사진작가 박용만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실력자로 평가받는다. 오래전부터 운영해온 인스타그램 계정은 사진작가 박용만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온라인 전시장에 가깝다.박 회장이 찍은 사진은 유명 가수의 앨범에 실리기도 했다. 가수 양희은은 1998년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의 앨범을 발매할 당시 박 회장에게 허락을 받고, 미리 본 적 있던 박 회장의 작품 사진을 앨범 재킷에 사용했다. 박용만 회장의 촬영 사진을 앨범 표지로 사용한 양희은 ‘1991’ 앨범.박 회장이 지난해 초 발간한 산문집 ‘그늘까지도 인생이니까’의 표지에도 독일 고급 카메라인 라이카를 들고 있는 모습을 담았다. 작가 소개란 중에도 “소통하는 대기업 CEO로 잘 알려져있지만 쉬는 날엔 혼자 골목골목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고 적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2013년 7월 박 회장이 회장으로 추대된 이후부터 사진공모전을 개최하고 있다. 경제활동을 하는 상공인들의 삶을 사진을 통해 담아낸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박 회장에게 사진은 이처럼 단순히 취미활동에 그치지 않고 세상과의 소통 수단이다. 박 회장은 오래전부터 ‘소통하는 재벌’로 주목받았다. 소통보다는 ‘은둔’이 더 잘 어울리는 보통의 재벌가와 달리 박 회장은 언론이나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적극적인 소통을 해왔다. 소셜미디어에 자신의 소소한 일상을 공개하거나, 사내 메신저 등을 통해 그룹 직원은 물론 일반 시민과 직접 소통하기도 했다. 2010년엔 한 방송에 직접 출연해 자신의 집을 공개하며 재벌 회장의 생생한 일상을 보여주는 파격 행보에 나서기도 했다. 두산그룹 회장을 맡을 당시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박 회장은 올해 초 자신과 자녀들이 보유하고 있던 두산 지분 전량을 매각하고 두산과 완전히 결별했다. 결별을 결정한 후 박 회장은 지난 3월 배우 류준열, 포토저널리스트 신웅재, 20세기 초현실주의 사진 거장 랄프 깁슨, 미국계 한국인인 ‘앰부쉬’ 패션 디자이너 윤 안, 버추얼 아티스트 웨이드와 함께 ‘오! 라이카(O! Leica) 2022’에 작품을 전시했다. 오랜 꿈이었던 ‘사진작가’ 박용만이 현실화 된 것이다.‘오! 라이카2022’에 전시된 박용만 회장 작품. (사진=라이카코리아)
  • 느리게 구르는 구자열의 자전거[오너의 취향]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기업인 구자열(한국무역협회장·LS의장)의 자전거 페달은 빠르게 굴러 왔다. 쉬지 않고, 곧게 갔고, 그래서 앞에 있었다. 자전거께나 탄다는 ‘말벅지’도 그의 등을 보고 달리기가 일쑤다. ‘몬주익의 마라톤 영웅’ 황영조 선수의 이른바 ‘항복 선언’은 유명한 일화다. 신체 능력이라면 세계 으뜸가는 황 씨였지만 2010년께 구 회장을 따라 라이딩을 나섰다가 결국 두 손을 들었다고 한다.구자열 한국무역협회장 겸 LS의장(앞줄 오른쪽 헬멧을 든 이)이 지난 9월 지인과 라이딩을 떠나기 앞서 환히 웃고 있다. 맨 왼쪽 가수 김창완씨를 비롯한 일행도 싱글벙글이다. 앞줄 가운데 뒷모습은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사진=대한자전거연맹)“자전거 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자기부터 수십 년을 자전거로 출퇴근했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자택에서 경기 안양시 LS타워까지 어림잡아 하루 왕복 50km 이상이다. 날이 궂지 않으면 이걸 매일 했다. 맘잡고 달리면 서울에서 부산을 하루 만에 가는데, 평균 속력이 시간당 30km 안팎이다. 아마추어(20km대) 수준을 초월한 경지다. 2002년 독일 ‘트랜스알프스 산악자전거대회’에 참가해 7박8일 동안 650km를 완주한 것은 의지만으로 된 게 아니다.대한자전거연맹 회장 자리는 2009년부터 의지만으로 맡고 있다. 저변이 척박한 자전거 종목에서 구자열은 키다리 아저씨다. 경륜법의 흠을 고쳐 자전거 인재 육성에 물꼬를 틀도록 역할을 한 것이 컸다. BMX와 MTB 불모지 한국이었지만, 이제 국제대회에서 메달 소식이 들려온다.이런 그에게 자전거는 기업이었다. “자전거는 페달을 밟지 않으면 넘어진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목표를 잡고 전진해야 한다.” 경영 철학이었다. 구자열이 달리면 회사가 따라왔다. 그래서 빨리 갔고, 앞서 갔다. 지난 1월 LS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기까지, 올해 칠순의 라이더는 이렇게 앞만 보고 달려왔다.구자열 한국무역협회장 겸 LS의장이 지난 9월 일행과 유니폼을 입고 떠난 라이딩에서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뒷줄 오른쪽 네 번째 흰 팔토시를 한 구 회장이 브이(V)자를 그리고 있다. 뒷줄 왼쪽 여섯 번째는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사진=대한자전거연맹)자유인이 되고서 주법(走法)이 바뀌었다. 차종 로드바이크의 재질을 크롬에서 크로몰리로 바꾼 것이 시작이다. 쉽게 말하면 속도를 줄이고, 승차감을 끌어올린 것이다. 스포츠카에서 클래식 세단으로의 환승이랄까. 자연히 호흡도 달라졌다. 어지간하면 브레이크를 잡고, 풍경을 눈에 담고자 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결승선을 향해 전력으로 페달을 밟던 이전의 그에게서는 보지 못했던 모습이다.“오늘은 유니폼 입으셨네요?”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가장 큰 변화는 복장이다. 라이딩은 혼자 하는 운동이지만, 같이 하는 운동이기도 하다. 무리는 유니폼을 입고서 한몸이 된다. 유니폼은 룰이다. 한창때 구자열이 유니폼 입기를 피한 건 이런 이유에서다. 촌음을 다투는 일정을 소화하려면, 자기가 계획해서 운동하는 것이 편했다. 얼마든지 갈 수 있지만, 언제든지 그만 가는 경우도 불가피했다. 유니폼을 입고 이렇게 행동하면 룰을 깨야 하고, 이로써 나머지 일행의 호흡이 뒤틀린다. 이걸 경계하려고 유니폼을 꺼렸다. 몸이 가벼워지고서 이런 부담을 덜었다.자전거인 구자열의 종아리.(사진=대한자전거연맹)지난 9월 라이딩은 자유인 구자열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 여정이었다. 지인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2008~2011년)가 방한하자 오랜 친구 가수 김창완씨 등과 함께 만든 자리였다. 그날 일행은 같은 옷을 맞춰 입었다. 정처는 정해뒀지만, 무엇하랴. 목적지보다 중요한 것은 도착지였다. 강변 카페에 들러 수 시간 수다를 떨었고, 오가며 마주하는 생면부지와 구김 없이 인사했다. 주변에서는 그에게 “여유롭게 피는 들풀의 향이 난다”고 했다.페달을 천천히 밟으니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 늘고, 주변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자전거는 빨리 가는 데 필요한 수단이 아니었다. 자전거 그 자체였다. 느리게 가도 뭐라고 할 이 하나 없는데, 우리는 빨리 가려고 무던히 애가 단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기까지는 잘 몰랐던 것들이다. 어떤 스님의 말마따나 ‘멈추면 보이는 것들’이었다. 구자열의 페달은 느릿하게 굴러간다.
    전재욱 기자 2022.11.23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기업인 구자열(한국무역협회장·LS의장)의 자전거 페달은 빠르게 굴러 왔다. 쉬지 않고, 곧게 갔고, 그래서 앞에 있었다. 자전거께나 탄다는 ‘말벅지’도 그의 등을 보고 달리기가 일쑤다. ‘몬주익의 마라톤 영웅’ 황영조 선수의 이른바 ‘항복 선언’은 유명한 일화다. 신체 능력이라면 세계 으뜸가는 황 씨였지만 2010년께 구 회장을 따라 라이딩을 나섰다가 결국 두 손을 들었다고 한다.구자열 한국무역협회장 겸 LS의장(앞줄 오른쪽 헬멧을 든 이)이 지난 9월 지인과 라이딩을 떠나기 앞서 환히 웃고 있다. 맨 왼쪽 가수 김창완씨를 비롯한 일행도 싱글벙글이다. 앞줄 가운데 뒷모습은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사진=대한자전거연맹)“자전거 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자기부터 수십 년을 자전거로 출퇴근했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자택에서 경기 안양시 LS타워까지 어림잡아 하루 왕복 50km 이상이다. 날이 궂지 않으면 이걸 매일 했다. 맘잡고 달리면 서울에서 부산을 하루 만에 가는데, 평균 속력이 시간당 30km 안팎이다. 아마추어(20km대) 수준을 초월한 경지다. 2002년 독일 ‘트랜스알프스 산악자전거대회’에 참가해 7박8일 동안 650km를 완주한 것은 의지만으로 된 게 아니다.대한자전거연맹 회장 자리는 2009년부터 의지만으로 맡고 있다. 저변이 척박한 자전거 종목에서 구자열은 키다리 아저씨다. 경륜법의 흠을 고쳐 자전거 인재 육성에 물꼬를 틀도록 역할을 한 것이 컸다. BMX와 MTB 불모지 한국이었지만, 이제 국제대회에서 메달 소식이 들려온다.이런 그에게 자전거는 기업이었다. “자전거는 페달을 밟지 않으면 넘어진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목표를 잡고 전진해야 한다.” 경영 철학이었다. 구자열이 달리면 회사가 따라왔다. 그래서 빨리 갔고, 앞서 갔다. 지난 1월 LS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기까지, 올해 칠순의 라이더는 이렇게 앞만 보고 달려왔다.구자열 한국무역협회장 겸 LS의장이 지난 9월 일행과 유니폼을 입고 떠난 라이딩에서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뒷줄 오른쪽 네 번째 흰 팔토시를 한 구 회장이 브이(V)자를 그리고 있다. 뒷줄 왼쪽 여섯 번째는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사진=대한자전거연맹)자유인이 되고서 주법(走法)이 바뀌었다. 차종 로드바이크의 재질을 크롬에서 크로몰리로 바꾼 것이 시작이다. 쉽게 말하면 속도를 줄이고, 승차감을 끌어올린 것이다. 스포츠카에서 클래식 세단으로의 환승이랄까. 자연히 호흡도 달라졌다. 어지간하면 브레이크를 잡고, 풍경을 눈에 담고자 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결승선을 향해 전력으로 페달을 밟던 이전의 그에게서는 보지 못했던 모습이다.“오늘은 유니폼 입으셨네요?”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가장 큰 변화는 복장이다. 라이딩은 혼자 하는 운동이지만, 같이 하는 운동이기도 하다. 무리는 유니폼을 입고서 한몸이 된다. 유니폼은 룰이다. 한창때 구자열이 유니폼 입기를 피한 건 이런 이유에서다. 촌음을 다투는 일정을 소화하려면, 자기가 계획해서 운동하는 것이 편했다. 얼마든지 갈 수 있지만, 언제든지 그만 가는 경우도 불가피했다. 유니폼을 입고 이렇게 행동하면 룰을 깨야 하고, 이로써 나머지 일행의 호흡이 뒤틀린다. 이걸 경계하려고 유니폼을 꺼렸다. 몸이 가벼워지고서 이런 부담을 덜었다.자전거인 구자열의 종아리.(사진=대한자전거연맹)지난 9월 라이딩은 자유인 구자열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 여정이었다. 지인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2008~2011년)가 방한하자 오랜 친구 가수 김창완씨 등과 함께 만든 자리였다. 그날 일행은 같은 옷을 맞춰 입었다. 정처는 정해뒀지만, 무엇하랴. 목적지보다 중요한 것은 도착지였다. 강변 카페에 들러 수 시간 수다를 떨었고, 오가며 마주하는 생면부지와 구김 없이 인사했다. 주변에서는 그에게 “여유롭게 피는 들풀의 향이 난다”고 했다.페달을 천천히 밟으니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 늘고, 주변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자전거는 빨리 가는 데 필요한 수단이 아니었다. 자전거 그 자체였다. 느리게 가도 뭐라고 할 이 하나 없는데, 우리는 빨리 가려고 무던히 애가 단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기까지는 잘 몰랐던 것들이다. 어떤 스님의 말마따나 ‘멈추면 보이는 것들’이었다. 구자열의 페달은 느릿하게 굴러간다.
  • ‘音의 경영학’…예술의전당 종신회원 ‘1호’ 김승연[오너의 취향]
    [이데일리 김영환 기자] 지난 1988년 2월 예술의전당 시설 가운데 음악당과 서예관이 1차 개관했다. 음악당은 변변한 공연장이 없던 당시 한국에서 유일하게 콘서트 전문 공연장으로 설계돼 기대를 모았다. 개관과 동시에 국내외 연주자들과 합창단, 실내악단, 관현악단들이 참가한 개관 기념 음악제가 열렸다.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가운데)이 지난 2011년 교향악축제 첫날 공연이 시작되기 전 협력업체 대표이사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다.(사진=이데일리DB)이듬해 이 같은 음악제를 살려나가자는 의견이 모였다. 역시 한 달여간 국내 관현악단들의 공연이 음악당에서 연달아 개최됐고 공식적으로 이 음악회를 ‘제1회 교향악축제’로 작명했다.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됐고(最古), 가장 큰 규모인(最大) 오케스트라 페스티벌의 시작이었다.음악회는 지방의 악단들을 한 무대로 모아 서로 실력을 겨루거나 골고루 중앙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게 개최 취지였다. 재능있는 독주자들을 발굴해 관현악단과 협연 기회를 마련하거나, 한국 작곡가들의 창작 관현악 작품들을 초연하는 무대도 제공했다.지난 2022년 4월2일부터 24일까지 34회째를 맞아 공연을 성료했지만 위기가 없던 것도 아니었다. 지난 2000년에는 외환위기 여파로 기업들이 후원을 꺼리면서 아시아 최고·최대 교향악축제가 중단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교향악축제라는 이름 앞에 ‘한화와 함께하는’이라는 인연이 시작된 계기다. 클래식 공연에 대한 후원이 대부분 일회성이거나 단기 후원인 경우가 많은데 한화가 23년째 이어오고 있는 교향악과의 인연은 이례적이다. 그 배경에는 김승연 한화 회장이 있다.‘2021 교향악축제’ 공연 장면(사진=예술의전당)김 회장은 ‘예술의전당 종신회원 1호’로 추대됐다. 예술의전당이 지난 2009년 처음으로 도입한 종신회원제도에 후원활동 10년을 기록한 김 회장을 첫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후원 20년째인 지난 2019년에는 후원기념 명패를 제작해 음악당 로비 벽면에 설치하는 제막식도 치렀다.김 회장은 클래식 음악 전문가로 알려졌다. 지난 8월 별세한 배우자 서영민씨가 특히 클래식 애호가였다. 김 회장은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이 나오면 하던 일을 멈추고 심취하기도 한다는 전언이다. 음악이 갖는 하모니의 가치는 김 회장이 생각하고 있는 공존과 상생의 키워드 ‘함께 멀리’와도 맞닿아 있다. 지난 2011년 김 회장은 교향악축제에 협력사 임직원을 초대해 동반성장의 의미를 되새기기도 했다. 김 회장이 직접 제안했던 행사다. 때로는 과격한 언행으로 세간의 시선을 받기도 했지만 김 회장이 평생을 지켜온 ‘의리’와도 결이 유사하다.김 회장의 클래식에 대한 조예는 지난 2013년 ‘한화클래식’으로도 발전했다. 한화클래식은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을 초청해 한국 관객들에게 선보이는 장이다. 합창계의 거장이자 바흐 해석의 양대산맥으로 불리는 헬무트 릴링이 첫 주자로 한국을 찾아 수준 높은 클래식 공연을 선보였다.‘한화클래식’은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문호를 넓히는 한편,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레퍼토리 선정에 심혈을 기울였다.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상세한 해설도 곁들인 것이다. 지난 2020년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 공연을 한 것을 제외하고는 매년 직접 관객과의 만남을 추구하고 있다.지난 10월 한화그룹 창립 70주년을 맞은 김 회장의 기념사 이후 한화 측은 성료했던 ‘세계불꽃축제’와 함께 ‘한화클래식’을 사회공헌 철학의 실천 방안으로 제시했다. 김 회장은 기념사에서 “‘신용과 의리’의 한화정신이 있었기에 그룹의 성장이 가능했다”고 했다.지난 2019년 폐관한 금호아트홀 내부 전경(사진=금호아트홀)지난 2019년 폐관의 역사를 밟았지만 클래식 공연장 금호아트홀을 만든 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역시 클래식을 사랑하는 경영인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많은 클래식 연주자들이 거쳐 갔을 만큼 클래식 영재 지원에도 적극적이었다.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의 경우 아내가 플루트 연주자일 만큼 평소 음악계 인사와 교류가 있어 왔다. 정 부회장 역시 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깊고 피아노 실력도 상당하다는 평가다. 2011년부터는 연간 2차례에 걸쳐 ‘신세계 클래식 페스티벌’도 개최 중이다.이건산업 창업주인 박영주 회장도 ‘음악사랑’에서는 뒤지지 않는다. 올해로 33회를 맞는 ‘이건 음악회’는 기업이 주축이 돼 무료로 여는 클래식 공연 중 가장 오래된 음악회다. 지난 11일 롯데콘서트홀을 시작으로 △인천 아트센터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성료됐고 △부산 금정문화회관(16일) △통영 통영국제음악당(17일) 일정이 남았다.이건음악회가 2022년 첫 일정으로 스타트를 끊은 롯데콘서트홀은 롯데그룹이 2016년 롯데월드몰에 설치한 정통 클래식 공연장으로 예술의전당에 버금가는 클래식 공연 명소다.피아니스트 이혁.(사진=금호문화재단)재벌들의 후원 속에 클래식 인재들도 두각을 보이고 있다. 지난 13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2022 롱티보(Long-Thibaud) 국제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한 피아니스트 이혁은 두산연강재단 출신 장학생이다. 두산연강재단은 만 12세이던 2012년부터 이혁을 꾸준히 후원해왔다.두산연강재단은 두산그룹 초대회장인 ‘연강’ 박두병 회장의 호에서 따왔다. 박 회장의 이념 실천을 목표로 세워진 교육 및 문화재단으로 지난 1978년 10월 발족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김영환 기자 2022.11.16
    [이데일리 김영환 기자] 지난 1988년 2월 예술의전당 시설 가운데 음악당과 서예관이 1차 개관했다. 음악당은 변변한 공연장이 없던 당시 한국에서 유일하게 콘서트 전문 공연장으로 설계돼 기대를 모았다. 개관과 동시에 국내외 연주자들과 합창단, 실내악단, 관현악단들이 참가한 개관 기념 음악제가 열렸다.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가운데)이 지난 2011년 교향악축제 첫날 공연이 시작되기 전 협력업체 대표이사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다.(사진=이데일리DB)이듬해 이 같은 음악제를 살려나가자는 의견이 모였다. 역시 한 달여간 국내 관현악단들의 공연이 음악당에서 연달아 개최됐고 공식적으로 이 음악회를 ‘제1회 교향악축제’로 작명했다.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됐고(最古), 가장 큰 규모인(最大) 오케스트라 페스티벌의 시작이었다.음악회는 지방의 악단들을 한 무대로 모아 서로 실력을 겨루거나 골고루 중앙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게 개최 취지였다. 재능있는 독주자들을 발굴해 관현악단과 협연 기회를 마련하거나, 한국 작곡가들의 창작 관현악 작품들을 초연하는 무대도 제공했다.지난 2022년 4월2일부터 24일까지 34회째를 맞아 공연을 성료했지만 위기가 없던 것도 아니었다. 지난 2000년에는 외환위기 여파로 기업들이 후원을 꺼리면서 아시아 최고·최대 교향악축제가 중단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교향악축제라는 이름 앞에 ‘한화와 함께하는’이라는 인연이 시작된 계기다. 클래식 공연에 대한 후원이 대부분 일회성이거나 단기 후원인 경우가 많은데 한화가 23년째 이어오고 있는 교향악과의 인연은 이례적이다. 그 배경에는 김승연 한화 회장이 있다.‘2021 교향악축제’ 공연 장면(사진=예술의전당)김 회장은 ‘예술의전당 종신회원 1호’로 추대됐다. 예술의전당이 지난 2009년 처음으로 도입한 종신회원제도에 후원활동 10년을 기록한 김 회장을 첫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후원 20년째인 지난 2019년에는 후원기념 명패를 제작해 음악당 로비 벽면에 설치하는 제막식도 치렀다.김 회장은 클래식 음악 전문가로 알려졌다. 지난 8월 별세한 배우자 서영민씨가 특히 클래식 애호가였다. 김 회장은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이 나오면 하던 일을 멈추고 심취하기도 한다는 전언이다. 음악이 갖는 하모니의 가치는 김 회장이 생각하고 있는 공존과 상생의 키워드 ‘함께 멀리’와도 맞닿아 있다. 지난 2011년 김 회장은 교향악축제에 협력사 임직원을 초대해 동반성장의 의미를 되새기기도 했다. 김 회장이 직접 제안했던 행사다. 때로는 과격한 언행으로 세간의 시선을 받기도 했지만 김 회장이 평생을 지켜온 ‘의리’와도 결이 유사하다.김 회장의 클래식에 대한 조예는 지난 2013년 ‘한화클래식’으로도 발전했다. 한화클래식은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을 초청해 한국 관객들에게 선보이는 장이다. 합창계의 거장이자 바흐 해석의 양대산맥으로 불리는 헬무트 릴링이 첫 주자로 한국을 찾아 수준 높은 클래식 공연을 선보였다.‘한화클래식’은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문호를 넓히는 한편,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레퍼토리 선정에 심혈을 기울였다.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상세한 해설도 곁들인 것이다. 지난 2020년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 공연을 한 것을 제외하고는 매년 직접 관객과의 만남을 추구하고 있다.지난 10월 한화그룹 창립 70주년을 맞은 김 회장의 기념사 이후 한화 측은 성료했던 ‘세계불꽃축제’와 함께 ‘한화클래식’을 사회공헌 철학의 실천 방안으로 제시했다. 김 회장은 기념사에서 “‘신용과 의리’의 한화정신이 있었기에 그룹의 성장이 가능했다”고 했다.지난 2019년 폐관한 금호아트홀 내부 전경(사진=금호아트홀)지난 2019년 폐관의 역사를 밟았지만 클래식 공연장 금호아트홀을 만든 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역시 클래식을 사랑하는 경영인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많은 클래식 연주자들이 거쳐 갔을 만큼 클래식 영재 지원에도 적극적이었다.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의 경우 아내가 플루트 연주자일 만큼 평소 음악계 인사와 교류가 있어 왔다. 정 부회장 역시 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깊고 피아노 실력도 상당하다는 평가다. 2011년부터는 연간 2차례에 걸쳐 ‘신세계 클래식 페스티벌’도 개최 중이다.이건산업 창업주인 박영주 회장도 ‘음악사랑’에서는 뒤지지 않는다. 올해로 33회를 맞는 ‘이건 음악회’는 기업이 주축이 돼 무료로 여는 클래식 공연 중 가장 오래된 음악회다. 지난 11일 롯데콘서트홀을 시작으로 △인천 아트센터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성료됐고 △부산 금정문화회관(16일) △통영 통영국제음악당(17일) 일정이 남았다.이건음악회가 2022년 첫 일정으로 스타트를 끊은 롯데콘서트홀은 롯데그룹이 2016년 롯데월드몰에 설치한 정통 클래식 공연장으로 예술의전당에 버금가는 클래식 공연 명소다.피아니스트 이혁.(사진=금호문화재단)재벌들의 후원 속에 클래식 인재들도 두각을 보이고 있다. 지난 13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2022 롱티보(Long-Thibaud) 국제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한 피아니스트 이혁은 두산연강재단 출신 장학생이다. 두산연강재단은 만 12세이던 2012년부터 이혁을 꾸준히 후원해왔다.두산연강재단은 두산그룹 초대회장인 ‘연강’ 박두병 회장의 호에서 따왔다. 박 회장의 이념 실천을 목표로 세워진 교육 및 문화재단으로 지난 1978년 10월 발족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디제잉에 랩도 한다…개성 뽐내는 재벌가 MZ들[오너의 취향]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1988년 MBC 대학가요제에 가수 신해철을 중심으로 한 당시 5인조 그룹 ‘무한궤도’가 ‘그대에게’란 노래로 대상을 수상했다. 당시 명문대생 5명이 결합한 밴드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는데, 재벌가에서도 당시 멤버 중에 효성그룹의 차남 조현문씨와 쌍용그룹 김성곤 창업자의 외손주인 조현찬씨가 참여해 큰 화제를 모았다. 재벌가 자제의 공개적 활동이 많지 않았던 시기, 무대에서 직접 악기를 연주한다는 점에서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그리고 10여 년 후인 1999년엔 이랜드그룹의 장남 윤충근(활동명 윤태준)씨가 아이돌그룹 ‘이글파이브’ 멤버로 데뷔하기도 했다. 활동 당시엔 잘 알려지지 않았다가 이후 윤씨가 회사 경영에 참여하며 뒤늦게 재벌가 자제의 댄스그룹 활동이었다는 점에서 화제가 됐다. 공개 활동이 1년 여로 짧았던 이들과 달리 최근 MZ(밀레니얼+Z)세대 재계 2~3세는 자신의 끼를 드러내는 것에 보다 적극적이다. 과거 재벌가에서 가까이하지 않던 영역에서도 거침없는 행보를 보였다.◇이해진子, ‘6억뷰’ 블핑 ‘러브식 걸스’ 뮤비 출연네이버 창업주인 이해진 글로벌투자책임자(GIO)의 아들 ‘로렌’ 이승주씨는 가수와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다. 클럽 DJ와 모델로도 활동하는 등 ‘은둔의 경영자’라고 불릴 정도로 조용한 성격인 이 GIO와 달리 쾌활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성격뿐만 아니라 외형 또한 문신에 피어싱 등 과거 재계 자제들에선 보기 어려운 개성적인 모습이다.네이버 창업자 이해진 글로벌투자책임자의 아들인 가수이자 프로듀서 ‘로렌’ 이승주.(사진=로렌 SNS)이씨는 과거 해외에서 유학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귀국 후엔 꾸준히 음악 쪽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2017년엔 YG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들과 교류하면서 앨범에 참여하며 인지도를 쌓았다. 지드래곤 노래에 공동 작곡가로 이름을 올리거나 블랙핑크 앨범에 작사가로 참여하기도 했다.블랙핑크가 2020년 10월 발매해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끈 노래 ‘러브식 걸스’(Lovesick Girls)의 뮤직비디오에 직접 ‘남자친구’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뮤직비디오 조회수는 6억3000만회를 넘긴 상태다. 2020년엔 직접 앨범을 발매하며 가수로 데뷔했다.네이버가 이미 전문경영진 체제를 구축하고 있고 이 GIO 역시 과거부터 꾸준히 두 자녀들을 경영에 관여시키지 않을 것임을 천명해왔다. 이 때문에 이씨가 경영일선으로 복귀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지적이다. 실제 이 GIO는 지배력 강화를 위해 지분을 늘리는 대기업 총수일가와 달리 지분을 꾸준히 줄이고 있다.◇정몽준 차남, 힙합동아리 멤버로 무대 서기도현대중공업그룹 대주주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차남 정예선씨는 대학에서 힙합동아리 활동을 했으며, 철학을 전공한 정씨는 과거 “꿈은 랩 하는 철학과 교수”라고 밝히기도 했다. 정씨는 고교생 시절이던 2014년 지방선거 당시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남긴 글로 정치적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대학 입학 후 재벌가 자제임을 숨기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네임드 정몽주니어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차남 정예선씨가 출연했던 대학 힙합동아리 뮤직비디오 속 한 장면. (사진=유튜브 갈무리)여전히 해당 동아리 유튜브 채널에선 정씨가 참여한 뮤직비디오와 공연 영상을 확인할 수 있다. 영상에서 정씨는 “철학자와 래퍼 둘 다가 내 정체성” 등의 가사를 랩으로 내뱉으며 스웩을 뽐낸다.고(故)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차녀 조현민 한진 미래성장전략·마케팅 총괄사장은 재계의 유명한 ‘게임마니아’다. 2000년대 게임업계를 휩쓸었던 스타크래프트가 조 사장이 가장 애착이 큰 게임이다.2000년대 후반 스타크래프트의 인기가 시들면서 공식 스폰서를 맡겠다는 기업이 없자 2010년엔 대한항공이 두 차례, 2011년엔 진에어가 한 차례 타이틀 스폰서를 맡게 했다. 특히 2010년 프로리그 당시엔 대한항공 격납고에서 결승전이 개최되도록 하며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 부흥에 노력하기도 했다. 2011년엔 진에어 그린윙스라는 게임단의 네이밍 스폰서로 참여해 코로나19에 따른 항공산업 불황이 닥친 2020년까지 게임단을 운영했다.
    한광범 기자 2022.11.08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1988년 MBC 대학가요제에 가수 신해철을 중심으로 한 당시 5인조 그룹 ‘무한궤도’가 ‘그대에게’란 노래로 대상을 수상했다. 당시 명문대생 5명이 결합한 밴드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는데, 재벌가에서도 당시 멤버 중에 효성그룹의 차남 조현문씨와 쌍용그룹 김성곤 창업자의 외손주인 조현찬씨가 참여해 큰 화제를 모았다. 재벌가 자제의 공개적 활동이 많지 않았던 시기, 무대에서 직접 악기를 연주한다는 점에서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그리고 10여 년 후인 1999년엔 이랜드그룹의 장남 윤충근(활동명 윤태준)씨가 아이돌그룹 ‘이글파이브’ 멤버로 데뷔하기도 했다. 활동 당시엔 잘 알려지지 않았다가 이후 윤씨가 회사 경영에 참여하며 뒤늦게 재벌가 자제의 댄스그룹 활동이었다는 점에서 화제가 됐다. 공개 활동이 1년 여로 짧았던 이들과 달리 최근 MZ(밀레니얼+Z)세대 재계 2~3세는 자신의 끼를 드러내는 것에 보다 적극적이다. 과거 재벌가에서 가까이하지 않던 영역에서도 거침없는 행보를 보였다.◇이해진子, ‘6억뷰’ 블핑 ‘러브식 걸스’ 뮤비 출연네이버 창업주인 이해진 글로벌투자책임자(GIO)의 아들 ‘로렌’ 이승주씨는 가수와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다. 클럽 DJ와 모델로도 활동하는 등 ‘은둔의 경영자’라고 불릴 정도로 조용한 성격인 이 GIO와 달리 쾌활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성격뿐만 아니라 외형 또한 문신에 피어싱 등 과거 재계 자제들에선 보기 어려운 개성적인 모습이다.네이버 창업자 이해진 글로벌투자책임자의 아들인 가수이자 프로듀서 ‘로렌’ 이승주.(사진=로렌 SNS)이씨는 과거 해외에서 유학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귀국 후엔 꾸준히 음악 쪽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2017년엔 YG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들과 교류하면서 앨범에 참여하며 인지도를 쌓았다. 지드래곤 노래에 공동 작곡가로 이름을 올리거나 블랙핑크 앨범에 작사가로 참여하기도 했다.블랙핑크가 2020년 10월 발매해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끈 노래 ‘러브식 걸스’(Lovesick Girls)의 뮤직비디오에 직접 ‘남자친구’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뮤직비디오 조회수는 6억3000만회를 넘긴 상태다. 2020년엔 직접 앨범을 발매하며 가수로 데뷔했다.네이버가 이미 전문경영진 체제를 구축하고 있고 이 GIO 역시 과거부터 꾸준히 두 자녀들을 경영에 관여시키지 않을 것임을 천명해왔다. 이 때문에 이씨가 경영일선으로 복귀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지적이다. 실제 이 GIO는 지배력 강화를 위해 지분을 늘리는 대기업 총수일가와 달리 지분을 꾸준히 줄이고 있다.◇정몽준 차남, 힙합동아리 멤버로 무대 서기도현대중공업그룹 대주주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차남 정예선씨는 대학에서 힙합동아리 활동을 했으며, 철학을 전공한 정씨는 과거 “꿈은 랩 하는 철학과 교수”라고 밝히기도 했다. 정씨는 고교생 시절이던 2014년 지방선거 당시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남긴 글로 정치적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대학 입학 후 재벌가 자제임을 숨기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네임드 정몽주니어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차남 정예선씨가 출연했던 대학 힙합동아리 뮤직비디오 속 한 장면. (사진=유튜브 갈무리)여전히 해당 동아리 유튜브 채널에선 정씨가 참여한 뮤직비디오와 공연 영상을 확인할 수 있다. 영상에서 정씨는 “철학자와 래퍼 둘 다가 내 정체성” 등의 가사를 랩으로 내뱉으며 스웩을 뽐낸다.고(故)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차녀 조현민 한진 미래성장전략·마케팅 총괄사장은 재계의 유명한 ‘게임마니아’다. 2000년대 게임업계를 휩쓸었던 스타크래프트가 조 사장이 가장 애착이 큰 게임이다.2000년대 후반 스타크래프트의 인기가 시들면서 공식 스폰서를 맡겠다는 기업이 없자 2010년엔 대한항공이 두 차례, 2011년엔 진에어가 한 차례 타이틀 스폰서를 맡게 했다. 특히 2010년 프로리그 당시엔 대한항공 격납고에서 결승전이 개최되도록 하며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 부흥에 노력하기도 했다. 2011년엔 진에어 그린윙스라는 게임단의 네이밍 스폰서로 참여해 코로나19에 따른 항공산업 불황이 닥친 2020년까지 게임단을 운영했다.
  • 韓아이스하키 영원한 골키퍼 정몽원 HL회장[오너의 취향]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1996년 7월 방영한 문화방송 드라마 ‘아이싱’은 모험에 가까운 작품이었다. 드라마 소재로 등장한 아이스하키가 시청률을 끌어올지, 방송가는 반신반의했다. 당시 변변찮았던 국내 아이스하키 저변을 보면 그럴 만도 했다. 아랑곳하지 않은 문화방송은 당대 청춘스타 장동건, 유태웅, 이종원, 이승연을 캐스팅하고 총력을 쏟았다. 1994년 종영한 스포츠 드라마 ‘마지막 승부’의 재림을 기대하면서였다.정몽원(오른쪽) 대한아이스하키협회장이 2017년 4월 한국 아이스하키 대표팀이 우크라이나 키예프의 팰리스 오브 스포츠 아이스링크에서 열린 2017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 남자 세계선수권 디비전 1 그룹 A 대회 최종 5차전에서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승리하자 백지선 감독을 뜨겁게 껴안고 있다.(사진=연합뉴스)누구보다 드라마 ‘아이싱’의 성공을 바란 이는, 아마도 정몽원 HL그룹 회장이었을 테다. 마지막 승부로 농구 붐이 일었던 것처럼 아이싱으로 아이스하키 열풍이 일기를 바랐을 것이다. 30년 가까이 아이스하키 발전에 천착해온 그의 인생사를 보면 심정을 읽을 수 있다.한라그룹(올해 8월 HL그룹으로 사명 변경)은 1994년 12월 계열사 만도기계에 달린 위니아 아이스하키팀(만도 위니아)을 창단한다. 실업팀으로서는 쌍방울그룹 계열 석탑건설에 이은 국내 두 번째였다. 고려대를 졸업한 정 회장은 학창 시절부터 아이스하키 경기를 즐겨온 열성 팬이었다. 그해 8월 창단 선언에서 정 회장(당시는 부회장)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의 역할 일환으로 동계스포츠 균형발전을 위해 창단을 결정한 것”이라고 밝혔다.구단주 정몽원의 전폭적인 지지는 성적으로 말했다. 만도 위니아는 창단 원년 출전한 1995년 KBS배 아이스하키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95~1996, 1996~1997 한국아이스하키리그전에서 정규리그 1위에 만도 위니아가 이름을 올렸다. 한라그룹은 목동 아이스하키 경기장 주변에 선수단 기숙사를 마련하고 훈련에 전념하도록 지원했다. 만도 위니아가 정규 리그에 이어 챔피언결정전까지 1위를 차지한 건 1997~1998년 리그였다. 구단은 잔치 분위기였지만 구단주는 초상집 분위기였다.구단주 정몽원이 얼마나 아이스하키에 진심인지는 여기서 드러난다. 1997년 외환위기 여파로 한라그룹은 만도기계를 포함한 주요 계열사를 매각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한라그룹은 대기업집단에서도 해제될 만큼 사세가 위축했다. 팀을 상징하는 위니아의 에어컨 사업부가 팔린 것도 이즈음이었다. 그럼에도 만도 위니아는 해체하지 않았다. 팀 명이 만도 위니아에서 한라 위니아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원조 아이스하키실업팀 석탑건설을 비롯한 여타 실업팀이 차례로 해체한 것과 대조된다.이후로 한라 위니아를 한국에서 꺾을 팀은 없었다. 모든 실업팀이 해체한 터에 별수가 없었다. 구단주 정몽원은 2004년 팀을 경기 안양 연고의 안양 한라로 바꾸고 아시아리그에 참가를 결정한다. 우리처럼 고사 위기에 처한 일본 아이스하키팀과 연대해 새 리그를 꾸리기로 한 것이다. 당시 결정이 아니었다면 어렵게 닦은 아이스하키 저변도 먼지가 됐을지 모른다. 안양 한라는 2004~2005년부터 코로나19로 시즌이 중단된 2019~2020년 시즌까지 6차례 리그에서 우승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그러는 새 한라그룹은 되팔았던 만도 등 주력 계열사를 되사들이면서 그룹 재건에 성공한다.정몽원(왼쪽) 한라그룹 회장이 지난 5월 핀란드 탐페레에서 열린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 2020년 명예의 전당 입회식에 참석해 뤼크 타르디프 IIHF 회장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코로나 19로 행사가 미뤄져 2년 만에 열렸다.(사진=한라그룹)그의 공을 논하는 데에 평창올림픽은 빠지지 않는다. 아이스하키 남녀 대표팀이 2018년 평창올림픽에 출전한 것은 대한아이스하키협회장(2013~2021년)으로서 정 회장 역할이 컸다.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이 2020년 명예의 전당에 한국 아이스하키인으로는 처음으로 구단주 정몽원을 헌액한 것을 보면 그간의 발자취에 대한 평가를 가늠할 수 있다.여전히 아이스하키는 국내에서 비주류 스포츠다. 일류를 지향하는 기업인이 비주류를 지원하는 이유는 뭘까. 아이스하키팀 운영 비용이면 인기 있는 농구나 배구 구단을 운영할 수도 있다. “아이스하키는 동계 종목 중 유일한 팀 스포츠다.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다 같이 잘해야 한다는 게 기업(경영)과 굉장히 비슷하다.” (매일경제 인터뷰) 만도 위니아의 후신 HL 안양은 올해 2년 만에 개막한 아시아리그에서 1위(25일 현재)를 달리고 있다.
    전재욱 기자 2022.10.26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1996년 7월 방영한 문화방송 드라마 ‘아이싱’은 모험에 가까운 작품이었다. 드라마 소재로 등장한 아이스하키가 시청률을 끌어올지, 방송가는 반신반의했다. 당시 변변찮았던 국내 아이스하키 저변을 보면 그럴 만도 했다. 아랑곳하지 않은 문화방송은 당대 청춘스타 장동건, 유태웅, 이종원, 이승연을 캐스팅하고 총력을 쏟았다. 1994년 종영한 스포츠 드라마 ‘마지막 승부’의 재림을 기대하면서였다.정몽원(오른쪽) 대한아이스하키협회장이 2017년 4월 한국 아이스하키 대표팀이 우크라이나 키예프의 팰리스 오브 스포츠 아이스링크에서 열린 2017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 남자 세계선수권 디비전 1 그룹 A 대회 최종 5차전에서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승리하자 백지선 감독을 뜨겁게 껴안고 있다.(사진=연합뉴스)누구보다 드라마 ‘아이싱’의 성공을 바란 이는, 아마도 정몽원 HL그룹 회장이었을 테다. 마지막 승부로 농구 붐이 일었던 것처럼 아이싱으로 아이스하키 열풍이 일기를 바랐을 것이다. 30년 가까이 아이스하키 발전에 천착해온 그의 인생사를 보면 심정을 읽을 수 있다.한라그룹(올해 8월 HL그룹으로 사명 변경)은 1994년 12월 계열사 만도기계에 달린 위니아 아이스하키팀(만도 위니아)을 창단한다. 실업팀으로서는 쌍방울그룹 계열 석탑건설에 이은 국내 두 번째였다. 고려대를 졸업한 정 회장은 학창 시절부터 아이스하키 경기를 즐겨온 열성 팬이었다. 그해 8월 창단 선언에서 정 회장(당시는 부회장)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의 역할 일환으로 동계스포츠 균형발전을 위해 창단을 결정한 것”이라고 밝혔다.구단주 정몽원의 전폭적인 지지는 성적으로 말했다. 만도 위니아는 창단 원년 출전한 1995년 KBS배 아이스하키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95~1996, 1996~1997 한국아이스하키리그전에서 정규리그 1위에 만도 위니아가 이름을 올렸다. 한라그룹은 목동 아이스하키 경기장 주변에 선수단 기숙사를 마련하고 훈련에 전념하도록 지원했다. 만도 위니아가 정규 리그에 이어 챔피언결정전까지 1위를 차지한 건 1997~1998년 리그였다. 구단은 잔치 분위기였지만 구단주는 초상집 분위기였다.구단주 정몽원이 얼마나 아이스하키에 진심인지는 여기서 드러난다. 1997년 외환위기 여파로 한라그룹은 만도기계를 포함한 주요 계열사를 매각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한라그룹은 대기업집단에서도 해제될 만큼 사세가 위축했다. 팀을 상징하는 위니아의 에어컨 사업부가 팔린 것도 이즈음이었다. 그럼에도 만도 위니아는 해체하지 않았다. 팀 명이 만도 위니아에서 한라 위니아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원조 아이스하키실업팀 석탑건설을 비롯한 여타 실업팀이 차례로 해체한 것과 대조된다.이후로 한라 위니아를 한국에서 꺾을 팀은 없었다. 모든 실업팀이 해체한 터에 별수가 없었다. 구단주 정몽원은 2004년 팀을 경기 안양 연고의 안양 한라로 바꾸고 아시아리그에 참가를 결정한다. 우리처럼 고사 위기에 처한 일본 아이스하키팀과 연대해 새 리그를 꾸리기로 한 것이다. 당시 결정이 아니었다면 어렵게 닦은 아이스하키 저변도 먼지가 됐을지 모른다. 안양 한라는 2004~2005년부터 코로나19로 시즌이 중단된 2019~2020년 시즌까지 6차례 리그에서 우승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그러는 새 한라그룹은 되팔았던 만도 등 주력 계열사를 되사들이면서 그룹 재건에 성공한다.정몽원(왼쪽) 한라그룹 회장이 지난 5월 핀란드 탐페레에서 열린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 2020년 명예의 전당 입회식에 참석해 뤼크 타르디프 IIHF 회장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코로나 19로 행사가 미뤄져 2년 만에 열렸다.(사진=한라그룹)그의 공을 논하는 데에 평창올림픽은 빠지지 않는다. 아이스하키 남녀 대표팀이 2018년 평창올림픽에 출전한 것은 대한아이스하키협회장(2013~2021년)으로서 정 회장 역할이 컸다.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이 2020년 명예의 전당에 한국 아이스하키인으로는 처음으로 구단주 정몽원을 헌액한 것을 보면 그간의 발자취에 대한 평가를 가늠할 수 있다.여전히 아이스하키는 국내에서 비주류 스포츠다. 일류를 지향하는 기업인이 비주류를 지원하는 이유는 뭘까. 아이스하키팀 운영 비용이면 인기 있는 농구나 배구 구단을 운영할 수도 있다. “아이스하키는 동계 종목 중 유일한 팀 스포츠다.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다 같이 잘해야 한다는 게 기업(경영)과 굉장히 비슷하다.” (매일경제 인터뷰) 만도 위니아의 후신 HL 안양은 올해 2년 만에 개막한 아시아리그에서 1위(25일 현재)를 달리고 있다.
  • “봉황이 아니라 닭” 태몽마저 바꾸는 윤홍근의 ‘닭사랑’[오너의 취향]
    [이데일리 김영환 기자] 윤홍근 제너시스 BBQ 회장은 닭에 살고 닭에 죽는다. 주변이 온통 닭으로 둘러싸여 있다. 태몽으로 ‘닭’이 나왔는데 ‘봉황’이라 허세 부리는 경우는 있어도 ‘봉황’이 나왔는데 ‘닭’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을까. 있다. 윤 회장이다.일화는 제너시스 BBQ 홈페이지에도 소개해뒀다. ‘춤추는 봉황이 하늘에서 내려와 품에 안겼다는 어머니의 꿈. 하지만 그 봉황은 닭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니었을까?’라고 윤 회장은 적었다. “나의 태몽은 ‘춤추는 닭’이며 ‘닭은 내 운명’”이라고 할 만큼 윤 회장은 닭에 진심이다.지난달 1일 창사 27주년을 맞아 윤홍근 제너시스 BBQ 회장이 창립기념사를 하고 있다. 윤 회장이 입은 유니폼에 닭 무늬가 수놓아져 있다.(사진=BBQ)패션철학조차도 ‘닭’이다. 본인부터가 닭을 모티브로 한 디자인의 제품을 즐겨입는다. 닭무늬 넥타이를 차고 넥타이핀도 닭의 형상을 하고 있다. 닭이 아로새겨진 모자를 쓰거나 주위에 선물하기도 한다.유니폼은 말해 무엇할까. 제너시스 BBQ 직원들은 회사에서 닭이 수놓아진 유니폼을 입고 근무한다. 지난 2017년 프로게임단 ‘ESC 셰인’을 후원해 ‘BBQ 올리버스’로 활동 때에도 게임단의 유니폼에는 닭이 빠지지 않았다.전 세계에서 긁어 모은 닭 모형만도 5000점이 넘어간다. 한 유튜브 채널에서 공개됐던 윤 회장 집무실은 온통 닭 모형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나무, 도자기, 유리, 금에 이르기까지 재질도 다양하고 크기도 천차만별이다. 중국, 일본 등 아시아에서부터 미국, 유럽 등 전 세계에서 건너온 각종 진귀한 닭 모형은 수 억원을 호가하는 작품도 있다. 전 세계에서 닭 모형을 수집하는 것은 반대로 전 세계에 BBQ를 전파하고자 하는 윤 회장의 의지가 담긴 일이다.윤홍근 제너시스 BBQ 회장 집무실. 화려한 닭 모형이 집무실을 가득 채우고 있다.(사진=네고왕 캡처)윤 회장과 닭과의 인연은 30여 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4년 미원에 입사한 윤 회장은 1994년 미원이 인수한 닭고기 업체 ‘천호마니커’의 영업부장직을 맡으며 닭 사업의 가능성을 봤다.윤 회장은 자신에게 ‘기업’의 가치를 알려준 사람으로 아버지를 꼽는다. 아버지에게 책가방과 운동화를 선물 받은 어린 윤 회장이 호기심에서 제품을 만든 사람을 궁금해하자 아버지가 ‘기업’이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윤 회장은 기업가로서 막연한 꿈을 키웠다.이미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전국에 치킨집이 많던 때였다. 윤 회장은 어느 날 담배 연기가 가득한 통닭집에서 모자가 통닭을 먹는 모습을 보여 불현듯 창업을 결심했다고 한다. 호프집으로서의 치킨집이 아닌, 어린이와 여성을 타깃으로 삼는 깨끗한 치킨집을 떠올렸다.확신에 찬 윤 회장은 1995년 9월 집까지 전세에서 월세로 옮기면서 자본금 5억원으로 BBQ를 설립했다. 윤 회장이 “치킨을 파는 게 아니라 브랜드와 경영 노하우를 판다”고 버릇처럼 말해온 것처럼 윤 회장이 생각한 ‘어린이·여성을 위한 치킨’은 시장에서 가능성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윤 회장이 설립한 ‘치킨대학’은 혁혁한 공을 세웠다. 치킨대학은 지난 2000년 경기도 이천시에 제네시스 BBQ가 설립한 연구개발(R&D)센터 겸 치킨 외식 사업가 양성 교육시설이다. 제너시스BBQ 치킨대학 전경.(사진=BBQ)윤 회장은 창업 때부터 세계적 햄버거 프랜차이즈 ‘맥도널드’에 대한 경쟁심을 드러냈다. 과거 인터뷰에서 ‘빅맥지수’에 필적할 ‘BBQ지수’를 언급하기도 했다. 맥도널드는 지난 1961년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 ‘햄버거 대학’을 세웠다. 치킨대학에 윤 회장이 그린 미래가 비친다.윤 회장은 지난 2월 개최된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한국 선수단장을 맡았다. 이전부터 비인기 종목에 대한 사명감이 있었는데 2020년 관리 단체에 지정되면서 존폐 기로에 몰렸던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을 수락한 뒤 이어진 역할이다. 윤 회장은 지난 2005년에도 서울스쿼시연맹 회장을 지냈다.이 과정에서 ‘치킨연금’을 만들면서 다시금 ‘닭 사랑’을 보였다. 베이징 올림픽 메달리스트를 상대로 최대 38년간 ‘1일1닭’ 등 멤버십 포인트로 적정 치킨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총 19명의 선수가 이 혜택을 받는다.윤 회장은 치킨을 세계에 알리는 데에도 사명감을 갖고 있다. 최근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 세계에 5만 개 점포를 출점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BBQ는 미국 법인 2곳과 베트남과 중국 각각 1곳 등 총 4개 해외법인을 자회사로 두고 58개국, 2250개 점포를 운영 중이다. BBQ는 기업공개(IPO)를 검토하고 있다.
    김영환 기자 2022.10.20
    [이데일리 김영환 기자] 윤홍근 제너시스 BBQ 회장은 닭에 살고 닭에 죽는다. 주변이 온통 닭으로 둘러싸여 있다. 태몽으로 ‘닭’이 나왔는데 ‘봉황’이라 허세 부리는 경우는 있어도 ‘봉황’이 나왔는데 ‘닭’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을까. 있다. 윤 회장이다.일화는 제너시스 BBQ 홈페이지에도 소개해뒀다. ‘춤추는 봉황이 하늘에서 내려와 품에 안겼다는 어머니의 꿈. 하지만 그 봉황은 닭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니었을까?’라고 윤 회장은 적었다. “나의 태몽은 ‘춤추는 닭’이며 ‘닭은 내 운명’”이라고 할 만큼 윤 회장은 닭에 진심이다.지난달 1일 창사 27주년을 맞아 윤홍근 제너시스 BBQ 회장이 창립기념사를 하고 있다. 윤 회장이 입은 유니폼에 닭 무늬가 수놓아져 있다.(사진=BBQ)패션철학조차도 ‘닭’이다. 본인부터가 닭을 모티브로 한 디자인의 제품을 즐겨입는다. 닭무늬 넥타이를 차고 넥타이핀도 닭의 형상을 하고 있다. 닭이 아로새겨진 모자를 쓰거나 주위에 선물하기도 한다.유니폼은 말해 무엇할까. 제너시스 BBQ 직원들은 회사에서 닭이 수놓아진 유니폼을 입고 근무한다. 지난 2017년 프로게임단 ‘ESC 셰인’을 후원해 ‘BBQ 올리버스’로 활동 때에도 게임단의 유니폼에는 닭이 빠지지 않았다.전 세계에서 긁어 모은 닭 모형만도 5000점이 넘어간다. 한 유튜브 채널에서 공개됐던 윤 회장 집무실은 온통 닭 모형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나무, 도자기, 유리, 금에 이르기까지 재질도 다양하고 크기도 천차만별이다. 중국, 일본 등 아시아에서부터 미국, 유럽 등 전 세계에서 건너온 각종 진귀한 닭 모형은 수 억원을 호가하는 작품도 있다. 전 세계에서 닭 모형을 수집하는 것은 반대로 전 세계에 BBQ를 전파하고자 하는 윤 회장의 의지가 담긴 일이다.윤홍근 제너시스 BBQ 회장 집무실. 화려한 닭 모형이 집무실을 가득 채우고 있다.(사진=네고왕 캡처)윤 회장과 닭과의 인연은 30여 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4년 미원에 입사한 윤 회장은 1994년 미원이 인수한 닭고기 업체 ‘천호마니커’의 영업부장직을 맡으며 닭 사업의 가능성을 봤다.윤 회장은 자신에게 ‘기업’의 가치를 알려준 사람으로 아버지를 꼽는다. 아버지에게 책가방과 운동화를 선물 받은 어린 윤 회장이 호기심에서 제품을 만든 사람을 궁금해하자 아버지가 ‘기업’이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윤 회장은 기업가로서 막연한 꿈을 키웠다.이미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전국에 치킨집이 많던 때였다. 윤 회장은 어느 날 담배 연기가 가득한 통닭집에서 모자가 통닭을 먹는 모습을 보여 불현듯 창업을 결심했다고 한다. 호프집으로서의 치킨집이 아닌, 어린이와 여성을 타깃으로 삼는 깨끗한 치킨집을 떠올렸다.확신에 찬 윤 회장은 1995년 9월 집까지 전세에서 월세로 옮기면서 자본금 5억원으로 BBQ를 설립했다. 윤 회장이 “치킨을 파는 게 아니라 브랜드와 경영 노하우를 판다”고 버릇처럼 말해온 것처럼 윤 회장이 생각한 ‘어린이·여성을 위한 치킨’은 시장에서 가능성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윤 회장이 설립한 ‘치킨대학’은 혁혁한 공을 세웠다. 치킨대학은 지난 2000년 경기도 이천시에 제네시스 BBQ가 설립한 연구개발(R&D)센터 겸 치킨 외식 사업가 양성 교육시설이다. 제너시스BBQ 치킨대학 전경.(사진=BBQ)윤 회장은 창업 때부터 세계적 햄버거 프랜차이즈 ‘맥도널드’에 대한 경쟁심을 드러냈다. 과거 인터뷰에서 ‘빅맥지수’에 필적할 ‘BBQ지수’를 언급하기도 했다. 맥도널드는 지난 1961년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 ‘햄버거 대학’을 세웠다. 치킨대학에 윤 회장이 그린 미래가 비친다.윤 회장은 지난 2월 개최된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한국 선수단장을 맡았다. 이전부터 비인기 종목에 대한 사명감이 있었는데 2020년 관리 단체에 지정되면서 존폐 기로에 몰렸던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을 수락한 뒤 이어진 역할이다. 윤 회장은 지난 2005년에도 서울스쿼시연맹 회장을 지냈다.이 과정에서 ‘치킨연금’을 만들면서 다시금 ‘닭 사랑’을 보였다. 베이징 올림픽 메달리스트를 상대로 최대 38년간 ‘1일1닭’ 등 멤버십 포인트로 적정 치킨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총 19명의 선수가 이 혜택을 받는다.윤 회장은 치킨을 세계에 알리는 데에도 사명감을 갖고 있다. 최근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 세계에 5만 개 점포를 출점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BBQ는 미국 법인 2곳과 베트남과 중국 각각 1곳 등 총 4개 해외법인을 자회사로 두고 58개국, 2250개 점포를 운영 중이다. BBQ는 기업공개(IPO)를 검토하고 있다.
  • "죽기전 올림픽 메달"…한화 김동선의 찐 승마사랑[오너의 취향]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승마는 가장 돈이 많이 드는 ‘부잣집 스포츠’로 인식된다. 승부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말의 엄청난 가격 때문에 스포츠로서의 승마는 진입 장벽이 매우 높다. 우수한 말의 경우 가격만 수억원에서 수십억원을 호가한다. 웬만한 자산가가 아니라면 선수로서 활동하긴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2016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건도 배경엔 승마가 있었다. 승마선수였던 딸 정유라가 탈 수 있는 말을 요구한 것이 사건의 핵심이었다. 당시 최서원 측이 제공 받은 말 3필의 가격만 258만 유로(약 35억 7800만원)에 달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한화그룹 3남 김동선 한화호텔앤드리조트 전무. (사진=연합뉴스)전직 방송기자 출신 일반인과 결혼해 화제를 모은 한화그룹 삼남 김동선 한화호텔앤드리조트 전무는 승마 선수를 겸임하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승마에 입문해 중학교 시절 본격적인 선수 생활을 시작한 김 전무는 10대 때부터 두각을 나타나며 국가대표로 활동했다. 만 17세 나이로 출전했던 2006 도하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것을 비롯해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땄다. 마장마술 종목에서는 국내에 적수가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여기서 더 나아가 올림픽 국제선발전 그랑프리에 출전해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다. 한국 승마의 역대 두 번째 올림픽 출전이었다. 그는 지난해 열린 2020 도쿄 올림픽에도 출전했다. 비록 결선엔 오르지 못했지만 아시아 선수 중에선 1위를 기록했다. 2006년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병역특례를 받았다. 재벌 총수일가로선 보기 드문 사례였다.그룹 경영에도 참여하고 있는 김 전무는 여전히 승마 선수로서의 열정도 불태우고 있다. 그는 지난해 8월 도쿄 올림픽을 마친 후 소셜미디어에 “다음 올림픽에서는 더 잘하겠습니다”라는 글을 올리며 2024 파리 올림픽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김 전무는 지난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선수로서 남은 목표에 대해 “죽기 전에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것”이라고 승마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김 전무는 지난해엔 대한승마협회 산하 단체인 한국학생승마협회 회장에 선출돼 활동하고 있다. 올해 5월엔 한화그룹의 승마사업 계열사인 한화넥스트의 승마사업부문장을 맡아 겸임하고 있다. 그는 승마계에서 대한승마협회 임원진의 전횡에 대한 거센 비판이 나오자, 지난 7월 소셜미디어에 “대한승마협회가 부디 정신을 차리길”이라며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김동선 선수는 국제 선발전을 뚫고 한국 선수로는 8년 만에 2016년 리우 올림픽 본선 무대에 진출했다. 그는 2020년 도쿄 올림픽에도 출전했다. (사진=연합뉴스)김 전무 외에도 재벌 총수일가에선 승마를 즐기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 인사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다. 이 부회장 역시 대학 재학 시절 승마 국가대표를 지냈을 정도로 승마에 재능을 보였다. 그 역시 1989년 아시아승마선수권대회에서 은메달을 따기도 했다. 다만 이 부회장은 낙상 사고 등으로 허리를 다쳐 승마선수 생활을 접은 것으로 알려졌다.두 사람 소속 그룹의 전폭적 지원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었다. 한화그룹은 2006년 한화갤러리아승마단을 창단해 김 전무를 소속 선수로서 체계적으로 지원했다. 이 덕분에 김 전무는 그해 열린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이 부회장도 선수 생활 당시 삼성승마단 소속으로 활동했다.삼성과 한화는 총수 일가에 대한 개인적 지원 외에도 대한승마협회 회장사를 맡으며 승마계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삼성이 1995년부터 2010년까지 회장사를 맡다가, 승마선수단 해체 후 한화가 회장사를 물려받았다. 한화는 2014년 5월 다시 회장사를 삼성에 넘겼고, 삼성은 2017년 4월 회장사에서 물러났다. 회장사 없이 운영되고 있는 승마협회는 많은 문제점을 야기하며 잦은 집행부 교체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광범 기자 2022.10.13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승마는 가장 돈이 많이 드는 ‘부잣집 스포츠’로 인식된다. 승부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말의 엄청난 가격 때문에 스포츠로서의 승마는 진입 장벽이 매우 높다. 우수한 말의 경우 가격만 수억원에서 수십억원을 호가한다. 웬만한 자산가가 아니라면 선수로서 활동하긴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2016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건도 배경엔 승마가 있었다. 승마선수였던 딸 정유라가 탈 수 있는 말을 요구한 것이 사건의 핵심이었다. 당시 최서원 측이 제공 받은 말 3필의 가격만 258만 유로(약 35억 7800만원)에 달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한화그룹 3남 김동선 한화호텔앤드리조트 전무. (사진=연합뉴스)전직 방송기자 출신 일반인과 결혼해 화제를 모은 한화그룹 삼남 김동선 한화호텔앤드리조트 전무는 승마 선수를 겸임하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승마에 입문해 중학교 시절 본격적인 선수 생활을 시작한 김 전무는 10대 때부터 두각을 나타나며 국가대표로 활동했다. 만 17세 나이로 출전했던 2006 도하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것을 비롯해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땄다. 마장마술 종목에서는 국내에 적수가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여기서 더 나아가 올림픽 국제선발전 그랑프리에 출전해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다. 한국 승마의 역대 두 번째 올림픽 출전이었다. 그는 지난해 열린 2020 도쿄 올림픽에도 출전했다. 비록 결선엔 오르지 못했지만 아시아 선수 중에선 1위를 기록했다. 2006년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병역특례를 받았다. 재벌 총수일가로선 보기 드문 사례였다.그룹 경영에도 참여하고 있는 김 전무는 여전히 승마 선수로서의 열정도 불태우고 있다. 그는 지난해 8월 도쿄 올림픽을 마친 후 소셜미디어에 “다음 올림픽에서는 더 잘하겠습니다”라는 글을 올리며 2024 파리 올림픽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김 전무는 지난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선수로서 남은 목표에 대해 “죽기 전에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것”이라고 승마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김 전무는 지난해엔 대한승마협회 산하 단체인 한국학생승마협회 회장에 선출돼 활동하고 있다. 올해 5월엔 한화그룹의 승마사업 계열사인 한화넥스트의 승마사업부문장을 맡아 겸임하고 있다. 그는 승마계에서 대한승마협회 임원진의 전횡에 대한 거센 비판이 나오자, 지난 7월 소셜미디어에 “대한승마협회가 부디 정신을 차리길”이라며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김동선 선수는 국제 선발전을 뚫고 한국 선수로는 8년 만에 2016년 리우 올림픽 본선 무대에 진출했다. 그는 2020년 도쿄 올림픽에도 출전했다. (사진=연합뉴스)김 전무 외에도 재벌 총수일가에선 승마를 즐기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 인사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다. 이 부회장 역시 대학 재학 시절 승마 국가대표를 지냈을 정도로 승마에 재능을 보였다. 그 역시 1989년 아시아승마선수권대회에서 은메달을 따기도 했다. 다만 이 부회장은 낙상 사고 등으로 허리를 다쳐 승마선수 생활을 접은 것으로 알려졌다.두 사람 소속 그룹의 전폭적 지원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었다. 한화그룹은 2006년 한화갤러리아승마단을 창단해 김 전무를 소속 선수로서 체계적으로 지원했다. 이 덕분에 김 전무는 그해 열린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이 부회장도 선수 생활 당시 삼성승마단 소속으로 활동했다.삼성과 한화는 총수 일가에 대한 개인적 지원 외에도 대한승마협회 회장사를 맡으며 승마계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삼성이 1995년부터 2010년까지 회장사를 맡다가, 승마선수단 해체 후 한화가 회장사를 물려받았다. 한화는 2014년 5월 다시 회장사를 삼성에 넘겼고, 삼성은 2017년 4월 회장사에서 물러났다. 회장사 없이 운영되고 있는 승마협회는 많은 문제점을 야기하며 잦은 집행부 교체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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