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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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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오늘

  • ‘8월10일’ 우장춘 박사 별세…매국노가 낳은 애국자[그해 오늘]
    전재욱 기자 2022.08.10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1895년 10월8일 명성황후가 일본인 잡배의 칼에 시해된,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경복궁 빗장이 쉽게 풀인 데에는 조선인 조력자 역할이 컸다. 대표 인물이 조선군 훈련대 2대대장 우범선이다. 여러 매국 행위는 차치하고, 살해된 명성황후 얼굴을 보고 신원을 확인한 인물로 기록된다. 사변 이듬해 우범선은 일본으로 달아났다. 거기서 부인을 만나 자식까지 뒀으나 말년은 비참했다. 늘 살해 위협에 시달렸고 실제로 살해당해 생을 마감했다.우장춘 박사.부친을 여섯 살에 여읜 우범선의 아들은 총명했다. 1898년 일본에서 나고자라 1916년 도쿄제국대 농과대학에 입학했다. 학적부에 올린 그의 이름은 우장춘. 훗날 해방 이후 대한민국 농업의 토대를 닦은 우장춘 박사다.박사는 일찌감치 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도쿄제국대 박사 학위를 받은 1935년 발표한 논문(Triangle of U)은 그에게 명성을 안겼다. 그럼에도 학계에서 요직이 아닌 한직을 돌았다. 조선인 출신 한계를 극복하기 어려웠다. 결국 1937년 기업으로 옮겨가 연구를 이어갔다. 이 와중에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 항복을 선언했다.해방된 대한민국은 우장춘 박사 귀국을 추진했다. 직면한 식량 문제를 해결하려면 농업 생산량을 끌어올려야 했다. 육종과 육묘를 아는 인재가 필요했다. 우 박사가 적임자였다. 그는 일본의 갖은 회유를 뒤로한 채 1950년 한국 땅을 밟았다. 언젠가는 조국에 봉사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귀국은 대학 시절 만난 한국인 유학생이자 독립운동가이며 친구인 김철수 영향이 컸다. 그로부터 부친의 매국 행적을 접했다. 속죄하려면 조국에 봉사하고 성씨를 유지해야 한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일본 국적이면서 조선인으로서 냉대를 받으면서까지 성씨를 바꾸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가 크다.젊은 시절 우장춘 박사.(사진=농촌진흥청)귀국 첫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장교로 입대해 소령으로 예편했다. 이후 초대 중앙원예기술원장(1953~1957년)과 초대 농사원 원예시험장장(1957~1959년)을 지냈다. 농업 생산량을 끌어올리고자 주력했다. 외국 종자가 한국 환경에서도 잘 자라게 개량하는 데 애썼다. 벼와 감자, 무, 배추 등이 그의 손을 거쳐 자라났다. 남부와 제주 지역에 감귤 재배를 시도해 지금의 산업 기틀을 닦았다.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이 아니다. 육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씨 없는 수박 얘기를 했던 게 와전된 것으로 풀이된다.한국 생활도 일본에서처럼 쉽지 않았다. 서투른 한국어 탓에 일본인이라는 오해를 샀다. 일본에서는 조선인이라고 차별을 받았는데 마찬가지였다. 우범선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도 붙어 다녔다. 일본에 두고 온 모친이 사망했으나 빈소를 지키지 못했다. 한국 정부는 그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우려해 출국을 금지했다.1959년 8월10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61세.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렀다. 정부는 그에게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했다.
  • ‘8월9일’ 손기정과 황영조, 놀라운 평행이론[그해 오늘]
    전재욱 기자 2022.08.09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마라톤 영웅 손기정옹은 첫 풀 코스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1935년 도쿄메이지 신궁대회에서 2시간26분42초로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인류 마라톤 사상 처음으로 2시간30분대에 진입한 기록이다. 당연히 세계 신기록이었다. 대회가 비공인인 탓에 공식 기록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의 나이 23세 때였다.1936년 8월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주에서 역주하는 손기정(왼쪽) 옹과 1992년 8월9일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경주에서 결승선에 골인하는 황영조 선수.이듬해 일본 올림픽대표 선수로 베를린 마라톤에 출전했다. 양정고등보통학교 동기 남승룡 선수도 함께였다. 둘은 조국을 잃은 탓에 가슴에 태극기 대신 일장기를 달았다. 한국인으로서 일본 대표에 선발된 것 자체가 실력을 대변한다. 일본도 일인을 올림픽에 출전시키고 싶었다. 오죽하면 변칙을 쓰면서까지 둘을 떨어뜨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선발 대회에서 끝까지 손 옹과 남 옹의 등을 바라보면서 뛰어야 했다.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수상대에 오른 손기정(가운데) 옹. 가슴의 일장기를 꽃으로 가렸다.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가 열린 1936년 8월9일. 손 옹이 우승했다. 한국인 최초로 딴 올림픽 메달이 금메달이었다. 기록은 2시간 29분 19초. 남 옹은 3위로 골인했다. 값진 동메달이었다. 그러나 메달은 일본에 돌아갔다. 두 사람이 나라를 잃은 터였다. 메달 시상대에 고개를 숙이고서 찍은 사진은 심정을 대변한다. 동아일보는 손 옹의 가슴에 일장기를 지운 채 신문을 발행했다 정간당했다. 한국이 올림픽에서 첫 금메달을 따는 데에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레슬링 양정모)까지 40년이 걸렸다.손 옹이 여한을 푼 것은 1992년 8월9일이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경기가 열린 날이다. 1위로 달리던 한국 마라톤 대표 황영조 선수가 막판 난코스 `몬주익 언덕`에서 치고 나갔다. 2위와 격차가 계속 벌어지기 시작했다. 결과는 황 선수 우승이었다. 손 옹이 금메달을 딴 56년 전 같은 날이었다. 공교롭게도 황 선수 뒤를 이어 일본인 선수가 2위로, 독일인 선수가 3위로 각각 시상대에 올랐다. 1936년 손 옹이 올림픽에서 우승할 당시 관여한 3개국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황영조(왼쪽) 선수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을 차지한 이후 손기정 옹을 안고 있다.(사진=연합뉴스)손 옹은 당시 동아일보에 보낸 기고문에서 `지난 56년간 나를 지탱해왔던 단 하나의 꿈이 바로 한국 마라톤의 올림픽 제패였다. (중략) 그리고 나는 나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보았다`고 했다. 감명은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끝나고 10년간 이어졌다. 2002년 11월15일 향년 90세로 눈을 감았다.
  • `자승자박` 박정희정권 옭아맨 김대중 납치사건[그해 오늘]
    김영환 기자 2022.08.08
    [이데일리 김영환 기자] 1973년 8월8일, 일본의 수도 도쿄 한복판에서 백주대낮인 오후 1시에 재야 정치인 김대중이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중정)에 납치됐다. 유신체제를 반대하던 야권 정치인을 향한, 명백한 대한민국 정부의 테러였다.일본에서 납치 이후 한국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모습(사진=김대중도서관)도쿄 치요다구 소재 그랜드 팔레스 호텔 가장 위층인 2212호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일본 정치인과 약속을 위해 나서던 김대중을 한국인 괴한 5명이 납치했다. 이 호텔은 일왕궁 옆 도쿄의 한복판에 위치했다. 이 곳에서 납치가 이뤄진 것이다.김대중은 박정희의 유신 선포로 망명을 결심하고 일본에서 반정부 투쟁에 나섰다. 박정희를 위협할 만큼 정치적으로 성장한 김대중을 제거하기 위해 중정이 나서서 그를 납치하고 죽이려했다.납치된 김대중은 공작선 용금호에 태워져 먼 바다로 나아갔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간과한 게 있었다. 김대중의 위치를 미국 CIA가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대한해협에 있던 김대중을 미상의 비행기가 찾아냈고 납치 129시간 만에 김대중은 서울 동교동 자택에서 풀려났다.워낙 국제적 지탄을 받은 사안이고 이해관계가 엇갈려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사건이다. 용금호를 찾아낸 비행기의 국적조차도 알려지지 않았다. 미국과 일본 모두 부인하고 있다.무엇보다 납치를 지시한 상부가 어디인지조차 엇갈린다. 최고 권력자였던 박정희는 물론이고 중정 부장이었던 이후락도 명확한 진술을 하지 않았다. 이후락은 박정희의 지시를 암시했다가 추후 말을 바꿨다. 다만 중정이 깊숙하게 관여했던 것은 확실하다.살인 미수에 그친 납치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은 안팎에서 지탄의 대상이 됐다. 대학을 중심으로 유신반대운동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했고 종교인들도 개헌 청원에 나서는 등 반발이 거세졌다.국제적 위신도 땅에 떨어졌다. 당장 일본부터 주권 침해를 당했다는 여론이 거세지며 한일관계가 악화했다. 북한도 남북 대화 중단을 선언했고 미국 역시 박정희 정권을 압박했다. 여담이지만 이 사건에 가담한 김기완 전 주일대사는 훗날 주한 미국대사로 부임하는 성김의 부친이다.김대중은 사건이 발생한 지 두 달 후에 “박 대통령이 지금 하고 있는 정치, 이래가지고는 절대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을 강력히 가지고 있다”면서도 “박 대통령을 포함해서 어떤 개인에 대해서도 내가 개인적인 원한이라던가 어떤 복수심은 영원히 갖지 않겠다”고 밝혔다.
  • `8월7일` 뽀뽀뽀 폐지…32년간 아이 모닝콜[그해 오늘]
    전재욱 기자 2022.08.07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1993년 4월 어느 맑은 날. 서울 여의도 문화방송(MBC) 사옥 앞으로 시위대 150여명이 몰려갔다. 눈빛에서는 비장함마저 읽혔는데, 행색을 보니 어째 위협적이기는커녕 귀엽기가 그지없다. 곧이어 가투의 핵심인 시위가가 뒤따랐다.`아빠가 출근할 때 뽀뽀뽀. 엄마가 안아줘도 뽀뽀뽀. 만나면 반갑다고 뽀뽀뽀. 헤어질 때 또 만나요 뽀뽀뽀. 우리는 귀염둥이 뽀뽀뽀 친구. 뽀뽀뽀 뽀뽀뽀 뽀뽀뽀 친구`1993년 4월17일 MBC 앞에 모인 ‘뽀뽀뽀’ 시위대.(사진=1993년 4월20일자 동아일보)엄마 손을 잡은 어린이들은 팔뚝질을 하며 “뽀뽀뽀를 돌려달라”고 외쳤다. 어린이 방송 프로그램 ‘뽀뽀뽀’가 봄 개편으로 평일 방송이 사라진 데 대한 항의였다. 당시 MBC는 월~금 매일 아침 20분씩 하던 뽀뽀뽀 방송(총 100분)을 토요일 1회에 50분으로 절반을 줄였다.파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시청자 권익 운동으로 확장하면서 시민단체까지 나섰다. 서울 YMCA 시청자시민운동본부는 각계 전문가를 모아 공청회를 열고 ‘방송이 공익성을 무시한 사례’라고 공세를 폈다. 개편이 시청률을 의식한 결과라는 것이다. 사익을 위해 공익인 어린이의 시청권을 제한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게 요지다.당연히 MBC에는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백기를 들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해 가을 가편에서 뽀뽀뽀는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뽀뽀뽀는 MBC에서 1981년 5월25일 시작한 어린이용 방송 프로그램이다. MBC가 아침방송(6~10시) 부활을 기념해 내놓은 야심작이었다. 1973년 석유 파동 이후 에너지 절약을 위해 아침방송을 폐지한 지 7년5개월만이었다.당시만 해도 어린이용 프로그램이 전무하다시피했고 자체 제작한 콘텐츠도 적었다. 뽀뽀뽀는 등장과 함께 전격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출시 첫해 아침방송 시청률 조사에서 11위에 올랐다.1985년 뽀뽀뽀 시작 영상.(사진=MBC)뽀뽀뽀는 스타의 등용문이었다. 프로그램 진행자 `뽀미 언니`는 여성 방송인에게 최고의 자리로 평가됐다. 초대 왕영은을 비롯해 방송인 최유라, 배우 장서희·이의정·조여정, 뮤지컬배우 최정원이 뽀미언니를 거쳐 간 인물이다. 뽀뽀뽀를 거친 아역 배우 가운데 가수 권지용(지드래곤), 배우 이세영·류덕환이 유명하다.프로그램도 세월을 탔다. 어린이 교육용 콘텐츠가 다양하게 생산돼 여러 채널로 확산하자 위치가 예전만 못했다. MBC는 2013년 8월7일 7775회를 끝으로 더는 뽀뽀뽀를 편성하지 않았다. 이후 2020년 7월 부활한 뽀뽀뽀가 방영 중이지만 초기 프로그램 방송을 중단한 것은 32년2개월여만에 처음이었다.당시 MBC는 `교육 환경을 비롯한 삶의 전반이 다변화하면서 유아 교육 프로그램 역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할 단계`라고 설명했다. 1993년 MBC에 공세를 폈던 서울YMCA 시청자시민운동본부는 다시 성명을 내고 뽀뽀뽀 폐지를 반대했다.
  • `리틀보이` 원폭 피해본 日, 오염수 방류 계획 `착착`[그해 오늘]
    김영환 기자 2022.08.06
    [이데일리 김영환 기자]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리틀보이`가 떨어졌다. 인류 역사상 첫 원자폭탄의 사용이었다. 반인륜적이었다. 7만명이 즉사했고 20만명이 사망에 이르렀다. 한국인도 3만명이나 포함됐다. 당시 히로시마 인구는 35만명 수준이었다. 1945년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이 만들어 낸 버섯 구름(사진=연합뉴스)미국이 일본에 떨어뜨린 두 발의 원자폭탄으로 인해 전범국 일본은 피해자의 가면을 뒤집어썼다. 사흘 뒤 나가사키에 투하된 또 다른 원자폭탄 `팻맨` 이후 일왕은 항복 선언을 했다. 원자폭탄으로부터 인류 문명 파괴를 막겠다는 황당한 사유를 대면서.이 두 발의 원자폭탄으로 인한 사망자 집계는 어려움이 따른다. 피폭 이후 수년에서 십수년이 지나서 질환을 얻는 경우 조사가 여의치 않다. 이런 후발성 장애를 아우르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는 70만명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2011년 3월 11일 발생한 지진과 쓰나미로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했다. 일본은 11년이 지난 현재도 사고를 수습 중이다. 지난 4일 후쿠시마에 쌓아둔 오염수를 방출할 시설 공사에 착공하면서 일본은 이 물을 바다에 흘려보낼 계획에 돌입했다. 계획대로라면 이 시설은 내년 6월 완공, 여름부터 본격적으로 방류를 시작한다.후쿠시마 제1원전에는 현재 다핵종 제거설비(ALPS)로 정화한 오염수 130만t 이상을 보관하고 있다. 도쿄전력은 오염수를 정화하면 세슘을 비롯한 62가지 방사성 물질을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삼중수소(트리튬), 미량의 핵종 등은 걸러지지 않는다. 오염수 방출의 위협은 누구도 계산할 수 없다.당장 한국, 중국, 대만은 물론 일본 내에서도 반대 의견이 나온다. 일본 전국어업협동조합연합회는 “전국 어업 종사자와 국민 이해를 얻을 수 없는 해양 방류에 단호히 반대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한국과 중국 정부도 지난달 일본의 오염수 방류 계획 정식 인가 이후 해양 방출 영향에 대한 우려를 일본에 전달했다.
  • `8월5일` 조선왕조 오백년 시작…장수에서 왕으로[그해 오늘]
    전재욱 기자 2022.08.05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원나라가 멸하고 명나라가 건국한 1368년. 고려는 곧장 명과 국교를 맺고 조공을 바쳤다. 외교적으로 어색한 처지를 모면하는 차원이 컸다. 원이 번성할 때 득세한 친원파가 고려 정권 유지에 기여해온 탓이다. 그럼에도 명은 노골적으로 고려에 복속을 압박했다. 고려 철령 이북 영토를 명의 지배에 두고자 했다. 한때 원이 이 지역을 점령했으니 다시 돌려달라는 것이다. 1388년 명은 이 지역을 관장할 기구 철령위(鐵嶺衛)를 요동에 설치하려고 준비한다.조선태조어진 (朝鮮太祖御眞).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초상화.(사진=문화재청)고려는 이를 침략으로 규정하고 역공에 나선다. 우왕과 최영은 압록강 이북의 요동을 먼저 정벌하기로 계획을 수립한다. 정벌군의 주축은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우군도통사 이성계였다. 이성계는 우왕이 반대파를 숙청하고 정권을 쥐는 과정에서 최영과 함께 지지세력에 섰던 인물이다. 1388년 5월 출정을 떠난 두 사람은 6월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진을 친다. 지금의 신의주와 단둥 사이 압록강 한복판에 있는 섬이다. 그러나 큰비로 물이 불어나고 강을 건너지 못한 상태에서 장마가 겹쳤다.이성계는 우왕과 최영 지휘부가 있는 평양으로 파발을 띄워 `회군`을 요청했다. 요동까지 가려면 압록강을 건너 크고 작은 강을 지나야 하는데, 시기상 어렵다는 게 이유였다. 조민수도 이성계와 뜻을 함께했다. 우왕과 최영은 회군을 물리치고 진군을 명령했다. 위화도의 이성계는 재차 회군 요청을 하지만 이번에도 막혔다. 이성계는 말머리를 돌려 평양을 거쳐 개경으로 갔다. 우왕과 최영은 응수하지 못하고 패배했다.정권을 잡은 이성계는 전권을 행사했다. 사실상 자신이 만든 창왕과 공양왕을 차례로 왕위에 올리고 폐위시킨 끝에, 1392년 8월5일(음력 7월17일) 스스로 왕에 오른다. 공양왕으로부터 옥새를 넘겨받는 것으로 왕권이 넘어갔다. 이듬해 2월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고, 1394년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다.조선은 유교를 받들고 불교를 누르는 숭유억불(崇儒抑佛)을 지향하고 성리학을 장려했다. 중앙집권 체제를 공고히 하고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정치를 펴나갔다. 세종 시기 문화와 예술, 과학 방면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뤘다. 한글 창제는 으뜸으로 꼽힌다. 임진왜란(1592~1598년)과 병자호란(1636~1637년) 등 국란으로 이어진 외세의 침략에 굴하지 않고 주권을 지켰다.북중이 접경한 압록강 하류 지역에 위치한 위화도(빨간 원).(사진=구글 지도)조선 후기로 갈수록 조정의 암투, 관리의 부패, 계급 간 불화로 혼란을 겪었다. 상업화가 이뤄지면서 힘을 기른 민간 세력은 왕권을 위협했다. 중앙권력의 위상이 흔들리면서 국력은 쇠하기 시작했다. 결국, 1910년 일제 침략에 무너져내렸다. 이성계가 왕에 오른 지 518년 만이고, 1897년 대한제국이 건국한 지 13년 만이다.돌이켜보면 고려는 철령위를 명분으로 출정군을 일으켰고, 이성계는 출정군을 거느리고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이로써 정권을 쥐고 왕위에 올라 조선을 설립해, 조선왕조는 500년 넘게 이어졌다. 역사적 평가는 갈리지만, 명이 철령위를 설치하는 이유는 고려를 복속시키려는 게 아니라 북진을 막으려는 차원이라는 해석이 붙는다.
  • `8월4일` 내귀에 도청장치 방송사고..MBC 최악의 빌런[그해 오늘]
    전재욱 기자 2022.08.04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응답하라 1988`에서 덕선이네 가족이 TV로 뉴스를 보다 말고 놀라는 장면이 나온다.`귓속에 도청 장치가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 귓속에 도청 장치가 들어 있습니다.`1988년 8월4일 문화방송 뉴스데스크 와중에 일어난 방송사고 장면.(사진=MBC)드라마적 설정이 아니라 실제로 그해 8월4일 일어난 방송 사고다. 문화방송(MBC) 뉴스데스크 생방송 스튜디오에 난입한 A씨가 강성구 앵커의 마이크를 빼앗고 별안간 이렇게 외친 것이다. 부리나케 뛰어든 진행요원에게 이끌려 화면 밖으로 나가는 장면까지 고스란히 방송을 탔다. 이튿날 신문에까지 보도될 정도로 당시까지만 해도 사상 최악의 방송사고로 기록됐다.A씨 귀에는 실제로 도청장치가 없었다. 그는 당시 고막을 다쳐 치료를 받는 와중에 이명을 겪었다. 치료해도 차도가 없자 병원에서 자기 귀에 도청장치를 달았다는 망상에 빠졌다고 한다. 경찰 조사에서 A씨는 “오른쪽 귀에 도청장치가 있어 진동음으로 평소 고통이 심한데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못해 방송국에 호소하러 갔다”는 취지로 진술했다.‘내귀에 도청장치’ 방송사고는 신문에까지 보도될 정도로 역대 최악의 방송사고로 기록된다. 당시 소식을 실은 한겨레 신문 보도.(사진=네이버 라이브러리 캡쳐)방송사고는 예고된 순서였다. A씨는 그해 7월 18일 `주부가요열창` 녹화에서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고 30일 생방송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무대에 올라 소리를 질러 진행을 방해했다. 두 차례 예행을 거쳐 8월4일 거사를 일으킨 것이다.이후에도 A씨는 MBC에 빌런 같은 존재였다. 희대의 방송사고가 일어난 이듬해 1989년 A씨는 다시 MBC 방송에 뛰어들었다. 12월2일 명동 제일백화점 앞에서 진행된 MBC `여론광장` 생방송에서 아나운서 마이크를 빼앗으려다가 저지당하는 장면이 또 방송 전파를 탔다. 화들짝 놀란 카메라가 앵글을 바꿨지만 피하지 못했다.그의 기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89년 9월 서울대에서 학생과 경찰이 대치하는 와중에 그가 알몸으로 등장했다. 양말과 구두를 제외하고 모두 벗은 채였다. 거기서도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는 주장을 했다. 행인 시선이 A씨에게 쏠리자 데모의 이목을 끌지 못한 시위가 그쳤다고 한다. 1991년 3월은 연세대학교 도서관 앞에 다시 알몸으로 등장해 같은 소리를 했다.
  • '8월3일' 난초 가득하던 '꽃섬', 쓰레기섬이 되다[그해 오늘]
    한광범 기자 2022.08.03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1978년 8월 3일. 철 따라 온갖 꽃이 만발한다 하여 ‘꽃섬’으로 불리던, 서울 서북부의 난지도가 서울의 쓰레기 매립장으로 지정됐다.많은 이들에게 ‘쓰레기섬’으로 기억되는 난지도는 원래 풍경이 아름다운 섬으로 이름을 날렸다. 한강 지류인 모래내와 홍제천, 불광천이 물머리를 맞대고 들어오는 한강 하류 저지대에 흙모래가 쌓여 자연스레 만들어진 섬에 난초와 지초가 자라며 이름도 ‘난지도’(蘭芝島)가 됐다.쓰레기 매립장으로 사용되던 시절 난지도 쓰레기산 모습. (사진=서울시)쓰레기 매립 이전 난지도에선 꽃·배추·무·땅콩이 재배됐다. 특히 땅콩은 전국 생산량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수확량이 많았다.1970년대만 해도 서울 외곽에 위치한 것으로 인식됐던 난지도는 1978년 서울의 각종 쓰레기가 모이는 쓰레기 매립장으로 지정되며 거대한 ‘쓰레기섬’이 됐다.난지도에는 1993년까지 15년간 서울과 인천 등의 생활쓰레기와 산업폐기물 등 9200만t이 매립됐다. 엄청난 양의 쓰레기로 인해 당초 해발 8m의 저지대였던 난지도는 각각 98m, 94m 높이의 거대한 쓰레기 산 2개가 생겨났다.계속된 쓰레기 매립으로 포화상태에 이르고 썩은 쓰레기가 분출하는 메탄가스로 폭발 사고가 발생하는가 하면, 침출수로 인한 한강 오염 등이 계속되자 정부는 결국 1993년부터 쓰레기 반입을 중단했다.거대한 쓰레기섬 난지도에도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 현재 우리가 해외 토픽에서 접할 수 있는 ‘쓰레기장을 뒤지는’ 넝마주이들이 수백여 채의 판자촌을 형성해 거주했다. 거주한 인원은 최대 1000명에 달했고, 1993년 쓰레기 매립이 중단된 당시에도 400여 명이 거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악취와 파리떼가 들끓는 난지도와 이를 뒤지는 넝마주이들의 모습은 ‘가난한 한국’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모습으로 국내외 언론에 자주 소개되기도 했다.생태 복원 전 난지도 일대 모습. (사진=서울시)생태 복원 후 난지도 일대 모습. (사진=서울시)매립 중단 이후에도 쓰레기섬으로 인한 국가 이미지 추락과 인근 주민들의 악취 민원 등이 계속되자 서울시는 쓰레기산에 흙을 쌓는 복토작업을 진행하고, 오염수의 한강 유입을 막기 위한 방벽을 설치했다.정부는 이후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상암동에 서울월드컵경기장을 건설하며 인근 난지도 일대를 생태공원으로 탈바꿈하는 작업에 착수해 2002년 5월 노을공원, 하늘공원 등을 포함한 월드컵공원의 문을 열었다. 난지도 매립 쓰레기에서 발생하는 메탄가스 등은 월드컵공원과 서울월드컵경기장 시설의 열에너지원으로 활용되고 있다.난지도 인근 상암동 일대엔 디지털미디어시티(DMC)를 조성했다. 현재 DMC는 업무지구와 주요 언론 및 방송사 등이 위치하며 서울의 주요 상업·주거지역으로 통한다.
  • `8월2일` 생중계된 걸프戰…SNS 파고든 전쟁[그해 오늘]
    김영환 기자 2022.08.02
    [이데일리 김영환 기자] 1990년 8월 2일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걸프전`으로 불리는 이 전쟁은 미국·영국·프랑스 등 서방 세계가 압도적인 전력으로 이라크를 패퇴시키면서 종료됐다.(사진=CNN 유튜브 캡처)걸프전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생중계된 전쟁이라는 측면에서 특이점을 갖는다. 24시간 뉴스를 방송하던 미국 방송사 CNN이 걸프전을 중계하면서 세계적인 방송사로 이름을 알렸다.당시 미국은 레이더 망에 포착되지 않는 스텔스 폭격기와 이라크의 주력인 스커드 미사일을 요격하는 패트리어트 미사일 등 첨단 무기를 앞세웠다. 압도적 전력을 자랑하고 싶었던 미군과 전쟁의 실시간 방송을 꾀했던 방송사간 이해가 맞아떨어졌다.앞서 미국은 월남전에서 결국 패하고 떠난 패전국이었다. 그러나 걸프전에서는 자국 병사 사망 150여명, 이라크군 사망 20만명이라는 압도적 전과를 기록했다. 미디어는 미국의 우월한 군사전력을 십분 홍보했다.32년이 지난 2022년 2월24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2022년의 지구는 개별의 지구인 각각이 방송사가 되는 시대를 맞이했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틱톡 갖가지 플랫폼에서 다양한 영상들이 공유된다.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역시 이 같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실시간으로 전파된다. TV 앞에 앉아서 CNN의 흐릿한 방송 영상을 지켜보던 1990년과 다르게 지구인의 손마다 들려있는 모바일 기기에서 전쟁이 확대 재생산된다. 우크라이나 의용군으로 참전해 논란을 일으킨 이근씨의 근황을 알린 것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였다.`팩트체크`를 직업윤리로 삼는 언론과 달리 모바일 소셜미디어에서는 `가짜뉴스`도 심심찮게 확인된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전장의 모습이 여과없이 손바닥 안으로 들어오는 건, 전쟁의 감각을 무디게 한다는 우려도 제기된다.반면 전쟁의 참상을 목도한 세계인들이 이를 활용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관심을 상기시킨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공유 숙박 플랫폼 에어비앤비에서 우크라이나 숙소를 예약하고 돈만 지불하는 식이다. 우크라이나 반대편에 있는 한국인도 전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세계대전`이란 평가도 그래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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