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생활부

김영환

기자

그해 오늘

  • "고통은 내 비타민"...박찬호, 동양인 두 번째 MLB 100승[그해 오늘]
    [이데일리 이연호 기자]“이제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 등판일 뿐이다” 지난 2005년 6월 5일(한국 시각) 동양인으로선 역대 두 번째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에서 100승을 거둔 후 박찬호가 언론을 통해 밝힌 소감이다. 그는 2010년 MLB 은퇴 시즌에 결국 MLB 아시아 투수 역대 최다승 투수가 됐고 여전히 그 자리를 유지 중이다.박찬호 선수가 지난 2005년 6월 5일(한국 시각) 미국 캔자스시티 카우프먼스타디움에서 벌어진 캔자스시티 로열스와의 원정 경기에 선발로 등판해 2회 전력 투구하고 있다. 이 경기에서 박찬호는 1승을 추가하며 대망의 100승 고지에 올랐다. 사진=연합뉴스.1996년 4월 7일 미국 프로야구 MLB의 LA 다저스와 시카고 컵스 경기에 2회 다저스 선발 라몬 마르티네즈가 강판 당하자 낯선 동양인 투수가 마운드에 올라갔다. 만 22세의 젊은 그 투수는 시카고 타선을 상대로 4이닝 7탈삼진 무실점 쾌투를 선보이며 첫 승을 따냈다. 미국 땅에 발을 디딘 지 2년여 만의 첫 승이었다.‘코리안 특급’ 박찬호의 MLB 정복은 그렇게 첫걸음을 내딛었다. 세계 최고의 프로야구 무대에서 우리나라 선수가 첫 승을 거두자 국내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박찬호는 이후 5일 뒤 플로리다 말린스와의 경기에선 첫 선발승을 따내는 기염을 토하는 등 풀타임 메이저리거로서 첫 해 5승을 수확했다.이듬해인 1997년 박찬호는 전해의 성과를 인정받아 팀의 5선발 자리를 꿰찼고 이해 14승 8패에 평균자책점(ERA) 3.38, 192이닝, 이닝당 출루허용률(WHIP) 1.14로 수준급의 성적을 거뒀다. 시즌 초부터 파죽지세의 활약을 보이자 우리나라에선 박찬호의 선발 등판일에 지상파 중계가 편성됐고 그가 승리를 거둔 날 국민들은 그 얘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그의 활약은 ‘골프 여제’ 박세리와 함께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로 시름에 빠진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큰 자부심과 희망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그는 1997년부터 2001년까지 연평균 213⅔이닝을 던지며 5년 연속 두 자릿수 승수(연평균 15승)를 챙겼다. 특히 2000년에는 18승 10패, ERA 3.27, 217탈삼진의 눈부신 피칭으로 내셔널리그 사이영상 후보까지 오르는 등 MLB에서도 손꼽힐 만한 특급 투수 반열까지 올랐다.이 같은 성적을 바탕으로 2001년 시즌 뒤 텍사스 레인저스와 그해 자유계약선수(FA) 최고 대우인 5년 총액 6500만 달러의 메가톤급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그 이후 성적이 눈에 띄게 하향 곡선을 그리며 ‘FA 먹튀’의 오명을 묵묵히 견뎌야 했다. 텍사스 이적 후 허리 부상 등에 시달리며 3년 간 거둔 승수가 고작 14승에 불과하자 그는 한물간 투수 취급을 받았다. 동료들의 신뢰도 예전 같지 않았다.그러나 박찬호는 와신상담을 꿈꾸며 묵묵히 재활에 매달렸다. 이 과정에서 심한 스트레스에 원형 탈모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스스로에게 “고통은 비타민”이라고 되뇌며 인고의 시간을 지나온 그에게 영광의 순간이 결국 다시 찾아왔다.텍사스 레인저스 소속이던 2005년 6월 5일 미국 캔자스시티 카우프먼스타디움에서 열린 캔자스시티 로열스와의 원정 경기에 선발 등판한 그는 5이닝 간 11안타를 맞고 6실점했으나, 홈런 4방을 앞세워 무려 14점의 지원 사격에 나선 타선 덕에 승리 투수가 됐다. 투구 수 107개 가운데 70개가 스트라이크였으며 최고 구속은 151km(94마일)였다. 이로써 박찬호는 일본의 노모 히데오에 이어 두 번째로 동양인 100승 투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1994년 메이저리그 데뷔 이후 11년 만, 1996년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된 이후 9년 만의 일이었다.그는 “나 혼자 거둔 100승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서 고통과 기쁨을 함께 해 준 데 감사드린다”며 주위에 공을 돌렸다. 역경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긴 정신력을 바탕으로 이룬 대업이었다.이후 박찬호는 2010년까지 부진과 재기를 거듭하며 MLB에서 17시즌 활약한 끝에 노모 히데오의 123승을 넘어 124승째를 올리고 MLB 아시아 투수 역대 최다승 기록을 새로 썼다. 박찬호가 통산 100승을 거둔 지 18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이 자리는 박찬호와 노모 히데오에게만 허락된 자리다.
    이연호 기자 2023.06.05
    [이데일리 이연호 기자]“이제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 등판일 뿐이다” 지난 2005년 6월 5일(한국 시각) 동양인으로선 역대 두 번째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에서 100승을 거둔 후 박찬호가 언론을 통해 밝힌 소감이다. 그는 2010년 MLB 은퇴 시즌에 결국 MLB 아시아 투수 역대 최다승 투수가 됐고 여전히 그 자리를 유지 중이다.박찬호 선수가 지난 2005년 6월 5일(한국 시각) 미국 캔자스시티 카우프먼스타디움에서 벌어진 캔자스시티 로열스와의 원정 경기에 선발로 등판해 2회 전력 투구하고 있다. 이 경기에서 박찬호는 1승을 추가하며 대망의 100승 고지에 올랐다. 사진=연합뉴스.1996년 4월 7일 미국 프로야구 MLB의 LA 다저스와 시카고 컵스 경기에 2회 다저스 선발 라몬 마르티네즈가 강판 당하자 낯선 동양인 투수가 마운드에 올라갔다. 만 22세의 젊은 그 투수는 시카고 타선을 상대로 4이닝 7탈삼진 무실점 쾌투를 선보이며 첫 승을 따냈다. 미국 땅에 발을 디딘 지 2년여 만의 첫 승이었다.‘코리안 특급’ 박찬호의 MLB 정복은 그렇게 첫걸음을 내딛었다. 세계 최고의 프로야구 무대에서 우리나라 선수가 첫 승을 거두자 국내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박찬호는 이후 5일 뒤 플로리다 말린스와의 경기에선 첫 선발승을 따내는 기염을 토하는 등 풀타임 메이저리거로서 첫 해 5승을 수확했다.이듬해인 1997년 박찬호는 전해의 성과를 인정받아 팀의 5선발 자리를 꿰찼고 이해 14승 8패에 평균자책점(ERA) 3.38, 192이닝, 이닝당 출루허용률(WHIP) 1.14로 수준급의 성적을 거뒀다. 시즌 초부터 파죽지세의 활약을 보이자 우리나라에선 박찬호의 선발 등판일에 지상파 중계가 편성됐고 그가 승리를 거둔 날 국민들은 그 얘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그의 활약은 ‘골프 여제’ 박세리와 함께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로 시름에 빠진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큰 자부심과 희망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그는 1997년부터 2001년까지 연평균 213⅔이닝을 던지며 5년 연속 두 자릿수 승수(연평균 15승)를 챙겼다. 특히 2000년에는 18승 10패, ERA 3.27, 217탈삼진의 눈부신 피칭으로 내셔널리그 사이영상 후보까지 오르는 등 MLB에서도 손꼽힐 만한 특급 투수 반열까지 올랐다.이 같은 성적을 바탕으로 2001년 시즌 뒤 텍사스 레인저스와 그해 자유계약선수(FA) 최고 대우인 5년 총액 6500만 달러의 메가톤급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그 이후 성적이 눈에 띄게 하향 곡선을 그리며 ‘FA 먹튀’의 오명을 묵묵히 견뎌야 했다. 텍사스 이적 후 허리 부상 등에 시달리며 3년 간 거둔 승수가 고작 14승에 불과하자 그는 한물간 투수 취급을 받았다. 동료들의 신뢰도 예전 같지 않았다.그러나 박찬호는 와신상담을 꿈꾸며 묵묵히 재활에 매달렸다. 이 과정에서 심한 스트레스에 원형 탈모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스스로에게 “고통은 비타민”이라고 되뇌며 인고의 시간을 지나온 그에게 영광의 순간이 결국 다시 찾아왔다.텍사스 레인저스 소속이던 2005년 6월 5일 미국 캔자스시티 카우프먼스타디움에서 열린 캔자스시티 로열스와의 원정 경기에 선발 등판한 그는 5이닝 간 11안타를 맞고 6실점했으나, 홈런 4방을 앞세워 무려 14점의 지원 사격에 나선 타선 덕에 승리 투수가 됐다. 투구 수 107개 가운데 70개가 스트라이크였으며 최고 구속은 151km(94마일)였다. 이로써 박찬호는 일본의 노모 히데오에 이어 두 번째로 동양인 100승 투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1994년 메이저리그 데뷔 이후 11년 만, 1996년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된 이후 9년 만의 일이었다.그는 “나 혼자 거둔 100승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서 고통과 기쁨을 함께 해 준 데 감사드린다”며 주위에 공을 돌렸다. 역경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긴 정신력을 바탕으로 이룬 대업이었다.이후 박찬호는 2010년까지 부진과 재기를 거듭하며 MLB에서 17시즌 활약한 끝에 노모 히데오의 123승을 넘어 124승째를 올리고 MLB 아시아 투수 역대 최다승 기록을 새로 썼다. 박찬호가 통산 100승을 거둔 지 18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이 자리는 박찬호와 노모 히데오에게만 허락된 자리다.
  • 4무 10패 후 '1승'...월드컵 본선 진출 48년 만의 첫 승[그해 오늘]
    [이데일리 이연호 기자]첫 승에 48년이 걸렸다. 2002 한일 월드컵 폴란드전 승리는 대한민국이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 본선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2002 한일 월드컵 폴란드전 경기 모습. 사진=연합뉴스.2002년 6월 4일 오후 8시 30분 2002 한일 월드컵 D조 1경기 대한민국과 폴란드의 경기 주심을 맡은 콜롬비아 출신 오스카르 훌리안 루이스 아코스타(Oscar Julian Ruiz Acosta)가 힘찬 휘슬을 울렸다. 휘슬과 동시에 경기가 열린 부산시 연제구 거제동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에 운집한 5만 명에 육박하는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 응원단 ‘붉은 악마’는 대한민국의 월드컵 본선 첫 승을 염원하며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열정적인 붉은 악마들의 압도적 응원을 등에 업은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들은 경기 초반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날카로운 공격을 수차례 선보이며 먼저 기세를 올린 것은 폴란드였다.그러다 대표팀 주장 홍명보의 강력한 중거리 슛을 계기로 경기 흐름을 가져온 대한민국은, 전반 26분 스로인(throw-in) 이후 공을 되돌려받은 이을용이 페널티 박스 안으로 들어가던 황선홍에게 회심의 크로스를 올렸다. 황선홍은 이를 깔끔한 왼발 발리슛으로 연결해 상대의 왼쪽 골망을 흔들었다.후반전 8분엔 유상철이 강력한 전방 압박으로 상대 수비수에게서 공을 뺏은 뒤 상대편 아크 서클(arc circle)에서 중거리 슛으로 쐐기골을 터트렸다. 폴란드 골키퍼 예지 두덱(Jerzy Dudek)이 펀칭을 했지만 강력한 슛은 두덱의 손을 맞고도 그대로 골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결국 이 경기는 대한민국의 2대 0의 완벽한 승리로 경기는 끝났다.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월드컵 본선 첫 승이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첫 본선에 진출한 대한민국이 폴란드전 이전까지 거둔 성적은 4무10패로 승리는 없었다.경기 결과뿐만 아니라 경기 내용적 측면에서도 이 경기는 상대를 압도한 경기로 평가 받았다. 오히려 상대 골키퍼 두덱의 선방 때문에 더 많은 골을 기록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또한 이 경기는 우리나라가 이 대회에서 상대 팀 선수의 퇴장 없이 11대 11로 싸워 승리한 유일한 경기였다.이날 붉은 악마는 경기 시작 전 ‘Win(윈·승리) 3:0’이라는 대형 카드 섹션을 내걸었는데 그에 걸맞은 경기였다. 결국 대한민국은 폴란드전 첫 승을 시작으로 승승장구해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룩했다.폴란드전 승리의 주역이었던 유상철은 이날 경기 승리로부터 19년이 지난 2021년 6월 7일 만 49세의 젊은 나이에 췌장암으로 사망하며 많은 축구 팬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지상파 3사의 스포츠 전용 채널들은 유상철을 추모하기 위해 그가 쐐기골을 넣은 2002년 한일 월드컵 폴란드전을 재방송했다.
    이연호 기자 2023.06.04
    [이데일리 이연호 기자]첫 승에 48년이 걸렸다. 2002 한일 월드컵 폴란드전 승리는 대한민국이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 본선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2002 한일 월드컵 폴란드전 경기 모습. 사진=연합뉴스.2002년 6월 4일 오후 8시 30분 2002 한일 월드컵 D조 1경기 대한민국과 폴란드의 경기 주심을 맡은 콜롬비아 출신 오스카르 훌리안 루이스 아코스타(Oscar Julian Ruiz Acosta)가 힘찬 휘슬을 울렸다. 휘슬과 동시에 경기가 열린 부산시 연제구 거제동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에 운집한 5만 명에 육박하는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 응원단 ‘붉은 악마’는 대한민국의 월드컵 본선 첫 승을 염원하며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열정적인 붉은 악마들의 압도적 응원을 등에 업은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들은 경기 초반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날카로운 공격을 수차례 선보이며 먼저 기세를 올린 것은 폴란드였다.그러다 대표팀 주장 홍명보의 강력한 중거리 슛을 계기로 경기 흐름을 가져온 대한민국은, 전반 26분 스로인(throw-in) 이후 공을 되돌려받은 이을용이 페널티 박스 안으로 들어가던 황선홍에게 회심의 크로스를 올렸다. 황선홍은 이를 깔끔한 왼발 발리슛으로 연결해 상대의 왼쪽 골망을 흔들었다.후반전 8분엔 유상철이 강력한 전방 압박으로 상대 수비수에게서 공을 뺏은 뒤 상대편 아크 서클(arc circle)에서 중거리 슛으로 쐐기골을 터트렸다. 폴란드 골키퍼 예지 두덱(Jerzy Dudek)이 펀칭을 했지만 강력한 슛은 두덱의 손을 맞고도 그대로 골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결국 이 경기는 대한민국의 2대 0의 완벽한 승리로 경기는 끝났다.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월드컵 본선 첫 승이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첫 본선에 진출한 대한민국이 폴란드전 이전까지 거둔 성적은 4무10패로 승리는 없었다.경기 결과뿐만 아니라 경기 내용적 측면에서도 이 경기는 상대를 압도한 경기로 평가 받았다. 오히려 상대 골키퍼 두덱의 선방 때문에 더 많은 골을 기록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또한 이 경기는 우리나라가 이 대회에서 상대 팀 선수의 퇴장 없이 11대 11로 싸워 승리한 유일한 경기였다.이날 붉은 악마는 경기 시작 전 ‘Win(윈·승리) 3:0’이라는 대형 카드 섹션을 내걸었는데 그에 걸맞은 경기였다. 결국 대한민국은 폴란드전 첫 승을 시작으로 승승장구해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룩했다.폴란드전 승리의 주역이었던 유상철은 이날 경기 승리로부터 19년이 지난 2021년 6월 7일 만 49세의 젊은 나이에 췌장암으로 사망하며 많은 축구 팬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지상파 3사의 스포츠 전용 채널들은 유상철을 추모하기 위해 그가 쐐기골을 넣은 2002년 한일 월드컵 폴란드전을 재방송했다.
  •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다 가다[그해 오늘]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1954년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시의 경찰서. 열두 살 흑인 소년이 자전거를 도둑맞은 데 분통을 터뜨리며 “한 방 먹여주고 싶다”고 씩씩거렸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경찰관이 소년에게 “그러면 권투를 하라”고 조언했다. 이 말을 계기로 소년은 권투에 입문하고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첫 올림픽에서 소년이 거둔 성적은 금메달. 권투의 전설로 꼽히는 무함마드 알리(Muhammad Ali) 얘기다.1965년 소니 리스턴과 경기에서 1라운드 KO승리를 거두고 표효하는 알리.고국으로 돌아온 알리를 반긴 건 흑인 차별이었다. 미국을 대표하는 운동선수로서 올림픽 금메달을 딴 자신도 차별에는 예외가 아니었다. 그 길로 프로로 전향을 결심했다. 미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와 정의, 평등을 위해 싸운 사람으로 기억되고자 한다”는 복서 알리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프로에 입문(1960년)하고 1970년까지 10년 동안 치른 32경기에서 모두 승리했다. 첫 패배는 1971년 라이벌 조 프레이저와 맞붙은 경기였다. 1981년 은퇴하기까지 프로 통산 61전, 56승, 5패. 이 기간에 당시 프로 복싱 양대 기구인 WBA(4회)와 WBC(2회) 헤비급 챔피언을 지냈다. 통산 타이틀 방어는 19차례 성공했다.라이벌 조 프레이저와 치른 세 차례 경기는 모두 명승부로 기록된다. 상대 전적 1승 1패로 시작한 3차전(1975년)을 앞두고 프레이저는 “신이시여, 알리를 때려눕힐 힘과 방법을 알려달라”고 기도했지만 소용없었다. 경기는 14라운드 알리의 TKO 승리로 끝났다. 1974년 아프리카 콩고 킨샤사에서 치른 조지 포먼과 경기도 회자된다. 서른두 살의 나이로 전성기를 지난 알리는 노련한 경기 운영으로 스물네 살 돌주먹 포먼을 8라운드 KO승으로 이겼다.알리의 싸움은 링 밖에서도 계속됐다. 1965년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알리로 개명한 게 대표적이다. 그전까지 쓰던 이름 캐시어스 클레이(Cassius Clay)는 백인이 노예에게 붙인 것이라는 이유로 버렸다. 선수생활이 흔들리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베트남 전쟁에 징집을 거부했다. 유죄 판결이 무죄로 뒤집히기까지 운동선수로서 최고 전성기(25~28세)를 허비했다. “베트공이 흑인을 무시한 적 없으니 총을 겨눌 수 없다”는 게 신조였다.이렇듯 화려한 언변은 알리를 상징했다. 현역 시절 자신의 권투 스타일을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로 규정한 어록은 유명하다.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Nothing is impossible)는 스포츠 브랜드 아디다스의 광고 카피로서도 활용됐다.은퇴하고 3년이 지나 얻은 파킨슨병은 화려한 언변과 현란한 움직임을 앗아갔다.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인종과 종교에 대한 차별과 맞서 싸우기를 이어갔다. 파킨슨병 치료 재단을 설립해 같은 고통을 받는 이들을 위로했다.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 성화 점화자로 대중에 나타나 세계인에게 희망과 감동을 안겼다. 파킨슨병 증상이 심해서 손이 떨리고 발걸음은 더뎠지만 굳은 의지로 점화에 성공했다.2016년 6월3일 74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파킨슨병 합병증이 사인이었다. 고인을 추모하는 물결에 세계에서 일었다. “알리는 GOAT(The Greatest of All Time)”(버락 오바마), “가장 훌륭한 복서가 아니라, 가장 위대한 사람”(조지 포먼)이라는 추도가 잇달았다.
    전재욱 기자 2023.06.03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1954년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시의 경찰서. 열두 살 흑인 소년이 자전거를 도둑맞은 데 분통을 터뜨리며 “한 방 먹여주고 싶다”고 씩씩거렸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경찰관이 소년에게 “그러면 권투를 하라”고 조언했다. 이 말을 계기로 소년은 권투에 입문하고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첫 올림픽에서 소년이 거둔 성적은 금메달. 권투의 전설로 꼽히는 무함마드 알리(Muhammad Ali) 얘기다.1965년 소니 리스턴과 경기에서 1라운드 KO승리를 거두고 표효하는 알리.고국으로 돌아온 알리를 반긴 건 흑인 차별이었다. 미국을 대표하는 운동선수로서 올림픽 금메달을 딴 자신도 차별에는 예외가 아니었다. 그 길로 프로로 전향을 결심했다. 미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와 정의, 평등을 위해 싸운 사람으로 기억되고자 한다”는 복서 알리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프로에 입문(1960년)하고 1970년까지 10년 동안 치른 32경기에서 모두 승리했다. 첫 패배는 1971년 라이벌 조 프레이저와 맞붙은 경기였다. 1981년 은퇴하기까지 프로 통산 61전, 56승, 5패. 이 기간에 당시 프로 복싱 양대 기구인 WBA(4회)와 WBC(2회) 헤비급 챔피언을 지냈다. 통산 타이틀 방어는 19차례 성공했다.라이벌 조 프레이저와 치른 세 차례 경기는 모두 명승부로 기록된다. 상대 전적 1승 1패로 시작한 3차전(1975년)을 앞두고 프레이저는 “신이시여, 알리를 때려눕힐 힘과 방법을 알려달라”고 기도했지만 소용없었다. 경기는 14라운드 알리의 TKO 승리로 끝났다. 1974년 아프리카 콩고 킨샤사에서 치른 조지 포먼과 경기도 회자된다. 서른두 살의 나이로 전성기를 지난 알리는 노련한 경기 운영으로 스물네 살 돌주먹 포먼을 8라운드 KO승으로 이겼다.알리의 싸움은 링 밖에서도 계속됐다. 1965년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알리로 개명한 게 대표적이다. 그전까지 쓰던 이름 캐시어스 클레이(Cassius Clay)는 백인이 노예에게 붙인 것이라는 이유로 버렸다. 선수생활이 흔들리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베트남 전쟁에 징집을 거부했다. 유죄 판결이 무죄로 뒤집히기까지 운동선수로서 최고 전성기(25~28세)를 허비했다. “베트공이 흑인을 무시한 적 없으니 총을 겨눌 수 없다”는 게 신조였다.이렇듯 화려한 언변은 알리를 상징했다. 현역 시절 자신의 권투 스타일을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로 규정한 어록은 유명하다.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Nothing is impossible)는 스포츠 브랜드 아디다스의 광고 카피로서도 활용됐다.은퇴하고 3년이 지나 얻은 파킨슨병은 화려한 언변과 현란한 움직임을 앗아갔다.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인종과 종교에 대한 차별과 맞서 싸우기를 이어갔다. 파킨슨병 치료 재단을 설립해 같은 고통을 받는 이들을 위로했다.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 성화 점화자로 대중에 나타나 세계인에게 희망과 감동을 안겼다. 파킨슨병 증상이 심해서 손이 떨리고 발걸음은 더뎠지만 굳은 의지로 점화에 성공했다.2016년 6월3일 74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파킨슨병 합병증이 사인이었다. 고인을 추모하는 물결에 세계에서 일었다. “알리는 GOAT(The Greatest of All Time)”(버락 오바마), “가장 훌륭한 복서가 아니라, 가장 위대한 사람”(조지 포먼)이라는 추도가 잇달았다.
  • 방치해 숨진 딸장례식에 불참한 부모.."술마시고 늦잠"[그해 오늘]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2019년 6월2일. 인천 부평구에 있는 딸 부부 집을 방문한 중년 여성은 황급히 손녀부터 찾았다. 딸의 친구로부터 손녀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연락을 받은 터라서 불안했다. 생후 7개월 난 손녀는 거실에 놓인 라면 상자에 놓여 있었다. 숨이 끊긴 채였다.(사진=게티이미지)아이의 부모는 당시 스물한 살 A씨와 열여덟 살 B씨(여)였다. 2018년 11월 얻은 딸은 축복이었다. 부모의 집에 얹혀살던 부부는 2019년 3월 독립해 동거를 시작했다. 나이는 비록 상대적으로 어리지만 스스로 힘으로 아이를 키워보려고 한 것이다. A씨는 주로 밖에서 돈을 벌었고, B씨가 양육을 사실상 전담했다.동거는 곧 위기를 맞았다. 여자관계가 복잡한 A씨는 외박하는 날이 많았다. B씨는 남편의 외도를 의심하고 집착했다. 그러면서 양육을 홀로 감당하는 데 대한 정신적인 불만과 육체적인 피로를 호소했다. 부부는 싸우는 날이 잦았고 관계는 날로 악화해갔다.그럴수록 A씨가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더 많아졌고, B씨와 딸을 두고 외출하기가 일쑤였다. B씨도 남편에게 불만을 품고 외출하기 시작했다. 양육의 책임을 함께 지자는 것이었다. 결국, 두 사람 모두가 집을 비우는 상황이 발생했다. 2019년 5월26일, 집에는 아이와 반려견 두 마리만 남게 됐다.A씨와 B씨는 서로 육아를 떠넘기며 유흥을 즐겼다. 간간이 집에 들러 아이에게 분유만 먹이고 집을 떴다. 돌봄을 받지 못한 반려견 탓에 집안은 난리였다. 배변과 쓰레기가 뒹굴었다. 스트레스를 받은 반려견은 아이를 공격했다. 부모가 집을 비운 엿새 동안 아이는 굶주림과 공격에 지쳐가다가 숨을 거뒀다.집으로 돌아온 부부는 아이를 발견하고 라면 상자에 두고 옷가지로 덮었다. 사태를 수습하려는 게 아니라 외면하려고 한 것이다. 아이가 숨진 지 사흘째, B씨의 모친이 집을 찾아가 아이의 시신을 발견했다. 조부모가 차린 아이의 장례식에 A씨와 B씨는 나타나지 않았다. 술에 취해 잠을 자느라 그랬다고 한다.부부는 살인과 아동복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1심은 A씨에게 징역 20년을, B씨에게 단기 7년~장기 15년의 징역형을 각각 선고했다. 판결 당시 B씨는 소년범(미성년자)이었다. 소년범은 교화 가능성을 열어두고자 단기부터 장기까지 기간을 정해 부정기형을 선고한다.항소심은 A씨에게 징역 10년을, B씨에게 징역 7년을 각각 선고했다. 검찰이 항소하지 않고 부부만 항소한 터라서, 1심보다 무거운 형을 선고하지 못했다. ‘불이익 변경 금지 원칙’이 적용된 것이다. 그래서 B씨에게 단기형을 적용해 징역 7년을, A씨에게는 B씨와 형평성을 고려해 징역 10년을 각각 적용했다. 검찰의 대처와 법원의 감형이 국민 법감정을 거스른다는 비판이 뒤따랐다.대법원에서 사건은 파기됐다. 소년범에게 정기형을 선고하려면 단기와 장기의 중간 정도로 형량을 정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B씨의 징역 7년이 가벼우니 늘리라는 것이다. 다만, A씨의 형량은 그대로 확정됐다. 파기 환송심에서 B씨에게 징역 10년이 선고돼 이후 확정됐다.
    전재욱 기자 2023.06.02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2019년 6월2일. 인천 부평구에 있는 딸 부부 집을 방문한 중년 여성은 황급히 손녀부터 찾았다. 딸의 친구로부터 손녀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연락을 받은 터라서 불안했다. 생후 7개월 난 손녀는 거실에 놓인 라면 상자에 놓여 있었다. 숨이 끊긴 채였다.(사진=게티이미지)아이의 부모는 당시 스물한 살 A씨와 열여덟 살 B씨(여)였다. 2018년 11월 얻은 딸은 축복이었다. 부모의 집에 얹혀살던 부부는 2019년 3월 독립해 동거를 시작했다. 나이는 비록 상대적으로 어리지만 스스로 힘으로 아이를 키워보려고 한 것이다. A씨는 주로 밖에서 돈을 벌었고, B씨가 양육을 사실상 전담했다.동거는 곧 위기를 맞았다. 여자관계가 복잡한 A씨는 외박하는 날이 많았다. B씨는 남편의 외도를 의심하고 집착했다. 그러면서 양육을 홀로 감당하는 데 대한 정신적인 불만과 육체적인 피로를 호소했다. 부부는 싸우는 날이 잦았고 관계는 날로 악화해갔다.그럴수록 A씨가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더 많아졌고, B씨와 딸을 두고 외출하기가 일쑤였다. B씨도 남편에게 불만을 품고 외출하기 시작했다. 양육의 책임을 함께 지자는 것이었다. 결국, 두 사람 모두가 집을 비우는 상황이 발생했다. 2019년 5월26일, 집에는 아이와 반려견 두 마리만 남게 됐다.A씨와 B씨는 서로 육아를 떠넘기며 유흥을 즐겼다. 간간이 집에 들러 아이에게 분유만 먹이고 집을 떴다. 돌봄을 받지 못한 반려견 탓에 집안은 난리였다. 배변과 쓰레기가 뒹굴었다. 스트레스를 받은 반려견은 아이를 공격했다. 부모가 집을 비운 엿새 동안 아이는 굶주림과 공격에 지쳐가다가 숨을 거뒀다.집으로 돌아온 부부는 아이를 발견하고 라면 상자에 두고 옷가지로 덮었다. 사태를 수습하려는 게 아니라 외면하려고 한 것이다. 아이가 숨진 지 사흘째, B씨의 모친이 집을 찾아가 아이의 시신을 발견했다. 조부모가 차린 아이의 장례식에 A씨와 B씨는 나타나지 않았다. 술에 취해 잠을 자느라 그랬다고 한다.부부는 살인과 아동복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1심은 A씨에게 징역 20년을, B씨에게 단기 7년~장기 15년의 징역형을 각각 선고했다. 판결 당시 B씨는 소년범(미성년자)이었다. 소년범은 교화 가능성을 열어두고자 단기부터 장기까지 기간을 정해 부정기형을 선고한다.항소심은 A씨에게 징역 10년을, B씨에게 징역 7년을 각각 선고했다. 검찰이 항소하지 않고 부부만 항소한 터라서, 1심보다 무거운 형을 선고하지 못했다. ‘불이익 변경 금지 원칙’이 적용된 것이다. 그래서 B씨에게 단기형을 적용해 징역 7년을, A씨에게는 B씨와 형평성을 고려해 징역 10년을 각각 적용했다. 검찰의 대처와 법원의 감형이 국민 법감정을 거스른다는 비판이 뒤따랐다.대법원에서 사건은 파기됐다. 소년범에게 정기형을 선고하려면 단기와 장기의 중간 정도로 형량을 정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B씨의 징역 7년이 가벼우니 늘리라는 것이다. 다만, A씨의 형량은 그대로 확정됐다. 파기 환송심에서 B씨에게 징역 10년이 선고돼 이후 확정됐다.
  • '숨, 숨'..가방에 아이 가둬 살해한 계모[그해 오늘]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2020년 6월1일 점심 무렵이었다. 충남 천안에 있는 한 가정집에서 아홉 살 아이가 여행용 가방에 몸을 구겨 넣었다. 제 발로 가방에 들어간 게 아니었다. 옆에서 겁박해 아이를 가방에 가둔 건 40대 여성 A. 아이의 친부와 동거하는 사이였다.동거남의 아이를 살해한 40대 여성.(사진=연합뉴스)A와 아이의 친부는 2018년 동거를 시작했다. 서로 이혼한 상태였고 아이 둘씩을 양육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아이에게 악몽이 시작됐다. 평소 집에는 A와 친자녀 둘, 그리고 아이와 아이의 동생이 살았다. 친부는 출장이 많아서 몇 주에 한번 집에 들어왔다. 친부가 없는 새 아이와 아이의 동생은 A에게 혼나거나 맞는 날이 잦았다. 맞다 못한 아이의 동생은 부모를 졸라서 친모에게 보내졌다.이제 집에 남은 건 아이뿐이었다. A는 친자녀와 아이를 차별했다. 애들끼리 싸우면 혼나고 맞는 쪽은 아이였다. 그럴수록 아이는 심리적으로 고립돼 갔다. 그로부터 아이는 “잘못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미 부모의 이혼과 양육하던 조부모와 결별, 동생과 이별을 겪은 아이가 선택한 생존법이었다.이런 아이에 대한 A의 양육과 훈육은 학대로 변해갔다. ‘지갑에 손을 댄다’, ‘거짓말을 한다’ 하지도 않은 잘못을 아이에게 강요했고, 아이는 하지도 않은 잘못을 인정했다. 돌아온 건 체벌과 폭언이었다. 코로나 19로 A가 집에 있고 아이가 학교에 가지 않으면서 이런 날이 더 많아졌다.학대 사실을 안 동거남과 다툼이 시작됐다. 남자는 아이를 데려가 기르려고 했다. A는 아이 때문에 남자와 가정을 잃을 것이 걱정됐다. 가방에 아이를 가둔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날 친자녀와 싸우고 있는 아이가 눈엣가시처럼 보였다.아이가 가방 안에 갇힌 지 세 시간이 흘렀다. 지친 아이가 그대로 용변을 봤다. 외출하고 돌아온 A는 아이에게 다른 가방(약 24인치)에 들어가라고 했다. 먼저 것(약 30인치)보다 작은 가방이었다. 고개를 90도로 숙이고 허벅지를 가슴에 붙일 정도로 몸을 욱여넣어야 하는 크기였다.가방에 갇힌 아이는 내내 숨이 막힌다고 했다. 옆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A는 가방 안으로 헤어드라이어기 바람을 쐈다. 가만있어도 초여름의 습도와 기온이 사람을 지치게 하는 날이었다. 아이가 가방에서 나오려고 몸부림치자 A는 가방에 체중(75kg)을 실어서 아이를 짓눌렀다. 가방 안의 아이는 ‘숨이 안 쉬어진다’면서 A를 불렀다.‘엄마’움직임이 잦아든 아이가 가방 밖으로 나온 건 감금된 지 일곱 시간 만이었다. 옅은 숨을 쉬고 있었다.상황을 파악한 A는 범행이 탈로 날 것이 두려워 119신고를 안 했다. 잘할 줄 모르는 심폐소생술을 아이에게 했으니 호흡이 돌아올 리가 없었다. 뒤늦게 신고를 받고 출동한 119가 아이를 싣고 병원으로 달렸다. 아이는 병원 치료 이틀 만에 숨을 거뒀다.살인과 아동 학대 등 혐의로 기소된 A는 재판에서 혐의를 부인했다. 살해하려고 한 게 아니라 훈육하려고 가방에 들어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가방 안이 행여 불편할까봐 중간에 자세를 바꿔줬다고 했다. 수차례 제출한 반성문에서는 아이가 잘못해서 훈육한 것이라고 했다.1심은 징역 22년을 선고했다. 항소심은 형을 가중해서 징역 25년을 선고했다. 이 판결은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전재욱 기자 2023.06.01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2020년 6월1일 점심 무렵이었다. 충남 천안에 있는 한 가정집에서 아홉 살 아이가 여행용 가방에 몸을 구겨 넣었다. 제 발로 가방에 들어간 게 아니었다. 옆에서 겁박해 아이를 가방에 가둔 건 40대 여성 A. 아이의 친부와 동거하는 사이였다.동거남의 아이를 살해한 40대 여성.(사진=연합뉴스)A와 아이의 친부는 2018년 동거를 시작했다. 서로 이혼한 상태였고 아이 둘씩을 양육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아이에게 악몽이 시작됐다. 평소 집에는 A와 친자녀 둘, 그리고 아이와 아이의 동생이 살았다. 친부는 출장이 많아서 몇 주에 한번 집에 들어왔다. 친부가 없는 새 아이와 아이의 동생은 A에게 혼나거나 맞는 날이 잦았다. 맞다 못한 아이의 동생은 부모를 졸라서 친모에게 보내졌다.이제 집에 남은 건 아이뿐이었다. A는 친자녀와 아이를 차별했다. 애들끼리 싸우면 혼나고 맞는 쪽은 아이였다. 그럴수록 아이는 심리적으로 고립돼 갔다. 그로부터 아이는 “잘못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미 부모의 이혼과 양육하던 조부모와 결별, 동생과 이별을 겪은 아이가 선택한 생존법이었다.이런 아이에 대한 A의 양육과 훈육은 학대로 변해갔다. ‘지갑에 손을 댄다’, ‘거짓말을 한다’ 하지도 않은 잘못을 아이에게 강요했고, 아이는 하지도 않은 잘못을 인정했다. 돌아온 건 체벌과 폭언이었다. 코로나 19로 A가 집에 있고 아이가 학교에 가지 않으면서 이런 날이 더 많아졌다.학대 사실을 안 동거남과 다툼이 시작됐다. 남자는 아이를 데려가 기르려고 했다. A는 아이 때문에 남자와 가정을 잃을 것이 걱정됐다. 가방에 아이를 가둔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날 친자녀와 싸우고 있는 아이가 눈엣가시처럼 보였다.아이가 가방 안에 갇힌 지 세 시간이 흘렀다. 지친 아이가 그대로 용변을 봤다. 외출하고 돌아온 A는 아이에게 다른 가방(약 24인치)에 들어가라고 했다. 먼저 것(약 30인치)보다 작은 가방이었다. 고개를 90도로 숙이고 허벅지를 가슴에 붙일 정도로 몸을 욱여넣어야 하는 크기였다.가방에 갇힌 아이는 내내 숨이 막힌다고 했다. 옆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A는 가방 안으로 헤어드라이어기 바람을 쐈다. 가만있어도 초여름의 습도와 기온이 사람을 지치게 하는 날이었다. 아이가 가방에서 나오려고 몸부림치자 A는 가방에 체중(75kg)을 실어서 아이를 짓눌렀다. 가방 안의 아이는 ‘숨이 안 쉬어진다’면서 A를 불렀다.‘엄마’움직임이 잦아든 아이가 가방 밖으로 나온 건 감금된 지 일곱 시간 만이었다. 옅은 숨을 쉬고 있었다.상황을 파악한 A는 범행이 탈로 날 것이 두려워 119신고를 안 했다. 잘할 줄 모르는 심폐소생술을 아이에게 했으니 호흡이 돌아올 리가 없었다. 뒤늦게 신고를 받고 출동한 119가 아이를 싣고 병원으로 달렸다. 아이는 병원 치료 이틀 만에 숨을 거뒀다.살인과 아동 학대 등 혐의로 기소된 A는 재판에서 혐의를 부인했다. 살해하려고 한 게 아니라 훈육하려고 가방에 들어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가방 안이 행여 불편할까봐 중간에 자세를 바꿔줬다고 했다. 수차례 제출한 반성문에서는 아이가 잘못해서 훈육한 것이라고 했다.1심은 징역 22년을 선고했다. 항소심은 형을 가중해서 징역 25년을 선고했다. 이 판결은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 15년 만에 잡힌 살인범, 무죄..부산 다방女 살해사건[그해 오늘]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2002년 5월31일. 부산 강서구 명지동 일대 해변에 마대자루 하나가 밀려왔다. 주변을 지나던 이가 묶인 자루 끈을 풀어보고 까무러쳤다. 자루 안에는 검은 비닐봉지에 싸인 여성의 시신이 들어 있었다. 전날 실종 신고가 접수된 스물두 살 여성 A씨였다.2002년 5월31일 부산 강서구 명지동 해변에서 발견된 마대자루(빨간 원).(사진=연합뉴스)사건은 열흘 전 5월21일로 거슬러 올라가 발생했다. 다방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던 A씨의 퇴근길은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이튿날 말도 없이 다방에 출근하지 않았다. 다방에서 연락해봤지만 닿지 않았다. 가족과 연락도 끊겼다. 혼자 사는 A씨를 걱정한 가족이 집으로 찾아갔지만 만날 수 없었다. 가족이 실종 신고한 지 하루 만에 A씨는 변사체로 발견됐다.A씨 금융거래 내역을 추적하자 사건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실종된 다음날 다방 근처 은행에서 A씨 통장에 있던 저축 약 300만원이 인출됐다. CCTV를 틀어보니 인출자는 A씨가 아닌 의문의 남성이었다. 이어 6월12일, 다시 A씨의 통장에서 500만원이 인출됐다. 이미 A씨는 변사한 채 발견된 뒤였다. 이번에는 신원을 알기 어려운 여성이 돈을 빼 갔다.돈을 찾아간 남성과 여성은 A씨 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됐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신원을 확인할 수 없어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시간이 흘러 살인사건의 공소시효가 폐지됐다. 여기에 발맞춰 경찰은 2015년 미제 전담팀을 꾸리고 A씨 수배 전단을 재배포했다.미제로 묻힐 뻔한 사건은 시민의 제보로 실마리를 잡았다. 경찰은 제보를 토대로 2017년 3월부터 8월까지 용의자 4명을 체포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15년 만이었다.CCTV 화면 속 남성은 양모씨. 수사 결과 양씨는 2002년 5월21일 A씨를 납치해 살해하고 마대자루에 넣어 바다에 유기한 것으로 조사됐다. 양씨는 이튿날 A씨 통장에서 돈을 인출하고, 이후 아는 여성을 시켜서 재차 A씨 통장에서 돈을 빼냈다.사실 양씨가 A씨를 살해한 걸 지목하는 직접 증거는 전혀 없었다. 양씨는 우연히 주운 A씨 가방에 있던 통장으로 돈을 인출한 것뿐이라고 했다. 살인 혐의는 부인했다. 그런데 양씨의 동거녀 진술이 결정적이었다. “물컹한 내용물이 담긴 마대자루 옮기는 걸 도왔다”는 것이다.검찰은 동거녀 진술 등을 토대로 양씨에게 살인 혐의를 적용해 재판에 넘겼다. 양씨를 제외한 나머지 공범은 사기·사문서위조·위조사문서행사 혐의를 받았지만 공소시효가 지나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양씨는 1심에 이어 2심에서 연달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반전은 3심에서 일어났다. 대법원은 양씨의 무기징역 판결을 파기하고 무죄 취지로 사건을 2심으로 내려보냈다. A씨 살인 사건 범인으로 유력하게 의심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닐 수 있는 일말의 여지가 있다는 취지다. 동거녀 진술이 오락가락하고, 공범으로 몰리지 않으려 거짓으로 증언했을 수 있다고 봤다.제삼자 범행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했다. 애초 수사 초기 다방 단골 B씨가 의심을 받았다. B씨는 A씨가 사망 직전에 식사했던 인물인데, 경찰 조사에서 당일 행적을 허위로 진술했다. 공교롭게 A씨가 사망한 이후 연락을 뚝 끊었다. 이후 경찰 수사는 A씨 통장에서 돈을 인출한 이들에게 집중됐고, B씨는 자연스레 용의 선상에서 멀어져갔다.형사 재판은 ‘증거가 의심스러우면 피고인의 이익으로’를 원칙으로 삼는다. 범인 열 명을 놓치더라도 억울한 이를 한 명이라도 만들지 않으려고 경계하는 것이다.파기환송심 재판부는 2019년 7월 양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전재욱 기자 2023.05.31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2002년 5월31일. 부산 강서구 명지동 일대 해변에 마대자루 하나가 밀려왔다. 주변을 지나던 이가 묶인 자루 끈을 풀어보고 까무러쳤다. 자루 안에는 검은 비닐봉지에 싸인 여성의 시신이 들어 있었다. 전날 실종 신고가 접수된 스물두 살 여성 A씨였다.2002년 5월31일 부산 강서구 명지동 해변에서 발견된 마대자루(빨간 원).(사진=연합뉴스)사건은 열흘 전 5월21일로 거슬러 올라가 발생했다. 다방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던 A씨의 퇴근길은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이튿날 말도 없이 다방에 출근하지 않았다. 다방에서 연락해봤지만 닿지 않았다. 가족과 연락도 끊겼다. 혼자 사는 A씨를 걱정한 가족이 집으로 찾아갔지만 만날 수 없었다. 가족이 실종 신고한 지 하루 만에 A씨는 변사체로 발견됐다.A씨 금융거래 내역을 추적하자 사건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실종된 다음날 다방 근처 은행에서 A씨 통장에 있던 저축 약 300만원이 인출됐다. CCTV를 틀어보니 인출자는 A씨가 아닌 의문의 남성이었다. 이어 6월12일, 다시 A씨의 통장에서 500만원이 인출됐다. 이미 A씨는 변사한 채 발견된 뒤였다. 이번에는 신원을 알기 어려운 여성이 돈을 빼 갔다.돈을 찾아간 남성과 여성은 A씨 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됐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신원을 확인할 수 없어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시간이 흘러 살인사건의 공소시효가 폐지됐다. 여기에 발맞춰 경찰은 2015년 미제 전담팀을 꾸리고 A씨 수배 전단을 재배포했다.미제로 묻힐 뻔한 사건은 시민의 제보로 실마리를 잡았다. 경찰은 제보를 토대로 2017년 3월부터 8월까지 용의자 4명을 체포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15년 만이었다.CCTV 화면 속 남성은 양모씨. 수사 결과 양씨는 2002년 5월21일 A씨를 납치해 살해하고 마대자루에 넣어 바다에 유기한 것으로 조사됐다. 양씨는 이튿날 A씨 통장에서 돈을 인출하고, 이후 아는 여성을 시켜서 재차 A씨 통장에서 돈을 빼냈다.사실 양씨가 A씨를 살해한 걸 지목하는 직접 증거는 전혀 없었다. 양씨는 우연히 주운 A씨 가방에 있던 통장으로 돈을 인출한 것뿐이라고 했다. 살인 혐의는 부인했다. 그런데 양씨의 동거녀 진술이 결정적이었다. “물컹한 내용물이 담긴 마대자루 옮기는 걸 도왔다”는 것이다.검찰은 동거녀 진술 등을 토대로 양씨에게 살인 혐의를 적용해 재판에 넘겼다. 양씨를 제외한 나머지 공범은 사기·사문서위조·위조사문서행사 혐의를 받았지만 공소시효가 지나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양씨는 1심에 이어 2심에서 연달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반전은 3심에서 일어났다. 대법원은 양씨의 무기징역 판결을 파기하고 무죄 취지로 사건을 2심으로 내려보냈다. A씨 살인 사건 범인으로 유력하게 의심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닐 수 있는 일말의 여지가 있다는 취지다. 동거녀 진술이 오락가락하고, 공범으로 몰리지 않으려 거짓으로 증언했을 수 있다고 봤다.제삼자 범행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했다. 애초 수사 초기 다방 단골 B씨가 의심을 받았다. B씨는 A씨가 사망 직전에 식사했던 인물인데, 경찰 조사에서 당일 행적을 허위로 진술했다. 공교롭게 A씨가 사망한 이후 연락을 뚝 끊었다. 이후 경찰 수사는 A씨 통장에서 돈을 인출한 이들에게 집중됐고, B씨는 자연스레 용의 선상에서 멀어져갔다.형사 재판은 ‘증거가 의심스러우면 피고인의 이익으로’를 원칙으로 삼는다. 범인 열 명을 놓치더라도 억울한 이를 한 명이라도 만들지 않으려고 경계하는 것이다.파기환송심 재판부는 2019년 7월 양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 유일한 목격자는 숨을 거두고..미제사건 '허양 납치살해'[그해 오늘]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2008년 5월30일 새벽 4시10분께. 대구 달성군 유가면(현 유가읍) 한 민가에 잠을 자던 열한 살 허은정 양은 비명을 듣고 깼다. 소리는 할아버지 방에서 흘러나왔다. 둔탁한 충돌음과 할아버지 신음이 섞여 있었다. 부리나케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괴한 두 명이 70대 할아버지를 폭행하고 있었다.허은정양 납치살해 용의자 수배 전단.허 양이 격렬하게 저항하는 새 함께 잠을 자고 있던 허 양의 동생이 이웃에 달려가 도움을 요청했다. 허사였다. 이웃이 집에 도착해 보니 할아버지만 가쁜 숨을 몰아쉴 뿐 허 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괴한들이 저항하는 허 양을 데리고서 어둠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새벽 여명이 물러가지 않은 시각이라서 목격자도 마땅히 없었다.수사는 면식범의 소행으로 좁혀졌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날 낯선 남자들이 허 양의 집을 기웃거렸다고 한다. 금품을 노린 강도 행각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는 허 양네 집은 형편이 넉넉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폐지를 주워서 생계를 잇는 정도였다. 실제로 당일 도난 당한 물품도 없었다.서로 간에 호칭도 이를 뒷받침했다. 범인들은 할아버지는 “너 같은 XX”라고 했고, 허 양이 범인들에게 저항할 때 “아저씨 왜 그러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모르는 사이보다 아는 사람끼리 주고받는 호칭에 가깝다는 게 전문가 분석이다.유일한 목격자는 허 양의 할아버지의 진술을 토대로 수사기 진행됐다. 그런데 진술이 오락가락해서 용의자를 특정하는 데 애를 먹었다. 수사가 갈피를 못 잡고 2주가 지난 새 허 양이 돌아왔다. 집에서 1.5km 정도 떨어진 야산 등성이에 암매장된 채였다. 주변 지형(야산)을 이용한 걸 보면 동네 주민일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했다. 경찰은 수사를 공개로 전환하고 전국에 몽타주를 뿌렸다.수사는 지지부진했다. 목격자가 유일한 게 컸다. 허 양의 동생도 물론이고 동네 사람 가운데 괴한을 정확히 보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 할아버지의 진술은 여전히 신빙성이 떨어졌다. 범인이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기를 반복했다. 시골 마을에는 CCTV도 없었다.급기야 수사를 원점으로 돌려야 하는 건 아닌지도 몰랐다. 면식범의 소행이라면 할아버지의 진술이 구체적일 법한데 그렇지 않고 오락가락했기 때문이다. 외려 할아버지가 켕기는 사실이 있어서 말을 바꾸는 건 아닌지 하는 시선도 뒤따랐다.허 양의 할아버지는 그해 8월21일 숨을 거뒀다. 지병인 폐렴이 악화한 탓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지 84일 만이었는데 수사는 이렇다 할 진척이 없는 상황이었다. 유일한 목격자가 사라지면서 수사는 미궁 속으로 빠졌다. 사건은 이제껏 미제로 남아 있다.
    전재욱 기자 2023.05.30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2008년 5월30일 새벽 4시10분께. 대구 달성군 유가면(현 유가읍) 한 민가에 잠을 자던 열한 살 허은정 양은 비명을 듣고 깼다. 소리는 할아버지 방에서 흘러나왔다. 둔탁한 충돌음과 할아버지 신음이 섞여 있었다. 부리나케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괴한 두 명이 70대 할아버지를 폭행하고 있었다.허은정양 납치살해 용의자 수배 전단.허 양이 격렬하게 저항하는 새 함께 잠을 자고 있던 허 양의 동생이 이웃에 달려가 도움을 요청했다. 허사였다. 이웃이 집에 도착해 보니 할아버지만 가쁜 숨을 몰아쉴 뿐 허 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괴한들이 저항하는 허 양을 데리고서 어둠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새벽 여명이 물러가지 않은 시각이라서 목격자도 마땅히 없었다.수사는 면식범의 소행으로 좁혀졌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날 낯선 남자들이 허 양의 집을 기웃거렸다고 한다. 금품을 노린 강도 행각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는 허 양네 집은 형편이 넉넉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폐지를 주워서 생계를 잇는 정도였다. 실제로 당일 도난 당한 물품도 없었다.서로 간에 호칭도 이를 뒷받침했다. 범인들은 할아버지는 “너 같은 XX”라고 했고, 허 양이 범인들에게 저항할 때 “아저씨 왜 그러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모르는 사이보다 아는 사람끼리 주고받는 호칭에 가깝다는 게 전문가 분석이다.유일한 목격자는 허 양의 할아버지의 진술을 토대로 수사기 진행됐다. 그런데 진술이 오락가락해서 용의자를 특정하는 데 애를 먹었다. 수사가 갈피를 못 잡고 2주가 지난 새 허 양이 돌아왔다. 집에서 1.5km 정도 떨어진 야산 등성이에 암매장된 채였다. 주변 지형(야산)을 이용한 걸 보면 동네 주민일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했다. 경찰은 수사를 공개로 전환하고 전국에 몽타주를 뿌렸다.수사는 지지부진했다. 목격자가 유일한 게 컸다. 허 양의 동생도 물론이고 동네 사람 가운데 괴한을 정확히 보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 할아버지의 진술은 여전히 신빙성이 떨어졌다. 범인이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기를 반복했다. 시골 마을에는 CCTV도 없었다.급기야 수사를 원점으로 돌려야 하는 건 아닌지도 몰랐다. 면식범의 소행이라면 할아버지의 진술이 구체적일 법한데 그렇지 않고 오락가락했기 때문이다. 외려 할아버지가 켕기는 사실이 있어서 말을 바꾸는 건 아닌지 하는 시선도 뒤따랐다.허 양의 할아버지는 그해 8월21일 숨을 거뒀다. 지병인 폐렴이 악화한 탓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지 84일 만이었는데 수사는 이렇다 할 진척이 없는 상황이었다. 유일한 목격자가 사라지면서 수사는 미궁 속으로 빠졌다. 사건은 이제껏 미제로 남아 있다.
  • '배고파서 그랬어요'..수락산 女등산객 피살[그해 오늘]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2016년 5월29일 아침 이른 시각 5시20분. 서울 노원구 수락산 등산로에서 50대 여성이 숨진 채 발견됐다. 피해자는 흉기로 급소를 공격당해 절명했다. 인적이 드물고 CCTV도 없던 차에 수사는 미궁이었다. 같은 날 저녁 60대 남성이 경찰서에 나타나면서 해결됐다. 이 남성은 “내가 범인”이라고 했다.김학봉(사진=연합뉴스)범인 김학봉은 그해 1월 출소한 강력 전과를 가진 인물이다. 2001년 경북 청도군에서 강도 살인 혐의로 15년 형을 선고받고 이때까지 만기 복역했다. 출소하고 넉 달 만에 또다시 범행을 저지른 이유는 “배가 고파서 (돈을 빼앗아) 밥을 사 먹으려고”(경찰 진술)였다. 출소하고 유랑하며 소일거리로 연명하던 차에 범행을 계획했다. 애초 금품만 빼앗으려고 했으나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반항하자 살해했다고 한다.김은 조사를 받으면서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애초 ‘처음 만나는 사람을 살해하려고 했다’고 진술해 ‘묻지마 살인’이 의심됐다. ‘두 명을 더 죽이려고 했다’는 취지의 진술도 했다. 나중에 경찰과 언론에서 이 말을 번복했다. “홧김에 했던 말”이라는 것이다. 현장 검증 당시는 유족에 “죄송하다”고 했다.김학봉의 언행과 감정 기복은 앓고 있던 조현병과 연관있다. 김은 1990년대까지 알코올 중독과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이런 이유에서 2001년 강도 살인죄 재판에서 심신 미약 판정을 받아 양형에 반영됐다.그렇기에 수락산 범행을 예방했을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제기됐다. 앞선 재판을 받을 당시 정교하게 정신 감정이 이뤄졌으면 치료 감호 처분까지 뒤따랐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감정이 불발하면서 자연스레 치료 감호 명령도 뒤따르지 않았다. 치료감호는 심신미약자 등을 시설에서 치료하고 사회로 복귀하도록 돕는 제도다.결국 15년 징역을 사는 동안은 물론 출소하고서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 수락산 범행을 저지르기 직전에도 전조는 있었다. ‘환청이 들린다’고 호소하고 정신병원에서 처방약을 받았다.이번 재판에서도 김은 다시 심신 미약을 주장했다. 정식으로 이뤄진 정신감정 결과는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있다’는 취지였다. 김이 빠져나갈 여지가 없었다. 검찰은 법정최고형 사형을 구형했다. 범행 수법이 잔인한 데다가 피해자 유족이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점 등을 고려한 결정이었다.법원은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생명을 박탈하기보다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해 잘못을 참회하고 속죄하며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했다. 유족이 반발하고 검찰이 항소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무기징역 판결은 항소심에서 확정됐다.
    전재욱 기자 2023.05.29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2016년 5월29일 아침 이른 시각 5시20분. 서울 노원구 수락산 등산로에서 50대 여성이 숨진 채 발견됐다. 피해자는 흉기로 급소를 공격당해 절명했다. 인적이 드물고 CCTV도 없던 차에 수사는 미궁이었다. 같은 날 저녁 60대 남성이 경찰서에 나타나면서 해결됐다. 이 남성은 “내가 범인”이라고 했다.김학봉(사진=연합뉴스)범인 김학봉은 그해 1월 출소한 강력 전과를 가진 인물이다. 2001년 경북 청도군에서 강도 살인 혐의로 15년 형을 선고받고 이때까지 만기 복역했다. 출소하고 넉 달 만에 또다시 범행을 저지른 이유는 “배가 고파서 (돈을 빼앗아) 밥을 사 먹으려고”(경찰 진술)였다. 출소하고 유랑하며 소일거리로 연명하던 차에 범행을 계획했다. 애초 금품만 빼앗으려고 했으나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반항하자 살해했다고 한다.김은 조사를 받으면서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애초 ‘처음 만나는 사람을 살해하려고 했다’고 진술해 ‘묻지마 살인’이 의심됐다. ‘두 명을 더 죽이려고 했다’는 취지의 진술도 했다. 나중에 경찰과 언론에서 이 말을 번복했다. “홧김에 했던 말”이라는 것이다. 현장 검증 당시는 유족에 “죄송하다”고 했다.김학봉의 언행과 감정 기복은 앓고 있던 조현병과 연관있다. 김은 1990년대까지 알코올 중독과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이런 이유에서 2001년 강도 살인죄 재판에서 심신 미약 판정을 받아 양형에 반영됐다.그렇기에 수락산 범행을 예방했을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제기됐다. 앞선 재판을 받을 당시 정교하게 정신 감정이 이뤄졌으면 치료 감호 처분까지 뒤따랐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감정이 불발하면서 자연스레 치료 감호 명령도 뒤따르지 않았다. 치료감호는 심신미약자 등을 시설에서 치료하고 사회로 복귀하도록 돕는 제도다.결국 15년 징역을 사는 동안은 물론 출소하고서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 수락산 범행을 저지르기 직전에도 전조는 있었다. ‘환청이 들린다’고 호소하고 정신병원에서 처방약을 받았다.이번 재판에서도 김은 다시 심신 미약을 주장했다. 정식으로 이뤄진 정신감정 결과는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있다’는 취지였다. 김이 빠져나갈 여지가 없었다. 검찰은 법정최고형 사형을 구형했다. 범행 수법이 잔인한 데다가 피해자 유족이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점 등을 고려한 결정이었다.법원은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생명을 박탈하기보다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해 잘못을 참회하고 속죄하며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했다. 유족이 반발하고 검찰이 항소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무기징역 판결은 항소심에서 확정됐다.
  • 손발묶인 치매노인 잠든 요양병원 방화..28명 사상 참사[그해 오늘]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2014년 5월28일 새벽 0시27분께. 전남 장성군 삼계면에 있는 병원에 화재가 발생했다는 신고가 119에 접수됐다. 초동 대응이 빨랐던 터에 불은 진화를 시작한 지 수분 만에 진압됐다. 그런데 결과는 28명이 사상하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한 달여가 지나 또다시 터진 초대형 참사였다.체포된 방화범 김모씨.(사진=연합뉴스)불이 난 병원은 효사랑요양병원. 대부분 거동이 불편하거나 치매 질환을 앓는 60~90대 노인이 요양 치료를 위해 입원해 있었다. 의료진만 127명에 이르는 정부인증 의료기관으로 선정된 규모가 있는 요양병원이었다.사건이 발생한 당시 환자 324명이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불이 시작된 지점은 병원 별관 2층. 2층에는 환자 34명이, 1층에는 환자 44명이 입원한 상태였다. 의료인력이 부족한 모두가 잠든 새벽에, 거동이 불편하고 상황 판단이 더딘 노인들은 무방비 상태로 화재에 노출됐다. 소방당국이 신속하게 화재를 진압했지만 안타까운 희생이 커진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결국 이 불로 환자(21명)와 간호조무사 22명이 숨지고 6명이 다쳤다.화재는 방화였다. 범인은 이 병원에 입원한 80대 남성 김모씨. 발화 지점 별관 다용도실에 김씨가 들어갔다가 나온 직후에 불이 시작된 사실이 CCTV로 드러났다. 범행 한 달 전쯤 입소한 김씨는 주변 환자와 의료진과 갈등이 컸던 것으로 전해졌다. 평소 “가족이 강제로 수면제를 먹여 입원시켰다”는 주장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김씨는 현존건조물방화치사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재판에서 자신은 치매 환자라서 상황을 판단할 능력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CCTV 화면을 보면 범행 당시 간호조무사의 눈을 피하고, 범행 도구인 라이터를 현장에 버리는 모습이 찍혔다. 정상적인 인지능력을 가진 상태에서 의도적으로 벌인 범행이었다. 1심은 징역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형량이 너무 무겁다고 항소한 김씨는 항소심 재판 중에 노환으로 사망했다.병원 측은 화를 키운 측면이 있었고, 이후에도 증거를 감추려고 시도했다. 현행법상 갖춰야 하는 소방 시설이 허술했다. 유족은 희생자의 사진을 공개하고 손목과 발목에 결박 흔적이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환자의 정형 행동이나 자해 등을 방지할 목적으로 병원이 편의상 손발을 묶었다는 것이다. 최소한 환자 2명이 결박 상태였던 것으로 조사됐다. 대피와 구조가 늦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잘잘못을 가리려는 수사가 시작되자 주요 증거를 없앴다.병원 이사장은 징역 3년이 확정됐다. 증거를 없애라고 지시하고 수행한 병원 관계자는 징역형의 집행유예와 벌금형을 받았다.이후 의료시설에 대한 소방 방재 체계를 강화하려는 움직임 일었다. 그러나 2018년 1월26일 발생한 밀양 세종병원 화재(누전)로 47명이 사망하고 112명이 부상했다. 입원 환자 가운데 요양시설 입소자의 피해가 컸다. 병원에는 스프링쿨러가 설치돼 있지 않았다.
    전재욱 기자 2023.05.28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2014년 5월28일 새벽 0시27분께. 전남 장성군 삼계면에 있는 병원에 화재가 발생했다는 신고가 119에 접수됐다. 초동 대응이 빨랐던 터에 불은 진화를 시작한 지 수분 만에 진압됐다. 그런데 결과는 28명이 사상하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한 달여가 지나 또다시 터진 초대형 참사였다.체포된 방화범 김모씨.(사진=연합뉴스)불이 난 병원은 효사랑요양병원. 대부분 거동이 불편하거나 치매 질환을 앓는 60~90대 노인이 요양 치료를 위해 입원해 있었다. 의료진만 127명에 이르는 정부인증 의료기관으로 선정된 규모가 있는 요양병원이었다.사건이 발생한 당시 환자 324명이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불이 시작된 지점은 병원 별관 2층. 2층에는 환자 34명이, 1층에는 환자 44명이 입원한 상태였다. 의료인력이 부족한 모두가 잠든 새벽에, 거동이 불편하고 상황 판단이 더딘 노인들은 무방비 상태로 화재에 노출됐다. 소방당국이 신속하게 화재를 진압했지만 안타까운 희생이 커진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결국 이 불로 환자(21명)와 간호조무사 22명이 숨지고 6명이 다쳤다.화재는 방화였다. 범인은 이 병원에 입원한 80대 남성 김모씨. 발화 지점 별관 다용도실에 김씨가 들어갔다가 나온 직후에 불이 시작된 사실이 CCTV로 드러났다. 범행 한 달 전쯤 입소한 김씨는 주변 환자와 의료진과 갈등이 컸던 것으로 전해졌다. 평소 “가족이 강제로 수면제를 먹여 입원시켰다”는 주장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김씨는 현존건조물방화치사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재판에서 자신은 치매 환자라서 상황을 판단할 능력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CCTV 화면을 보면 범행 당시 간호조무사의 눈을 피하고, 범행 도구인 라이터를 현장에 버리는 모습이 찍혔다. 정상적인 인지능력을 가진 상태에서 의도적으로 벌인 범행이었다. 1심은 징역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형량이 너무 무겁다고 항소한 김씨는 항소심 재판 중에 노환으로 사망했다.병원 측은 화를 키운 측면이 있었고, 이후에도 증거를 감추려고 시도했다. 현행법상 갖춰야 하는 소방 시설이 허술했다. 유족은 희생자의 사진을 공개하고 손목과 발목에 결박 흔적이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환자의 정형 행동이나 자해 등을 방지할 목적으로 병원이 편의상 손발을 묶었다는 것이다. 최소한 환자 2명이 결박 상태였던 것으로 조사됐다. 대피와 구조가 늦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잘잘못을 가리려는 수사가 시작되자 주요 증거를 없앴다.병원 이사장은 징역 3년이 확정됐다. 증거를 없애라고 지시하고 수행한 병원 관계자는 징역형의 집행유예와 벌금형을 받았다.이후 의료시설에 대한 소방 방재 체계를 강화하려는 움직임 일었다. 그러나 2018년 1월26일 발생한 밀양 세종병원 화재(누전)로 47명이 사망하고 112명이 부상했다. 입원 환자 가운데 요양시설 입소자의 피해가 컸다. 병원에는 스프링쿨러가 설치돼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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