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콘텐츠부

한광범

기자

그해 오늘

  •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서울올림픽 폐막[그해 오늘]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1988년 10월2일 서울올림픽이 폐막했다. 16일간 벌어진 열전에서 한국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로 종합순위 4위를 기록했다. 이 순위는 지금까지 한국이 올림픽에서 거둔 순위 가운데 최고로서 깨지지 않고 있다. 서울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사진=IOC)한국이 거둔 성과는 단순히 스포츠 강국이라는 칭호에 그치지 않았다. 냉전 시대 희생양에서 냉전 시대를 종식한 주역이라는 평가는 세계 무대에서 한국의 위상을 드높였다. 그전까지 올림픽은 이념의 진영논리가 참가를 좌우했다. 소련 모스크바 올림픽(1980년)은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이, 미국 로스앤젤러스 올림픽(1984년)은 소련을 포함한 공산 진영이 각각 보이콧한 반쪽짜리로 치렀다.서울올림픽은 미소를 비롯한 동서구권이 고르게 참가해 실력을 겨뤘다. 밴드그룹 코리아나가 부른 올림픽 주제가 ‘손에 손잡고’(Hand in hand)는 서울올림픽이 평화올림픽으로 치러진 단면을 보여준다. 서로 손에 손잡고 반목을 멈추고 화합해서 인류 공동의 번영을 이루자는 희망을 전 세계인에게 전달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북한의 방해는 집요했다. 1987년 터진 KAL(대한항공)기 폭파 사건은 대표적이다. 북한 공작원 김현희가 탑승객 115명을 태우고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해 김포공항으로 향하던 국적기를 폭파한 사건이었다. 사건으로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대선을 앞두고 거센 북풍이 불었는데, 자연스레 서울올림픽에 대한 테러 우려도 커졌다. 북한은 선전전을 통해 서울올림픽 보이콧을 부추겼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서울올림픽에 불참한 IOC 회원국은 북한을 비롯한 공산권 7개국밖에 되지 않았다. 공산권을 상징하는 소련과 동독마저도 선수단을 서울올림픽행 비행기에 태웠다.서울올림픽이 북한에 눈엣가시였던 이유는 체제의 열위 탓이었다. 한국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면서 최빈국으로 전락했는데, 같은 위치에서 출발한 남북은 각각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경제 노선으로 택하고 경쟁했다. 한때 북한이 남한을 원조하던 시기도 있었지만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둘의 관계가 역전된 것이 세계적으로 드러났다.마스코트 호돌이도 큰 사랑을 받았다. 디자이너 김현씨가 그려서 국민 공모를 거쳐 탄생했다. 한국의 기상을 상징하는 호랑이에 무엇을 한국의 상징으로 입힐지가 관건이었다. 상모가 안성맞춤이었다. 호돌이가 쓴 상모에 달린 물채는 알파벳 ‘S’ 자를 하고 있는데, 올림픽의 역동성과 서울(Seoul)을 나타낸다. 미국 식품사 켈로그사가 자기들 캐릭터 ‘토니 주니어’를 베꼈다고 시비를 걸기도 했다.올림픽을 계기로 내수 경기는 불같이 일어났다.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과 올림픽을 즐기는 내국인을 대상으로 요식업, 관광업, 숙박업 등이 활기를 띠었다. 서울지하철이 4호선까지 깔리면서 활동반경도 확장했다. 3저 호황을 기반으로 한 경제성장으로 소비력이 커졌다. 올림픽을 계기로 진출한 외국 브랜드가 한국에서 사업을 확장하는 계기도 됐다.빛이 밝으면 그림자도 짙은 법이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 이어 서울올림픽까지 경기장 부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무수한 시민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 도시 미관을 해치는 판잣집은 철거했고 이 과정에서 부랑자와 노숙인 등은 수용소로 끌려갔다. 국가폭력 사건으로 규정된 부산 형제복지원 피해가 커진 데에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이 자유롭지 못하다.
    전재욱 기자 2022.10.02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1988년 10월2일 서울올림픽이 폐막했다. 16일간 벌어진 열전에서 한국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로 종합순위 4위를 기록했다. 이 순위는 지금까지 한국이 올림픽에서 거둔 순위 가운데 최고로서 깨지지 않고 있다. 서울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사진=IOC)한국이 거둔 성과는 단순히 스포츠 강국이라는 칭호에 그치지 않았다. 냉전 시대 희생양에서 냉전 시대를 종식한 주역이라는 평가는 세계 무대에서 한국의 위상을 드높였다. 그전까지 올림픽은 이념의 진영논리가 참가를 좌우했다. 소련 모스크바 올림픽(1980년)은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이, 미국 로스앤젤러스 올림픽(1984년)은 소련을 포함한 공산 진영이 각각 보이콧한 반쪽짜리로 치렀다.서울올림픽은 미소를 비롯한 동서구권이 고르게 참가해 실력을 겨뤘다. 밴드그룹 코리아나가 부른 올림픽 주제가 ‘손에 손잡고’(Hand in hand)는 서울올림픽이 평화올림픽으로 치러진 단면을 보여준다. 서로 손에 손잡고 반목을 멈추고 화합해서 인류 공동의 번영을 이루자는 희망을 전 세계인에게 전달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북한의 방해는 집요했다. 1987년 터진 KAL(대한항공)기 폭파 사건은 대표적이다. 북한 공작원 김현희가 탑승객 115명을 태우고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해 김포공항으로 향하던 국적기를 폭파한 사건이었다. 사건으로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대선을 앞두고 거센 북풍이 불었는데, 자연스레 서울올림픽에 대한 테러 우려도 커졌다. 북한은 선전전을 통해 서울올림픽 보이콧을 부추겼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서울올림픽에 불참한 IOC 회원국은 북한을 비롯한 공산권 7개국밖에 되지 않았다. 공산권을 상징하는 소련과 동독마저도 선수단을 서울올림픽행 비행기에 태웠다.서울올림픽이 북한에 눈엣가시였던 이유는 체제의 열위 탓이었다. 한국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면서 최빈국으로 전락했는데, 같은 위치에서 출발한 남북은 각각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경제 노선으로 택하고 경쟁했다. 한때 북한이 남한을 원조하던 시기도 있었지만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둘의 관계가 역전된 것이 세계적으로 드러났다.마스코트 호돌이도 큰 사랑을 받았다. 디자이너 김현씨가 그려서 국민 공모를 거쳐 탄생했다. 한국의 기상을 상징하는 호랑이에 무엇을 한국의 상징으로 입힐지가 관건이었다. 상모가 안성맞춤이었다. 호돌이가 쓴 상모에 달린 물채는 알파벳 ‘S’ 자를 하고 있는데, 올림픽의 역동성과 서울(Seoul)을 나타낸다. 미국 식품사 켈로그사가 자기들 캐릭터 ‘토니 주니어’를 베꼈다고 시비를 걸기도 했다.올림픽을 계기로 내수 경기는 불같이 일어났다.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과 올림픽을 즐기는 내국인을 대상으로 요식업, 관광업, 숙박업 등이 활기를 띠었다. 서울지하철이 4호선까지 깔리면서 활동반경도 확장했다. 3저 호황을 기반으로 한 경제성장으로 소비력이 커졌다. 올림픽을 계기로 진출한 외국 브랜드가 한국에서 사업을 확장하는 계기도 됐다.빛이 밝으면 그림자도 짙은 법이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 이어 서울올림픽까지 경기장 부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무수한 시민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 도시 미관을 해치는 판잣집은 철거했고 이 과정에서 부랑자와 노숙인 등은 수용소로 끌려갔다. 국가폭력 사건으로 규정된 부산 형제복지원 피해가 커진 데에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이 자유롭지 못하다.
  • 광화문 한복판에 탱크가…국군의날 시가행진 의미는?[그해 오늘]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국군의 날은 매해 10월1일이다. 국군이 6·25전쟁에서 38선을 돌파한 게 이날이라는 데에서 유래했다. 애초 육해공군이 따로 기념하던 창군 일을 한데 합쳐 1956년 처음 제정했다. 이날이 국군의 생일인 셈이다.1980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국군의날 시가행진에서 전차가 지나가고 있다.(사진=e영상역사관)시가행진(퍼레이드)은 국군의 날 행사를 상징했다. 육해공군과 해병대 장병 제식은 군의 위용을 보여줬다. 군이 자랑하는 무기를 대외적으로 드러내는 것만으로 전쟁 억제 효과도 기대된다. 최신·첨단 무기를 보유한 우리를 건들지 말라는 메시지이다. 그래서 냉전 시대는 군사 퍼레이드만으로 상대국과 소리 없는 전쟁을 벌였다. 누구 군사력이 막강한지가 체제의 우월함으로 이어지는 것이다.군사 퍼레이드는 체제를 선전하고 국민 결속을 다지는 측면도 크다. 국내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1988년 공개된 국방부장관이 대통령에게 보낸 국군의 날 행사 보고서를 보면, ‘국군 발전상을 홍보해 군인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국민의 안보의식을 고취’하려는 목적이라고 밝힌다. 북한이 지난해 정권수립일을 맞아 연 열병식에서 방역부대를 등장시킨 것도 사례다. 코로나 19 대응의지를 보여서 정권에 대한 충성도를 이끌어내려는 차원이다. 퍼레이드는 자체만으로 군 전력을 상승시키는 효과가 기대된다. 행사를 준비하면서 전열을 가다듬는 것이 군의 전력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 군사 퍼레이드 제일 앞단에 사관생도를 배치하는 것은 예비 군인에게 충성심을 심어주고자 하는 의도이다.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의식화를 거쳐 군의 사기가 상승한다는 것이다.정권이 지향하는 이념에 따라서 군사 퍼레이드는 시소를 탔다. 군사정권 시절 군사 퍼레이드는 매해 개최됐다. 서울 여의도나 광화문, 서울시청 일대 교통을 통제하고 대규모로 폈다. 이래서 군사 퍼레이드를 군사정권 시절 잔재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횟수가 줄고 규모가 축소됐다. 국군의 날 시가행진은 2013년 박근혜 정부에서 한 게 마지막이다. 문재인 정부가 건군 70주년 행사로 치른 2018년 국군의 날에도 군사 퍼레이드는 없었다.건군 65주년 국군의 날인 2013년 10월1일 국군 장병들이 서울시청 일대에서 시가행진을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일각에서는 국군의 날 퍼레이드가 외려 장병의 사기를 꺾는다는 시각도 있다. 통상 행사를 준비하려면 늦어도 봄부터 매진해야 한다. 7~9월 여름 무더위를 거치면서 장병은 맥이 빠진다. 행사 당일 도열한 장병이 쓰러지는 일도 다반사다. 행사에서 발생하는 각종 사고도 잇달았다. 1977년 국군의 날 행사를 앞두고 비행연습을 하던 육군 대위가, 1990년 낙하훈련을 하던 특전사 여군 하사가 각각 사고로 순직했다. 대외 선전을 위해 발생한 안타까운 희생이었다.시대가 바뀌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재임 시절 행사를 간소화하면서 “병사들 고충을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국군의 날 행사의 근거가 되는 부대관리훈령을 보면 국군의 날 행사는 ‘대통령 취임 첫해는 대규모로 하고 이를 제외하면 소규모로 매해 한다’고 돼 있다. 그러면서 ‘시가행진’을 행사 부대행사로 구분하고 ‘행사 내용은 매해 세부 내용을 결정한다’고 단서를 뒀다. 시가행진이 필수는 아니라는 것이다. 올해 국군의 날 행사는 시가행진 없이 열린다.
    전재욱 기자 2022.10.01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국군의 날은 매해 10월1일이다. 국군이 6·25전쟁에서 38선을 돌파한 게 이날이라는 데에서 유래했다. 애초 육해공군이 따로 기념하던 창군 일을 한데 합쳐 1956년 처음 제정했다. 이날이 국군의 생일인 셈이다.1980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국군의날 시가행진에서 전차가 지나가고 있다.(사진=e영상역사관)시가행진(퍼레이드)은 국군의 날 행사를 상징했다. 육해공군과 해병대 장병 제식은 군의 위용을 보여줬다. 군이 자랑하는 무기를 대외적으로 드러내는 것만으로 전쟁 억제 효과도 기대된다. 최신·첨단 무기를 보유한 우리를 건들지 말라는 메시지이다. 그래서 냉전 시대는 군사 퍼레이드만으로 상대국과 소리 없는 전쟁을 벌였다. 누구 군사력이 막강한지가 체제의 우월함으로 이어지는 것이다.군사 퍼레이드는 체제를 선전하고 국민 결속을 다지는 측면도 크다. 국내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1988년 공개된 국방부장관이 대통령에게 보낸 국군의 날 행사 보고서를 보면, ‘국군 발전상을 홍보해 군인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국민의 안보의식을 고취’하려는 목적이라고 밝힌다. 북한이 지난해 정권수립일을 맞아 연 열병식에서 방역부대를 등장시킨 것도 사례다. 코로나 19 대응의지를 보여서 정권에 대한 충성도를 이끌어내려는 차원이다. 퍼레이드는 자체만으로 군 전력을 상승시키는 효과가 기대된다. 행사를 준비하면서 전열을 가다듬는 것이 군의 전력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 군사 퍼레이드 제일 앞단에 사관생도를 배치하는 것은 예비 군인에게 충성심을 심어주고자 하는 의도이다.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의식화를 거쳐 군의 사기가 상승한다는 것이다.정권이 지향하는 이념에 따라서 군사 퍼레이드는 시소를 탔다. 군사정권 시절 군사 퍼레이드는 매해 개최됐다. 서울 여의도나 광화문, 서울시청 일대 교통을 통제하고 대규모로 폈다. 이래서 군사 퍼레이드를 군사정권 시절 잔재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횟수가 줄고 규모가 축소됐다. 국군의 날 시가행진은 2013년 박근혜 정부에서 한 게 마지막이다. 문재인 정부가 건군 70주년 행사로 치른 2018년 국군의 날에도 군사 퍼레이드는 없었다.건군 65주년 국군의 날인 2013년 10월1일 국군 장병들이 서울시청 일대에서 시가행진을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일각에서는 국군의 날 퍼레이드가 외려 장병의 사기를 꺾는다는 시각도 있다. 통상 행사를 준비하려면 늦어도 봄부터 매진해야 한다. 7~9월 여름 무더위를 거치면서 장병은 맥이 빠진다. 행사 당일 도열한 장병이 쓰러지는 일도 다반사다. 행사에서 발생하는 각종 사고도 잇달았다. 1977년 국군의 날 행사를 앞두고 비행연습을 하던 육군 대위가, 1990년 낙하훈련을 하던 특전사 여군 하사가 각각 사고로 순직했다. 대외 선전을 위해 발생한 안타까운 희생이었다.시대가 바뀌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재임 시절 행사를 간소화하면서 “병사들 고충을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국군의 날 행사의 근거가 되는 부대관리훈령을 보면 국군의 날 행사는 ‘대통령 취임 첫해는 대규모로 하고 이를 제외하면 소규모로 매해 한다’고 돼 있다. 그러면서 ‘시가행진’을 행사 부대행사로 구분하고 ‘행사 내용은 매해 세부 내용을 결정한다’고 단서를 뒀다. 시가행진이 필수는 아니라는 것이다. 올해 국군의 날 행사는 시가행진 없이 열린다.
  • 조두순이 겨우 징역 12년?…국회·정부·법원은 뭐했나[그해 오늘]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09년 9월 30일.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 앞서 한 대법원 판결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냈다. 정부 수반인 대통령의 사법부 판결 비판은 상당히 이례적이다.이 전 대통령은 “법에서 판단한 내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이런 반인륜적 범죄자가 우리 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까지 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평생 그런 사람들은 격리시키는 것이 마땅하지 않나 하는 생각까지 할 정도로 대통령의 마음이 참담하다”며 “이런 유형의 범죄는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한다. 여성부와 법무부 등 관계부처가 협력해 방지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이 전 대통령의 비판은 그로부터 6일 전인 2009년 9월 24일 선고된 대법원 판결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8세 아동을 납치·성폭행해 영구장애를 입힌 아동 성범죄자 조두순에 대한 판결이었다. 대법원 판결 후 국민적 공분이 일자 이 전 대통령도 이에 발맞춰 입장을 낸 것이다.징역 12년 복역 후 만기출소한 조두순이 2020년 12월 12일 오전 경기도 안산준법지원센터에서 행정절차를 위해 이동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檢, 법 적용 잘못…항소포기로 형량 높일 기회 놓쳐조두순은 악질적 범죄자다. 과거 강간치상으로 3년을 복역했던 조두순은 2008년 12월 안산시 단원구에서 등교 중이던 8세 여아를 폭행하고 기절시켜 성폭행했다. 이 사건으로 피해아동은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참혹한 부상을 입었고 결국 영구 장애를 갖게 됐다. 조두순은 경찰에 붙잡혀 강간상해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수사기관과 법정에서도 변명으로 일관한 조두순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법원의 느슨한 양형기준에 더해 검찰의 안일한 인식이 더해져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조두순에게 확정된 형벌은 징역 12년, 전자발찌 부착 7년, 신상공개 5년에 불과했다. 1심 법원이 조두순이 범행 당시 만취상태였다는 이유로 심신미약 감경을 한 결과물이었다. 2009년 대법원 양형위원회 양형기준으로 할 때 조두순에게 내려진 1심 판결은 당시 양형기준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1심 재판부도 조두순에 대한 판결 선고 당시 엄벌 필요성을 강조했다. 1심은 “추가 범죄 발생을 막아 이 사회를 보호하고 피고인의 악성을 교화, 개선시키기 위해선 장기간 이 사회에서 격리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시했다. 문제는 애초 법원의 양형기준이 국민 법감정에 크게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 양형기준은 만 13세 미만을 대상으로 한 강간상해의 경우 기본을 징역 6~9년으로 하되, 가중처벌 요소가 있을 경우 징역 7~11년에 처하도록 했다. 현재 양형기준(기본 징역 9~14년, 가중처벌 시 징역 13년 이상 또는 무기징역)과 비교해 약하다. 더 큰 문제는 검찰이 조두순을 기소하며 13세 미만 미성년자 성폭력 범죄에 대한 가중처벌을 규정한 성폭력특별법이 아닌 형법상 강간상해죄로 법 적용을 잘못한 것이다. 2008년 시행된 성폭력특별법 해당 조항의 경우 ‘무기나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해 ‘무기나 5년 이상의 징역’인 형법에 비해 형량이 높다.◇조두순 사건 이후에야 성범죄 처벌 강화 속도더욱이 검찰은 1심 결심 공판에서 “조두순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정작 1심 판결에 대해선 ‘양형기준을 넘었다’는 이유로 항소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조두순 사건이 뒤늦게 알려지고 하급심 판결에 대해 뒤늦게 공분이 일었지만 검찰이 항소를 하지 않아 2심부턴 형량 상향이 불가능했다. 형사재판에서 피고인만 상소한 경우 불이익변경 금지 원칙에 따라 법원의 원심 판결 이상의 형을 선고할 수 없다. 조두순은 수사기관은 물론 법정에서도 범죄 사실 일체를 모두 부인하는 뻔뻔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는 출소 후 ‘사과 의향’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도 뒷짐을 지며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사진=연합뉴스)검찰이 항소를 한 후 공소장 변경 신청을 통해 형법이 아닌, 형량이 훨씬 높은 성폭력특별법을 적용했을 경우 조두순에겐 훨씬 무거운 처벌이 내려질 수도 있었던 것이다. 검찰의 항소 포기로 불이익변경금지 원칙의 수혜를 입은 조두순은 2심과 대법원에서도 “범행을 저지른 사실이 없을 뿐만 아니라, 범행 현장에도 가지 않았다”는 뻔뻔한 주장을 되풀이했다. 이 같은 조두순의 태도에 대해 2심 재판부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범행을 극구 부인하고 있어 중형에 처할 필요가 있다”고 질타했다.대법원 판결로 조두순의 최종 형량이 확정되자 여론은 더욱 들끓었고, 국회와 정부 등도 빠르게 움직였다. 성폭력범죄자에 대한 강한 처벌과 피해자 보호를 강화하는 내용의 성폭력범죄 처벌 특례법이 제정돼 2010년 시행에 들어갔다. 대법원 양형위도 2010년 13세 미만 강간상해 범죄에 대해 무기징역을 구형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양형기준을 높였다. 국회도 2013년 성범죄처벌법 개정을 통해 성범죄에서의 음주감경을 적용하지 않을 수 있도록 했다.
    한광범 기자 2022.09.30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09년 9월 30일.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 앞서 한 대법원 판결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냈다. 정부 수반인 대통령의 사법부 판결 비판은 상당히 이례적이다.이 전 대통령은 “법에서 판단한 내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이런 반인륜적 범죄자가 우리 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까지 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평생 그런 사람들은 격리시키는 것이 마땅하지 않나 하는 생각까지 할 정도로 대통령의 마음이 참담하다”며 “이런 유형의 범죄는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한다. 여성부와 법무부 등 관계부처가 협력해 방지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이 전 대통령의 비판은 그로부터 6일 전인 2009년 9월 24일 선고된 대법원 판결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8세 아동을 납치·성폭행해 영구장애를 입힌 아동 성범죄자 조두순에 대한 판결이었다. 대법원 판결 후 국민적 공분이 일자 이 전 대통령도 이에 발맞춰 입장을 낸 것이다.징역 12년 복역 후 만기출소한 조두순이 2020년 12월 12일 오전 경기도 안산준법지원센터에서 행정절차를 위해 이동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檢, 법 적용 잘못…항소포기로 형량 높일 기회 놓쳐조두순은 악질적 범죄자다. 과거 강간치상으로 3년을 복역했던 조두순은 2008년 12월 안산시 단원구에서 등교 중이던 8세 여아를 폭행하고 기절시켜 성폭행했다. 이 사건으로 피해아동은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참혹한 부상을 입었고 결국 영구 장애를 갖게 됐다. 조두순은 경찰에 붙잡혀 강간상해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수사기관과 법정에서도 변명으로 일관한 조두순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법원의 느슨한 양형기준에 더해 검찰의 안일한 인식이 더해져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조두순에게 확정된 형벌은 징역 12년, 전자발찌 부착 7년, 신상공개 5년에 불과했다. 1심 법원이 조두순이 범행 당시 만취상태였다는 이유로 심신미약 감경을 한 결과물이었다. 2009년 대법원 양형위원회 양형기준으로 할 때 조두순에게 내려진 1심 판결은 당시 양형기준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1심 재판부도 조두순에 대한 판결 선고 당시 엄벌 필요성을 강조했다. 1심은 “추가 범죄 발생을 막아 이 사회를 보호하고 피고인의 악성을 교화, 개선시키기 위해선 장기간 이 사회에서 격리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시했다. 문제는 애초 법원의 양형기준이 국민 법감정에 크게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 양형기준은 만 13세 미만을 대상으로 한 강간상해의 경우 기본을 징역 6~9년으로 하되, 가중처벌 요소가 있을 경우 징역 7~11년에 처하도록 했다. 현재 양형기준(기본 징역 9~14년, 가중처벌 시 징역 13년 이상 또는 무기징역)과 비교해 약하다. 더 큰 문제는 검찰이 조두순을 기소하며 13세 미만 미성년자 성폭력 범죄에 대한 가중처벌을 규정한 성폭력특별법이 아닌 형법상 강간상해죄로 법 적용을 잘못한 것이다. 2008년 시행된 성폭력특별법 해당 조항의 경우 ‘무기나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해 ‘무기나 5년 이상의 징역’인 형법에 비해 형량이 높다.◇조두순 사건 이후에야 성범죄 처벌 강화 속도더욱이 검찰은 1심 결심 공판에서 “조두순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정작 1심 판결에 대해선 ‘양형기준을 넘었다’는 이유로 항소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조두순 사건이 뒤늦게 알려지고 하급심 판결에 대해 뒤늦게 공분이 일었지만 검찰이 항소를 하지 않아 2심부턴 형량 상향이 불가능했다. 형사재판에서 피고인만 상소한 경우 불이익변경 금지 원칙에 따라 법원의 원심 판결 이상의 형을 선고할 수 없다. 조두순은 수사기관은 물론 법정에서도 범죄 사실 일체를 모두 부인하는 뻔뻔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는 출소 후 ‘사과 의향’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도 뒷짐을 지며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사진=연합뉴스)검찰이 항소를 한 후 공소장 변경 신청을 통해 형법이 아닌, 형량이 훨씬 높은 성폭력특별법을 적용했을 경우 조두순에겐 훨씬 무거운 처벌이 내려질 수도 있었던 것이다. 검찰의 항소 포기로 불이익변경금지 원칙의 수혜를 입은 조두순은 2심과 대법원에서도 “범행을 저지른 사실이 없을 뿐만 아니라, 범행 현장에도 가지 않았다”는 뻔뻔한 주장을 되풀이했다. 이 같은 조두순의 태도에 대해 2심 재판부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범행을 극구 부인하고 있어 중형에 처할 필요가 있다”고 질타했다.대법원 판결로 조두순의 최종 형량이 확정되자 여론은 더욱 들끓었고, 국회와 정부 등도 빠르게 움직였다. 성폭력범죄자에 대한 강한 처벌과 피해자 보호를 강화하는 내용의 성폭력범죄 처벌 특례법이 제정돼 2010년 시행에 들어갔다. 대법원 양형위도 2010년 13세 미만 강간상해 범죄에 대해 무기징역을 구형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양형기준을 높였다. 국회도 2013년 성범죄처벌법 개정을 통해 성범죄에서의 음주감경을 적용하지 않을 수 있도록 했다.
  • '패륜 女학생' 머리채 뜯은 '폭행 할머니'[그해 오늘]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노인과 학생이 거칠게 서로 폭행하고 상대에게 폭언을 퍼부은 난투극이 2010년 9월29일(추정) 낮에 발생했다. 장소는 서울지하철 2호선 객실 안이었다. 당사자는 서로 모르는 사이인 것으로 알려졌다. 어쩌다가 둘이 치고받았는지도 정확히 전해지지 않는다. 사건은 현장 승객이 휴대전화로 촬영한 동영상이 인터넷에 퍼지면서 알려졌다. 누가 찍었고, 누가 올렸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반에 알려지고 폭발적인 주목을 받았다.(동영상 캡처)사건에 대한 반응은 ‘예의’에서 출발했다. 사건 초기 당사자 학생이 일부 ‘지하철 패륜녀’로 명명된 게 사례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가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여학생 잘못에 초점이 맞춰진 시각이다. 표면적으로는 ‘00녀’라는 여성비하 시각 표출이었지만, 이것도 ‘예의’라는 본질이 깔렸기에 가능했다. 그해 G20 정상회담 개최를 앞두고 “동방예의지국 명성에 먹칠했다”는 얘기까지 돌았다. 어떤 전문가는 “하나만 낳아서 오냐오냐 키워 가정교육이 덜 된 탓”이라고 했다. ‘외동’(하나)과 ‘사랑’(오냐오냐)은 패륜의 절대 원인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용납할 수 없는 ‘예의 없음’에는 이유가 필요했다.이렇듯 사건은 해석에 해석을 낳으면서 논란을 키워갔다. 그러다가 ‘예의는 위와 아래가 서로 주고받는 것’이라는 반론이 붙었다. 예의가 아랫사람이 윗사람한테 일방으로 갖추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할머니가 평소에 폭력적이었다’는 목격담이 붙으면서 논의는 확장했다. 출처가 불명확하다손 하더라도 예의의 대상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사건은 입소문을 계속 타면서 ‘패륜녀와 폭행 할머니’로 진화했다.한강을 건너는 지하철 2호선 모습(사진=이미지투데이)논의는 ‘왜 지하철 승객은 둘을 말리지 않는가’로까지 미쳤다. 앞서 예의네, 패륜이네 등을 따진 게 결국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점을 전제로 한 게 아니었던가. 사회화의 전제는 상호 작용이다. 위처럼 예의 없고 패륜적인 상황을 방관한 지하철 승객의 심리는 무엇이었는지 관심 대상이었다. 파편화된 모습조차 소극적인 사회화의 단면으로 봐야 하는지 의문이 붙었다.동영상 촬영분이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 적극적인 사회화 현상이라는 해석도 있다. 관계에 물리적으로 개입한 것은 아니지만 사회 구성원 다수가 관여하도록 유도해 공론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동영상 촬영과 게재 의도가 어쨌건 간에 영상은 심도 있는 관여를 이끌어낸 측면이 있다. 지하철이 일상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누구나가 언제든지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이 환기돼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문제는 이 과정에서 당사자의 신원이 여과 없이 공개된 것이다. 얼굴과 목소리, 신체를 보면 당사자가 특정될 만큼 사생활이 노출됐다. 퍼블리시티권을 침해하고 명예를 훼손할 여지가 있었다. 지금이야 상대 동의를 얻지 않은 동영상 촬영·활용은 서로 피곤해질 수 있다는 게 상식에 가깝지만, 당시만 해도 동영상 기반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막 움트기 시작할 시절이라서 이런 인식이 부족해 보였다.지난 4월 지하철 4호선 인덕원역이 단전으로 운행이 중단된 모습.(사진=연합뉴스)사실 이 사건은 알려져서 문제가 된 것이지 오래전부터 문제였는지 모른다. 일상이 펼쳐지는 지하철은 실제로 범죄가 끊이지 않는다. 경찰범죄통계를 보면, 지난해 지하철에서 발생한 범죄는 2946건으로 전체 범죄 발생 장소의 0.2%를 차지한다. 1년 동안 하루에 범죄 8건이 지하철에서 일어나는 셈이다. 가장 흔한 무단승차(점유이탈물 횡령 등 848건)를 제외하더라도 연간 2098건, 하루에 5.7건이다. 단일 범죄 가운데 강제추행 등 강력범죄(604건)가 가장 많고 상해·폭행 등 폭력범죄(450건)가 뒤를 잇는다. 공연음란죄 등 성풍속범죄(414건)도 만만찮다.
    전재욱 기자 2022.09.29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노인과 학생이 거칠게 서로 폭행하고 상대에게 폭언을 퍼부은 난투극이 2010년 9월29일(추정) 낮에 발생했다. 장소는 서울지하철 2호선 객실 안이었다. 당사자는 서로 모르는 사이인 것으로 알려졌다. 어쩌다가 둘이 치고받았는지도 정확히 전해지지 않는다. 사건은 현장 승객이 휴대전화로 촬영한 동영상이 인터넷에 퍼지면서 알려졌다. 누가 찍었고, 누가 올렸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반에 알려지고 폭발적인 주목을 받았다.(동영상 캡처)사건에 대한 반응은 ‘예의’에서 출발했다. 사건 초기 당사자 학생이 일부 ‘지하철 패륜녀’로 명명된 게 사례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가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여학생 잘못에 초점이 맞춰진 시각이다. 표면적으로는 ‘00녀’라는 여성비하 시각 표출이었지만, 이것도 ‘예의’라는 본질이 깔렸기에 가능했다. 그해 G20 정상회담 개최를 앞두고 “동방예의지국 명성에 먹칠했다”는 얘기까지 돌았다. 어떤 전문가는 “하나만 낳아서 오냐오냐 키워 가정교육이 덜 된 탓”이라고 했다. ‘외동’(하나)과 ‘사랑’(오냐오냐)은 패륜의 절대 원인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용납할 수 없는 ‘예의 없음’에는 이유가 필요했다.이렇듯 사건은 해석에 해석을 낳으면서 논란을 키워갔다. 그러다가 ‘예의는 위와 아래가 서로 주고받는 것’이라는 반론이 붙었다. 예의가 아랫사람이 윗사람한테 일방으로 갖추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할머니가 평소에 폭력적이었다’는 목격담이 붙으면서 논의는 확장했다. 출처가 불명확하다손 하더라도 예의의 대상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사건은 입소문을 계속 타면서 ‘패륜녀와 폭행 할머니’로 진화했다.한강을 건너는 지하철 2호선 모습(사진=이미지투데이)논의는 ‘왜 지하철 승객은 둘을 말리지 않는가’로까지 미쳤다. 앞서 예의네, 패륜이네 등을 따진 게 결국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점을 전제로 한 게 아니었던가. 사회화의 전제는 상호 작용이다. 위처럼 예의 없고 패륜적인 상황을 방관한 지하철 승객의 심리는 무엇이었는지 관심 대상이었다. 파편화된 모습조차 소극적인 사회화의 단면으로 봐야 하는지 의문이 붙었다.동영상 촬영분이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 적극적인 사회화 현상이라는 해석도 있다. 관계에 물리적으로 개입한 것은 아니지만 사회 구성원 다수가 관여하도록 유도해 공론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동영상 촬영과 게재 의도가 어쨌건 간에 영상은 심도 있는 관여를 이끌어낸 측면이 있다. 지하철이 일상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누구나가 언제든지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이 환기돼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문제는 이 과정에서 당사자의 신원이 여과 없이 공개된 것이다. 얼굴과 목소리, 신체를 보면 당사자가 특정될 만큼 사생활이 노출됐다. 퍼블리시티권을 침해하고 명예를 훼손할 여지가 있었다. 지금이야 상대 동의를 얻지 않은 동영상 촬영·활용은 서로 피곤해질 수 있다는 게 상식에 가깝지만, 당시만 해도 동영상 기반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막 움트기 시작할 시절이라서 이런 인식이 부족해 보였다.지난 4월 지하철 4호선 인덕원역이 단전으로 운행이 중단된 모습.(사진=연합뉴스)사실 이 사건은 알려져서 문제가 된 것이지 오래전부터 문제였는지 모른다. 일상이 펼쳐지는 지하철은 실제로 범죄가 끊이지 않는다. 경찰범죄통계를 보면, 지난해 지하철에서 발생한 범죄는 2946건으로 전체 범죄 발생 장소의 0.2%를 차지한다. 1년 동안 하루에 범죄 8건이 지하철에서 일어나는 셈이다. 가장 흔한 무단승차(점유이탈물 횡령 등 848건)를 제외하더라도 연간 2098건, 하루에 5.7건이다. 단일 범죄 가운데 강제추행 등 강력범죄(604건)가 가장 많고 상해·폭행 등 폭력범죄(450건)가 뒤를 잇는다. 공연음란죄 등 성풍속범죄(414건)도 만만찮다.
  • "짐승보다 위험하다"…은혜를 칼로 갚은 살인범[그해 오늘]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05년 9월 28일 오후 2시. 서울 서초동 대법원 2호 법정. 대법원 3부 심리 사건에 대해 재판장인 양승태 대법관(이후 대법원장)이 피고인의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의 사형 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대법원은 “범행에 대해 진정으로 참회하는 빛을 보이지 않고 있어 처벌을 통한 교화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피고인에 대해 사형의 선고가 정당화될 수 있다”고 판시했다. 피고인은 수십 년 동안 자신을 뒷바라지해준 은인인 대학교수 A씨를 참혹하게 살해한 ‘마산 교수 살인사건’ 범인 전용술(당시 만 49세)이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전용술에 대해 법원은 “맹수보다도 위험하다”고 질타하기도 했다.자신의 은인이던 대학 교수를 참혹하게 살해한 전용술.전용술은 이미 10대 시절 사형 판결을 받았던 적이 있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전용술은 고등학교 1학년 재학 중이던 1972년 당시 여자친구 B씨의 부모가 교제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이들을 폭행했다. 폭행 사건으로 학교에서 퇴학당한 전용술은 재판에 넘겨져 징역 장기 8월, 단기 6월 판결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그리고 출소 후 폭행 사건으로 B씨가 자신을 떠났다는 이유로 1974년 7월 출근 중이던 B씨에게 흉기를 마구 휘둘러 숨지게 했다. 그리고 도주 중 택시를 상대로 강도 짓을 한 후 현금을 빼앗았고 이후 경찰의 추격을 받자 인질극을 벌이다 인질에게 흉기를 휘두르기도 했다. 전용술은 검거 후 재판에 넘겨져 1·2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대법원은 1975년 4월 “범행이 미성년자의 미숙한 정서와 사려에서 비롯된 점을 참작해야 한다”며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모범수로 감형→사회복귀하자 본색 전용술의 초등학교·고등학교 2년 선배로서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던 A씨는 무기수로 수감 중이던 전용술의 옥바라지를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A씨는 자주 면회를 가거나 서신을 보내는 등 전용술을 살뜰히 챙겼다. 이 같은 옥바라지는 A씨가 청와대 경호실에 근무할 때와 대학교수가 된 후에도 계속됐다. A씨가 이 같이 물심양면의 도운 덕분에 전용술은 모범수가 됐고, 1993년 3월 징역 20년으로 감형됐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가석방 돼 다시 바깥세상으로 나오게 됐다.전용술은 출소 후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8000만원을 이용해 돈을 벌면서 1995년 1월 결혼해 자녀까지 출산했다. 하지만 1998년 3월 이혼 후 주식투자 등으로 전 재산을 탕진했다. 자살을 고민하던 전용술은 A씨의 만류로 이 같은 뜻을 접었다. 택시기사로 근근이 돈을 벌던 전용술은 이때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손을 벌리기 시작했다. 용돈 명목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받던 전용술은 2000년 12월 A씨에게 “1000만~2000만원을 주면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도와달라”고 부탁했다.하지만 A씨는 “경제적으로 어렵다”며 전용술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전용술은 A씨에 대한 앙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주변에 “나한테 큰 도움을 준 것처럼 소문이 났지만 정작 A씨에게 도움 받은 것은 별로 없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리고 A씨를 죽이겠다며 수년 동안 칼을 가지고 다녔다. 전용술은 마치 돈을 맡겨놓은 듯이 A씨에게 수시로 전화를 걸어서 돈을 달라고 했다. 이후 2004년 7월 길거리에서 만난 A씨가 “왜 새벽에 수시로 전화를 하느냐”고 꾸짖자, A씨의 단골 술집을 찾아가 술을 마시고 있던 A씨에게 재차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 A씨가 “내게 돈 맡겨 놓았느냐”고 반문하자, 전용술은 A씨를 잔혹하게 살해하고 도망갔다.◇뻔뻔하게 ‘피해자 탓’ 반복…책 출간 시도도 전용술은 이후 도피를 위해 며칠 후 진주에서 택시기사를 죽이고 차량과 금품을 빼앗기 위해 택시기사에게 흉기를 휘둘렀다. 피해를 당한 택시기사는 수차례 흉기에 맞아 중상을 입었으나 가까스로 목숨은 구할 수 있었다. 전용술은 이후 8월 5일 주민 신고를 받고 충돌한 경찰에게 검거됐다. 검거 당시에도 A씨와 택시기사 C씨를 공격할 때 사용한 흉기를 소지하고 있었다.전용술은 검거 이후에도 수사기관이나 재판에서 어떠한 반성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피해자 탓을 하며 뻔뻔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는 “A씨가 신의와 진실을 무너뜨려 자존심을 상하게 해 응징했다”며 “별것 아니었던 제 요구를 거부해 스스로 원치 않는 길을 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선 “A씨가 초래한 일로 구속돼 고통의 나락에서 헤매고 있다”는 황당한 주장을 펴기도 했다.1심 법원은 “눈앞의 작은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생명, 신체를 물건보다도 소홀하게 취급하는 지극히 반문명적 행동을 30년 세월을 뛰어넘어 반복했다”며 “맹수보다도 위험한 인물인 피고인을 또다시 세상에 나오게 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사형을 선고했다.재판부는 “살해 동기가 너무나 이기적이고 파렴치해 어떠한 참작할 만한 사정이 엿보이지 않는다”며 “범행 수법은 지극히 잔혹하고 문명세계에 어울리지 않아 피고인의 범죄적 악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질타했다. 전용술은 판결에 불복해 항소·상고했으나 대법원은 1심의 사형 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전용술의 만행은 사형 판결 이후에도 그치지 않았다. 전용술은 2011년 9월 자신의 두 차례 살인 경험을 기록한 책을 출간하겠다며 수감 중이던 교정기관에 자신의 글을 출판사에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소설 형식이었지만 기존에 수사기관과 법정에서 범행을 정당화한 자신의 주장을 되풀이한 글이었다. 전용술은 교정기관이 요구를 거부하자 소송을 제기했다가 패소했다.
    한광범 기자 2022.09.28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05년 9월 28일 오후 2시. 서울 서초동 대법원 2호 법정. 대법원 3부 심리 사건에 대해 재판장인 양승태 대법관(이후 대법원장)이 피고인의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의 사형 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대법원은 “범행에 대해 진정으로 참회하는 빛을 보이지 않고 있어 처벌을 통한 교화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피고인에 대해 사형의 선고가 정당화될 수 있다”고 판시했다. 피고인은 수십 년 동안 자신을 뒷바라지해준 은인인 대학교수 A씨를 참혹하게 살해한 ‘마산 교수 살인사건’ 범인 전용술(당시 만 49세)이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전용술에 대해 법원은 “맹수보다도 위험하다”고 질타하기도 했다.자신의 은인이던 대학 교수를 참혹하게 살해한 전용술.전용술은 이미 10대 시절 사형 판결을 받았던 적이 있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전용술은 고등학교 1학년 재학 중이던 1972년 당시 여자친구 B씨의 부모가 교제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이들을 폭행했다. 폭행 사건으로 학교에서 퇴학당한 전용술은 재판에 넘겨져 징역 장기 8월, 단기 6월 판결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그리고 출소 후 폭행 사건으로 B씨가 자신을 떠났다는 이유로 1974년 7월 출근 중이던 B씨에게 흉기를 마구 휘둘러 숨지게 했다. 그리고 도주 중 택시를 상대로 강도 짓을 한 후 현금을 빼앗았고 이후 경찰의 추격을 받자 인질극을 벌이다 인질에게 흉기를 휘두르기도 했다. 전용술은 검거 후 재판에 넘겨져 1·2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대법원은 1975년 4월 “범행이 미성년자의 미숙한 정서와 사려에서 비롯된 점을 참작해야 한다”며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모범수로 감형→사회복귀하자 본색 전용술의 초등학교·고등학교 2년 선배로서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던 A씨는 무기수로 수감 중이던 전용술의 옥바라지를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A씨는 자주 면회를 가거나 서신을 보내는 등 전용술을 살뜰히 챙겼다. 이 같은 옥바라지는 A씨가 청와대 경호실에 근무할 때와 대학교수가 된 후에도 계속됐다. A씨가 이 같이 물심양면의 도운 덕분에 전용술은 모범수가 됐고, 1993년 3월 징역 20년으로 감형됐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가석방 돼 다시 바깥세상으로 나오게 됐다.전용술은 출소 후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8000만원을 이용해 돈을 벌면서 1995년 1월 결혼해 자녀까지 출산했다. 하지만 1998년 3월 이혼 후 주식투자 등으로 전 재산을 탕진했다. 자살을 고민하던 전용술은 A씨의 만류로 이 같은 뜻을 접었다. 택시기사로 근근이 돈을 벌던 전용술은 이때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손을 벌리기 시작했다. 용돈 명목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받던 전용술은 2000년 12월 A씨에게 “1000만~2000만원을 주면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도와달라”고 부탁했다.하지만 A씨는 “경제적으로 어렵다”며 전용술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전용술은 A씨에 대한 앙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주변에 “나한테 큰 도움을 준 것처럼 소문이 났지만 정작 A씨에게 도움 받은 것은 별로 없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리고 A씨를 죽이겠다며 수년 동안 칼을 가지고 다녔다. 전용술은 마치 돈을 맡겨놓은 듯이 A씨에게 수시로 전화를 걸어서 돈을 달라고 했다. 이후 2004년 7월 길거리에서 만난 A씨가 “왜 새벽에 수시로 전화를 하느냐”고 꾸짖자, A씨의 단골 술집을 찾아가 술을 마시고 있던 A씨에게 재차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 A씨가 “내게 돈 맡겨 놓았느냐”고 반문하자, 전용술은 A씨를 잔혹하게 살해하고 도망갔다.◇뻔뻔하게 ‘피해자 탓’ 반복…책 출간 시도도 전용술은 이후 도피를 위해 며칠 후 진주에서 택시기사를 죽이고 차량과 금품을 빼앗기 위해 택시기사에게 흉기를 휘둘렀다. 피해를 당한 택시기사는 수차례 흉기에 맞아 중상을 입었으나 가까스로 목숨은 구할 수 있었다. 전용술은 이후 8월 5일 주민 신고를 받고 충돌한 경찰에게 검거됐다. 검거 당시에도 A씨와 택시기사 C씨를 공격할 때 사용한 흉기를 소지하고 있었다.전용술은 검거 이후에도 수사기관이나 재판에서 어떠한 반성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피해자 탓을 하며 뻔뻔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는 “A씨가 신의와 진실을 무너뜨려 자존심을 상하게 해 응징했다”며 “별것 아니었던 제 요구를 거부해 스스로 원치 않는 길을 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선 “A씨가 초래한 일로 구속돼 고통의 나락에서 헤매고 있다”는 황당한 주장을 펴기도 했다.1심 법원은 “눈앞의 작은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생명, 신체를 물건보다도 소홀하게 취급하는 지극히 반문명적 행동을 30년 세월을 뛰어넘어 반복했다”며 “맹수보다도 위험한 인물인 피고인을 또다시 세상에 나오게 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사형을 선고했다.재판부는 “살해 동기가 너무나 이기적이고 파렴치해 어떠한 참작할 만한 사정이 엿보이지 않는다”며 “범행 수법은 지극히 잔혹하고 문명세계에 어울리지 않아 피고인의 범죄적 악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질타했다. 전용술은 판결에 불복해 항소·상고했으나 대법원은 1심의 사형 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전용술의 만행은 사형 판결 이후에도 그치지 않았다. 전용술은 2011년 9월 자신의 두 차례 살인 경험을 기록한 책을 출간하겠다며 수감 중이던 교정기관에 자신의 글을 출판사에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소설 형식이었지만 기존에 수사기관과 법정에서 범행을 정당화한 자신의 주장을 되풀이한 글이었다. 전용술은 교정기관이 요구를 거부하자 소송을 제기했다가 패소했다.
  • 탈냉전 첫걸음…노태우, 韓대통령으로 첫 中방문[그해 오늘]
    [이데일리 김영환 기자] 1992년 9월27일. 노태우 당시 대통령을 실은 공군 1호기가 베이징 서우두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된 이후 43년 만에 처음 한국인이 입국하는 순간이었다. 베이징의 상징인 톈안먼(천안문·天安門) 광장에 태극기가 내걸려 있는 모습은 냉전 시대 종식의 상징적 장면이었다.지난 1992년 9월 중국을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이 베이징 인민대회당 복건청에서 양상곤 중국 국가 주석과 한·중 정상회담을 가졌다.(사진=e영상역사관)1980~1990년대 들어 동북아의 정세는 요동쳤다. 노 대통령의 3박 4일간 중국 공식 방문은 양상쿤(양상곤·楊尙昆) 중국 국가주석의 초청을 받은 것으로, 한국의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이었다. 냉전의 시대, 한국과 중국은 서로 적성국가로 분류하던 사이였다.노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1988년 2월 25일 취임사에서 ‘북방외교’를 본격적인 정부의 대외정책 기조로 설정했다. 취임사를 바탕으로 노 대통령은 같은 해 7월 7일에는 이른바 7·7선언을 발표했고 북방 대륙국들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7·7선언은 남북한 자유왕래 및 북한과 서방, 남한과 사회주의권의 관계개선 협력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다. 노태우 정부는 냉전체제의 해체와 발맞춰 1980년대 말 공산권 국가들과 적극적 외교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북한 역시 북방외교의 구상에 담아냈다.그 일환으로 한국과 중국은 8월 24일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대만과 단교를 하면서까지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노 대통령은 이에 그치지 않고 양국의 발전적 관계를 상징하는 징표로 중국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하기에 이르렀다.이는 북한과 대만을 압박하고자 했던 우리와 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기도 했다. 중국과 소비에트 연방 등에 부속돼 체제를 유지해오던 북한에 압박을 줄 수 있는 카드였다. 중국 역시 대만의 외교적 고립을 강화하려는 노림수를 갖고 있었다.개혁·개방 정책 이후 빠르게 경제 성장을 보이던 중국과, 13억 인구의 새로운 시장이 열린 한국은 경제적 측면에서 급속도로 빠르게 밀착했다. 1992년 64억 달러(약 9조원)이던 대중 교역은 2021년 3015억 달러(431조)를 넘어서 47배 가까이 규모가 커졌다. 지난해 중국은 우리나라의 1위 교역 대상국(24%)이었다.
    김영환 기자 2022.09.27
    [이데일리 김영환 기자] 1992년 9월27일. 노태우 당시 대통령을 실은 공군 1호기가 베이징 서우두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된 이후 43년 만에 처음 한국인이 입국하는 순간이었다. 베이징의 상징인 톈안먼(천안문·天安門) 광장에 태극기가 내걸려 있는 모습은 냉전 시대 종식의 상징적 장면이었다.지난 1992년 9월 중국을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이 베이징 인민대회당 복건청에서 양상곤 중국 국가 주석과 한·중 정상회담을 가졌다.(사진=e영상역사관)1980~1990년대 들어 동북아의 정세는 요동쳤다. 노 대통령의 3박 4일간 중국 공식 방문은 양상쿤(양상곤·楊尙昆) 중국 국가주석의 초청을 받은 것으로, 한국의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이었다. 냉전의 시대, 한국과 중국은 서로 적성국가로 분류하던 사이였다.노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1988년 2월 25일 취임사에서 ‘북방외교’를 본격적인 정부의 대외정책 기조로 설정했다. 취임사를 바탕으로 노 대통령은 같은 해 7월 7일에는 이른바 7·7선언을 발표했고 북방 대륙국들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7·7선언은 남북한 자유왕래 및 북한과 서방, 남한과 사회주의권의 관계개선 협력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다. 노태우 정부는 냉전체제의 해체와 발맞춰 1980년대 말 공산권 국가들과 적극적 외교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북한 역시 북방외교의 구상에 담아냈다.그 일환으로 한국과 중국은 8월 24일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대만과 단교를 하면서까지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노 대통령은 이에 그치지 않고 양국의 발전적 관계를 상징하는 징표로 중국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하기에 이르렀다.이는 북한과 대만을 압박하고자 했던 우리와 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기도 했다. 중국과 소비에트 연방 등에 부속돼 체제를 유지해오던 북한에 압박을 줄 수 있는 카드였다. 중국 역시 대만의 외교적 고립을 강화하려는 노림수를 갖고 있었다.개혁·개방 정책 이후 빠르게 경제 성장을 보이던 중국과, 13억 인구의 새로운 시장이 열린 한국은 경제적 측면에서 급속도로 빠르게 밀착했다. 1992년 64억 달러(약 9조원)이던 대중 교역은 2021년 3015억 달러(431조)를 넘어서 47배 가까이 규모가 커졌다. 지난해 중국은 우리나라의 1위 교역 대상국(24%)이었다.
  • 갑자기 날아온 軍탄알에 스무살 아들을 잃었다[그해 오늘]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17년 9월 26일 오후 4시 10분. 강원도 철원 육군 제6보병사단 소속으로 동료 대원들과 진지공사를 하고 하산하던 이모 일병(당시 만 20세, 이후 상병 추서)이 갑자기 쓰러졌다.이 일병은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에 안면을 직격으로 맞았다. 곧바로 인근의 군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 일병은 같은 날 오후 5시 22분 숨졌다. 학수고대하던 휴가를 불과 10여 일 앞둔 상황이었다.사건 발생 지점에서 불과 400m 지점엔 사격장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사건 초기엔 이 일병이 도비탄(튕겨져 나온 탄알)을 맞은 것이란 추정이 나왔다. 하지만 탄알이 찌그러져 있어야 하는 도비탄과 달리 이 일병을 숨지게 한 탄알은 엑스레이 상으로 깨끗했다. 유족은 육군의 추정에 강하게 반발했다. 송영무 국방부 장관의 지시로 국방부 조사본부가 조사에 들어갔다.사고 발생 13일 후인 2017년 10월 9일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유족의 예상대로 이 일병에게 날아온 총알은 도비탄이 아닌 유탄(빗나간 탄알)이었다. 단순 사고가 아닌 안전불감증이 일으킨 참사였다.부대원들이 이동하던 통행로는 사격장의 사로 뒤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에 있었고,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쌓아 두는 사격장의 흙 언덕은 다른 곳에 비해 낮았다. 애초 총구가 조금만 빗나가도 사고의 위험성이 있는 구조였다.더구나 이 일병이 동료들과 함께 부대로 복귀하던 중에는 사격 중임에도 통해로 통제가 되지 않았다. 당시 이 일병 등 부대원들을 인솔할 간부는 사격음이 들리고 있음에도 그대로 통행로로 부대원들을 이끌고 갔다.이동로에 경계병이 배치돼 있었지만 통제 임무에 대해 간부들에게 제대로 지시받지 못했다. 결국 이 일병 부대원들이 지나갔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국방부 조사본부는 사건의 책임을 물어 사격주통제관이었던 중대장 A씨, 이 일병 일행을 인솔한 소대장 B씨, 부소대장 C씨를 재판에 넘겼다. 보통군사법원은 2018년 6월 A씨에게 금고 1년에 집행유예 2년, B씨와 C씨에겐 각각 벌금 500만원을 선고했다. 형은 그대로 확정됐다.군인권센터는 사건과 관련해 “사건 책임을 일선 부대 초급 간부들에게 전가해 본질을 호도하려는 정황이 포착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 윗선은 법적 처벌을 피해 갔다.
    한광범 기자 2022.09.26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17년 9월 26일 오후 4시 10분. 강원도 철원 육군 제6보병사단 소속으로 동료 대원들과 진지공사를 하고 하산하던 이모 일병(당시 만 20세, 이후 상병 추서)이 갑자기 쓰러졌다.이 일병은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에 안면을 직격으로 맞았다. 곧바로 인근의 군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 일병은 같은 날 오후 5시 22분 숨졌다. 학수고대하던 휴가를 불과 10여 일 앞둔 상황이었다.사건 발생 지점에서 불과 400m 지점엔 사격장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사건 초기엔 이 일병이 도비탄(튕겨져 나온 탄알)을 맞은 것이란 추정이 나왔다. 하지만 탄알이 찌그러져 있어야 하는 도비탄과 달리 이 일병을 숨지게 한 탄알은 엑스레이 상으로 깨끗했다. 유족은 육군의 추정에 강하게 반발했다. 송영무 국방부 장관의 지시로 국방부 조사본부가 조사에 들어갔다.사고 발생 13일 후인 2017년 10월 9일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유족의 예상대로 이 일병에게 날아온 총알은 도비탄이 아닌 유탄(빗나간 탄알)이었다. 단순 사고가 아닌 안전불감증이 일으킨 참사였다.부대원들이 이동하던 통행로는 사격장의 사로 뒤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에 있었고,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쌓아 두는 사격장의 흙 언덕은 다른 곳에 비해 낮았다. 애초 총구가 조금만 빗나가도 사고의 위험성이 있는 구조였다.더구나 이 일병이 동료들과 함께 부대로 복귀하던 중에는 사격 중임에도 통해로 통제가 되지 않았다. 당시 이 일병 등 부대원들을 인솔할 간부는 사격음이 들리고 있음에도 그대로 통행로로 부대원들을 이끌고 갔다.이동로에 경계병이 배치돼 있었지만 통제 임무에 대해 간부들에게 제대로 지시받지 못했다. 결국 이 일병 부대원들이 지나갔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국방부 조사본부는 사건의 책임을 물어 사격주통제관이었던 중대장 A씨, 이 일병 일행을 인솔한 소대장 B씨, 부소대장 C씨를 재판에 넘겼다. 보통군사법원은 2018년 6월 A씨에게 금고 1년에 집행유예 2년, B씨와 C씨에겐 각각 벌금 500만원을 선고했다. 형은 그대로 확정됐다.군인권센터는 사건과 관련해 “사건 책임을 일선 부대 초급 간부들에게 전가해 본질을 호도하려는 정황이 포착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 윗선은 법적 처벌을 피해 갔다.
  • 호의 베풀던 70대 노인…실체는 악마였다[그해 오늘]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07년 9월 25일. 추석 당일 오후 3시 36분. 30대 남성 A씨는 모르는 번호로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저희 아까 전화기 빌려드린 사람인데요. 배 타다가 갇힌 거 같아요. 경찰보트 좀 불러주세요.”해당 번호는 당일 오전 A씨 아내가 휴대전화를 빌려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던 번호였다. A씨 부부는 즉각 경찰에 신고했다. 그리고 “경찰에 신고했어요. 납치인가요”라고 답문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추가 답장은 오지 않았다.신고를 받은 경찰은 발신번호를 추적했다. 20대 중반 직장인 B씨의 휴대전화 번호였다. B씨는 추석 연휴를 맞아 친구 C씨와 함께 전남 보성에 여행을 온 상태였다.◇범행 직후 태연하게 일상생활…의심받자 큰소리 치기도경찰은 즉각 수사에 나섰고, B씨와 C씨가 당일 오전 보성의 한 선착장에서 어선을 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경찰은 B씨 등이 탔던 것으로 추정되는 배의 주인을 찾아 나섰다.1938년생, 당시 만 69세의 오종근이었다. 부인과의 사이에서 7명의 자식을 두고 있던 고령의 노인을 범인으로 쉽게 의심하긴 힘들었다. 2007년 4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보성 어부 살인사건 범인 오종근. (사진=YTN뉴스 갈무리)경찰이 오종근의 가족에게 연락을 했고, 오종근이 어장에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경찰의 연락을 받고 보성에 거주 중인 오종근의 딸과 사위가 배를 타고 어장으로 왔다. 오종근은 어장에서 태연하게 주꾸미 채취 작업을 마무리하고 어구를 정리하던 중이었다.당시 선착장에선 20대 여성 2명의 실종 소식이 퍼진 상태였다. 다른 어민들도 오종근을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종근은 뻔뻔했다. 선착장 부근 평상에 있던 주민들에게 먼저 다가가 “내가 칠십 먹었다. 여자 2명을 어떻게 데리고 가겠나”고 큰소리를 치고 집으로 돌아갔다.경찰은 선착장에 도착한 오종근의 선박에 대한 감식을 시작했다. 그리고 선박 내부에서 피해자들의 신용카드 및 볼펜, 머리끈, 머리카락 등을 발견했다. 경찰은 다음날 오종근을 긴급체포했다.◇피해자들 문자·카메라·신고 등으로 범행 밝혀져체포 직후에도 오종근은 여성들을 태운 사실은 인정했지만 살인 혐의는 강력 부인했다. 오종근은 “여성 한 명이 볼일을 보기 위해 이동하던 중 실족해 바다에 빠졌고 다른 여성도 이를 잡으려다 같이 바다에 빠졌다”고 주장했다.그러던 중 피해자 중 한 명의 사체가 26일 아침 발견됐다. 사체엔 목졸림 흔적과 함께 온몸에 멍과 철과상이 있었다. 경찰의 추궁이 계속되자 오종근은 결국 여성들의 살해사실을 인정했다. 다른 피해자의 사체는 28일 발견됐다.오종근은 피해자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척 배에 태운 후 바다 한가운데로 이동해 성추행을 시도했다. 여성들이 격렬하게 반항하자 이들을 힘으로 제압해 바다에 빠뜨렸다. 70세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평생 바닷일을 해온 오종근은 당시 기계장비 없이 어업을 할 정도로 힘이 강했다. 바다에 빠진 여성이 살기 위해 배 위에 오르려 하자 오종근은 배 위에서 여성에게 갈고리채를 휘둘러 숨지게 했다.보성 어부 살인 사건 범인 오종근이 체포 직후 자신의 배에서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자백을 받은 경찰은 이 사건 발생 전 9월 초 바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남녀 대학생 D씨와 E씨(모두 당시 만 19세) 사건에 대해서도 오종근 관련성을 수사했다. 하지만 오종근은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증거 확보에 나선 경찰은 사망한 여대생이 실종 무렵인 8월 31일 저녁 시간대에 119에 건 4차례 전화에서 오종근의 목소리가 녹음된 것을 확인했다. 또 다른 어망에 피해자들 중 한 명 것으로 보이는 디지털 카메라가 걸려 올라왔다. 복원된 메모리카드에선 배 위에서의 오종근 모습이 선명하게 담겼다.◇“팔자가 그렇다”·“피해자 운이 없었다”…반성은 없다경찰 조사 결과 오종근은 두 번째 범행 25일 전인 8월 31일 오후 선착장에서 D씨 일행을 배에 태웠다. 두 번째 범행 수법과 동일하게 바다 한가운데서 일행 중 여성을 성추행하려는 목적이었다.70세 노인인 자신이 10대 남성을 힘으로 제압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오종근은 기습적으로 남성 D씨를 바다에 빠뜨렸다. 두 사람이 나란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때 몰래 뒤로 다가가 민 것이다. 피해 남성이 배에 오르려 하자 갈고리채를 휘둘러 숨지게 했다. 이후 남겨진 여성이 저항하자 바다에 빠뜨려 또다시 갈고리채를 휘둘렀다.오종근은 첫 범행 이후에도 두 번째 범행과 마찬가지로 태연하게 일상생활을 했다. 그는 잔혹한 살인을 저지른 이후에도 태연히 선착장으로 돌아와 아무렇지 않게 생활을 하다 2차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체포 이후에도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범행 동기를 묻는 수사관들의 질문에 “팔자가 그렇다”, “피해자들이 운이 없었고 불쌍하다”, “서로 죽이고 죽으라는 팔자로 태어났나 보다” 등의 뻔뻔한 답변을 계속했다. 1심은 “무려 4명의 젊디 젊은 피해자들이 극도의 공포와 분노 속에 고귀한 생명을 잃었지만, 진솔한 참회나 피해회복을 외면한 채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하고 있다”며 개선 교화의 가능성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며 사형을 선고했다. 수사기관에서 범행을 자백했던 오종근은 1심 판결 후 또다시 살인 일체를 부인하며 항소했다. 2심은 ”진솔한 참회나 최소한의 피해회복도 외면한 채 허무맹랑한 변명만 무책임하게 늘어놓아 피해자들과 유족들에게 더 큰 상처를 안겨주고 있다“며 ”개전의 정이나 개선 교화의 가능성을 찾기 어렵다“며 1심의 사형 판결을 유지했다. 대법원도 2010년 6월 사형 판결을 확정했다. 현재 만 84세인 오종근은 여전히 광주교도소에서 사형수 신분으로 복역 중이다.
    한광범 기자 2022.09.25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07년 9월 25일. 추석 당일 오후 3시 36분. 30대 남성 A씨는 모르는 번호로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저희 아까 전화기 빌려드린 사람인데요. 배 타다가 갇힌 거 같아요. 경찰보트 좀 불러주세요.”해당 번호는 당일 오전 A씨 아내가 휴대전화를 빌려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던 번호였다. A씨 부부는 즉각 경찰에 신고했다. 그리고 “경찰에 신고했어요. 납치인가요”라고 답문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추가 답장은 오지 않았다.신고를 받은 경찰은 발신번호를 추적했다. 20대 중반 직장인 B씨의 휴대전화 번호였다. B씨는 추석 연휴를 맞아 친구 C씨와 함께 전남 보성에 여행을 온 상태였다.◇범행 직후 태연하게 일상생활…의심받자 큰소리 치기도경찰은 즉각 수사에 나섰고, B씨와 C씨가 당일 오전 보성의 한 선착장에서 어선을 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경찰은 B씨 등이 탔던 것으로 추정되는 배의 주인을 찾아 나섰다.1938년생, 당시 만 69세의 오종근이었다. 부인과의 사이에서 7명의 자식을 두고 있던 고령의 노인을 범인으로 쉽게 의심하긴 힘들었다. 2007년 4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보성 어부 살인사건 범인 오종근. (사진=YTN뉴스 갈무리)경찰이 오종근의 가족에게 연락을 했고, 오종근이 어장에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경찰의 연락을 받고 보성에 거주 중인 오종근의 딸과 사위가 배를 타고 어장으로 왔다. 오종근은 어장에서 태연하게 주꾸미 채취 작업을 마무리하고 어구를 정리하던 중이었다.당시 선착장에선 20대 여성 2명의 실종 소식이 퍼진 상태였다. 다른 어민들도 오종근을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종근은 뻔뻔했다. 선착장 부근 평상에 있던 주민들에게 먼저 다가가 “내가 칠십 먹었다. 여자 2명을 어떻게 데리고 가겠나”고 큰소리를 치고 집으로 돌아갔다.경찰은 선착장에 도착한 오종근의 선박에 대한 감식을 시작했다. 그리고 선박 내부에서 피해자들의 신용카드 및 볼펜, 머리끈, 머리카락 등을 발견했다. 경찰은 다음날 오종근을 긴급체포했다.◇피해자들 문자·카메라·신고 등으로 범행 밝혀져체포 직후에도 오종근은 여성들을 태운 사실은 인정했지만 살인 혐의는 강력 부인했다. 오종근은 “여성 한 명이 볼일을 보기 위해 이동하던 중 실족해 바다에 빠졌고 다른 여성도 이를 잡으려다 같이 바다에 빠졌다”고 주장했다.그러던 중 피해자 중 한 명의 사체가 26일 아침 발견됐다. 사체엔 목졸림 흔적과 함께 온몸에 멍과 철과상이 있었다. 경찰의 추궁이 계속되자 오종근은 결국 여성들의 살해사실을 인정했다. 다른 피해자의 사체는 28일 발견됐다.오종근은 피해자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척 배에 태운 후 바다 한가운데로 이동해 성추행을 시도했다. 여성들이 격렬하게 반항하자 이들을 힘으로 제압해 바다에 빠뜨렸다. 70세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평생 바닷일을 해온 오종근은 당시 기계장비 없이 어업을 할 정도로 힘이 강했다. 바다에 빠진 여성이 살기 위해 배 위에 오르려 하자 오종근은 배 위에서 여성에게 갈고리채를 휘둘러 숨지게 했다.보성 어부 살인 사건 범인 오종근이 체포 직후 자신의 배에서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자백을 받은 경찰은 이 사건 발생 전 9월 초 바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남녀 대학생 D씨와 E씨(모두 당시 만 19세) 사건에 대해서도 오종근 관련성을 수사했다. 하지만 오종근은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증거 확보에 나선 경찰은 사망한 여대생이 실종 무렵인 8월 31일 저녁 시간대에 119에 건 4차례 전화에서 오종근의 목소리가 녹음된 것을 확인했다. 또 다른 어망에 피해자들 중 한 명 것으로 보이는 디지털 카메라가 걸려 올라왔다. 복원된 메모리카드에선 배 위에서의 오종근 모습이 선명하게 담겼다.◇“팔자가 그렇다”·“피해자 운이 없었다”…반성은 없다경찰 조사 결과 오종근은 두 번째 범행 25일 전인 8월 31일 오후 선착장에서 D씨 일행을 배에 태웠다. 두 번째 범행 수법과 동일하게 바다 한가운데서 일행 중 여성을 성추행하려는 목적이었다.70세 노인인 자신이 10대 남성을 힘으로 제압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오종근은 기습적으로 남성 D씨를 바다에 빠뜨렸다. 두 사람이 나란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때 몰래 뒤로 다가가 민 것이다. 피해 남성이 배에 오르려 하자 갈고리채를 휘둘러 숨지게 했다. 이후 남겨진 여성이 저항하자 바다에 빠뜨려 또다시 갈고리채를 휘둘렀다.오종근은 첫 범행 이후에도 두 번째 범행과 마찬가지로 태연하게 일상생활을 했다. 그는 잔혹한 살인을 저지른 이후에도 태연히 선착장으로 돌아와 아무렇지 않게 생활을 하다 2차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체포 이후에도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범행 동기를 묻는 수사관들의 질문에 “팔자가 그렇다”, “피해자들이 운이 없었고 불쌍하다”, “서로 죽이고 죽으라는 팔자로 태어났나 보다” 등의 뻔뻔한 답변을 계속했다. 1심은 “무려 4명의 젊디 젊은 피해자들이 극도의 공포와 분노 속에 고귀한 생명을 잃었지만, 진솔한 참회나 피해회복을 외면한 채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하고 있다”며 개선 교화의 가능성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며 사형을 선고했다. 수사기관에서 범행을 자백했던 오종근은 1심 판결 후 또다시 살인 일체를 부인하며 항소했다. 2심은 ”진솔한 참회나 최소한의 피해회복도 외면한 채 허무맹랑한 변명만 무책임하게 늘어놓아 피해자들과 유족들에게 더 큰 상처를 안겨주고 있다“며 ”개전의 정이나 개선 교화의 가능성을 찾기 어렵다“며 1심의 사형 판결을 유지했다. 대법원도 2010년 6월 사형 판결을 확정했다. 현재 만 84세인 오종근은 여전히 광주교도소에서 사형수 신분으로 복역 중이다.
  • 대낮 도심서 무장간첩이 시민들에게 총을 쐈다[그해 오늘]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1984년 9월 24일. 오후 1시 30분께 대구의 한 식당에서 주인 전갑숙(당시 29세)씨와 여종업원 강모(당시 18세)씨가 총을 맞고 쓰러진 채 발견됐다. 외출했다 돌아온 가정부 박모씨가 경찰에 신고했고, 총상을 입은 두 사람은 급하게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사망했다.그리고 25분 후 인근의 한 미용실에서 총성이 울렸다. 미용실 주인 A씨는 세 발의 총을 맞고 쓰러졌다. A씨의 비명을 듣고 인근 제화점 주인 김모씨가 급하게 달려왔다.1984년 9월 25일자 경향신문 기사김씨는 A씨에게 총을 쏜 20대로 보이는 장발의 남성과 마주했다. 해당 남성은 총기를 김씨에게 겨누고 위협했다. 그리고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목을 졸리던 김씨는 해당 남성을 발로 차 넘어뜨렸다.그리고 현장에 달려온 다른 주민 2명이 합세해 이 남성을 제압했다. 제압당한 남성은 곧바로 소지품으로 갖고 있던 알약을 먹었다. 청산가리였다. 이 남성은 곧바로 숨졌다.도심 한복판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에 수사기관도 경악했다. 수사기관은 숨진 남성의 신원 파악에 나섰지만 어떠한 기록도 찾을 수 없었다. 범행에 사용한 총기는 벨기에제 브로닝 6·35구경 권총이었다. 당시 북한 대남 공작원들이 사용하던 총기였다. 총기엔 소음기가 달려있었다. 범인은 북한이 보낸 무장간첩이었던 것이다. 죽은 무장간첩은 검거 시 자살을 위해 청산가리와 함께 허리띠 버클에 자폭용 폭탄을 가지고 있었다. 또 간첩들이 사용하는 통신기기 등을 비롯해 대남 공작에 사용할 물품만 40여 점이었다. 대공기관은 이 간첩이 대남 테러공작 임무를 갖고 남한에 침투했다고 판단했다. 침투 시기와 루트는 사건이 있기 며칠 전인 9월 18~20일 사이 남해안으로 추정했다. 피해자 중 한 명인 식당 종업원 10대 강씨를 포섭하려 했으나, 강씨가 간첩 신분을 눈치채고 신고하려 했거나 자수를 권유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식당 주인 전씨가 살해 장면을 목격하자 이를 죽였고, 자신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 A씨도 살해하려 했다는 추정이었다.1984년 9월 27일 동아일보 기사3개월 전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전씨는 사망 당시 10개월 된 아들을 두고 있었다. 아들은 결국 할머니 임춘자씨 손에 키워졌다.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임씨는 정부에 보상을 탄원해봤지만 아무런 경제적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엄혹했던 시기 ‘간첩 피해자’ 가족이라는 신분조차 쉽게 드러내기 힘들었기에 임씨는 손자에게 전씨 죽음과 관련한 이야기를 비밀로 했다. 임씨는 부모님 존재에 대해 묻는 손자를 향해 손자 유년 시절엔 “미국에 살고 있다”고, 사춘기 시절엔 “아빠가 죽고 엄마도 얼마 후 단순 사고로 죽었다”고 말했다.그러던 임씨는 말기 폐암으로 투병하던 2014년 1월 서른 살이 넘은 손자 김병집씨에게 며느리인 전씨 죽음에 대해 털어놓은 후 “한을 풀어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임씨는 같은 해 5월 세상을 떠났다.김씨는 이후 본격적으로 국가를 상대로 진상규명에 배상을 요구했다. 국가정보원 등을 상대로 관련 기록 공개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결국 그는 2018년 국가와 대구광역시를 상대로 5억원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하지만 법원은 “국가의 과실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고, 전씨는 당시 국가보안법상 원호대상자도 아니었다. 아울러 소멸시효 5년이 지났다”며 청구를 기각했다.
    한광범 기자 2022.09.24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1984년 9월 24일. 오후 1시 30분께 대구의 한 식당에서 주인 전갑숙(당시 29세)씨와 여종업원 강모(당시 18세)씨가 총을 맞고 쓰러진 채 발견됐다. 외출했다 돌아온 가정부 박모씨가 경찰에 신고했고, 총상을 입은 두 사람은 급하게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사망했다.그리고 25분 후 인근의 한 미용실에서 총성이 울렸다. 미용실 주인 A씨는 세 발의 총을 맞고 쓰러졌다. A씨의 비명을 듣고 인근 제화점 주인 김모씨가 급하게 달려왔다.1984년 9월 25일자 경향신문 기사김씨는 A씨에게 총을 쏜 20대로 보이는 장발의 남성과 마주했다. 해당 남성은 총기를 김씨에게 겨누고 위협했다. 그리고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목을 졸리던 김씨는 해당 남성을 발로 차 넘어뜨렸다.그리고 현장에 달려온 다른 주민 2명이 합세해 이 남성을 제압했다. 제압당한 남성은 곧바로 소지품으로 갖고 있던 알약을 먹었다. 청산가리였다. 이 남성은 곧바로 숨졌다.도심 한복판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에 수사기관도 경악했다. 수사기관은 숨진 남성의 신원 파악에 나섰지만 어떠한 기록도 찾을 수 없었다. 범행에 사용한 총기는 벨기에제 브로닝 6·35구경 권총이었다. 당시 북한 대남 공작원들이 사용하던 총기였다. 총기엔 소음기가 달려있었다. 범인은 북한이 보낸 무장간첩이었던 것이다. 죽은 무장간첩은 검거 시 자살을 위해 청산가리와 함께 허리띠 버클에 자폭용 폭탄을 가지고 있었다. 또 간첩들이 사용하는 통신기기 등을 비롯해 대남 공작에 사용할 물품만 40여 점이었다. 대공기관은 이 간첩이 대남 테러공작 임무를 갖고 남한에 침투했다고 판단했다. 침투 시기와 루트는 사건이 있기 며칠 전인 9월 18~20일 사이 남해안으로 추정했다. 피해자 중 한 명인 식당 종업원 10대 강씨를 포섭하려 했으나, 강씨가 간첩 신분을 눈치채고 신고하려 했거나 자수를 권유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식당 주인 전씨가 살해 장면을 목격하자 이를 죽였고, 자신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 A씨도 살해하려 했다는 추정이었다.1984년 9월 27일 동아일보 기사3개월 전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전씨는 사망 당시 10개월 된 아들을 두고 있었다. 아들은 결국 할머니 임춘자씨 손에 키워졌다.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임씨는 정부에 보상을 탄원해봤지만 아무런 경제적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엄혹했던 시기 ‘간첩 피해자’ 가족이라는 신분조차 쉽게 드러내기 힘들었기에 임씨는 손자에게 전씨 죽음과 관련한 이야기를 비밀로 했다. 임씨는 부모님 존재에 대해 묻는 손자를 향해 손자 유년 시절엔 “미국에 살고 있다”고, 사춘기 시절엔 “아빠가 죽고 엄마도 얼마 후 단순 사고로 죽었다”고 말했다.그러던 임씨는 말기 폐암으로 투병하던 2014년 1월 서른 살이 넘은 손자 김병집씨에게 며느리인 전씨 죽음에 대해 털어놓은 후 “한을 풀어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임씨는 같은 해 5월 세상을 떠났다.김씨는 이후 본격적으로 국가를 상대로 진상규명에 배상을 요구했다. 국가정보원 등을 상대로 관련 기록 공개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결국 그는 2018년 국가와 대구광역시를 상대로 5억원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하지만 법원은 “국가의 과실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고, 전씨는 당시 국가보안법상 원호대상자도 아니었다. 아울러 소멸시효 5년이 지났다”며 청구를 기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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