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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용익의 록코노믹스]라이브네이션, 콘서트 관객 백신 의무화 추진
    라이브네이션, 콘서트 관객 백신 의무화 추진
    피용익 기자 2021.08.08
    [이데일리 피용익 기자] 미국 최대 공연 기획사 라이브네이션이 코로나19 백신을 접종한 관객만 공연을 관람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한다.버라이어티가 지난 6일(현지시간) 입수한 문서에 따르면 라이브네이션은 최근 아티스트들에게 이같은 내용의 가이드라인을 발송했다.라이브네이션은 자사의 공연장에서 콘서트를 계획 중인 아티스트들이 팬들에게 백신 접종을 의무적으로 요구하고 공연장 현지의 방역 지침에 따라 코로나19 음성 판정 결과서를 제출하도록 하는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라이브네이션이 이같은 방안을 추진하는 것은 미국인들에게 백신 접종을 독려함으로써 델타 변이 확산을 억제하고, 이를 통해 코로나19 이후 침체된 공연 사업을 정상화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올 하반기 라이브네이션이 주최하는 페스티벌에 참가하는 관람객은 약 300만명에 달할 것으로 회사 측은 추산하고 있다.마이클 라피노 라이브 네이션 최고경영자(CEO)는 공연장 관객의 백신 접종 의무화는 “훌륭한 모델”이라며 “이번 조치로 더 많은 사람이 백신을 맞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앞서 라이브네이션은 지난달 29일부터 이달 1일까지 시카고에서 열린 록 페스트벌 ‘롤라팔루자’에서도 백신 접종자와 72시간 이내 음성 판정 증명서를 제출한 참석자에게만 공연장 입장을 허용했다.라이브네이션은 또 직원들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스태프들이 공연장이나 사무실에 출입하기 위해선 오는 10월4일까지 백신을 접종해야 한다고 고지했다.포브스는 라이브네이션의 이같은 가이드라인이 요나스 브러더스, 마룬 파이브, 핏불 등 올 가을 예정된 아티스트들의 공연뿐 아니라 필라델피아의 ‘메이드 인 아메리카 페스트’, 캘리포니아의 ‘원더랜드 페스티벌’ 등 대규모 공연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전했다.다만 라이브네이션의 백신 접종 의무화 방안이 계획대로 추진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백신 접종에 반대하는 아티스트들과 팬들도 있기 때문이다. 영국 싱어송라이터 에릭 클랩튼이 대표적이다.클랩튼은 지난달 21일 코로나19 백신 접종 인증을 요구하는 공연장 무대에 서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는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나이트클럽과 공연장 출입을 위해선 백신 접종 인증이 필요하다고 밝힌 데 대해 이같은 입장을 표시했다.클랩튼은 “총리의 발표에 이어 나는 내 입장을 발표해야 할 의무를 느낀다”며 “나는 (백신 인증으로) 식별된 관객이 있는 어떠한 무대에서도 연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클랩튼은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된 이후 방역 조치와 백신 정책에 대해 계속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 왔다. 그는 지난해 12월 밴 모리슨과 함께 이동 제한(록다운)에 반대하는 노래 ‘스탠드 앤 딜리버’를 부른 바 있다. 올해 2월에는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을 접종한 직후 ‘처참한’ 경험을 했다고 밝히면서 백신의 안전성을 과장하는 보건당국을 향해 ‘프로파간다’라고 비난했다. 클랩튼은 AZ 백신 접종 후 손과 발에 심한 통증을 느껴 2주간 불편을 겪었다고 토로했다.이와 관련, 라이브네이션 측은 스태프와 팬들에게 코로나19 백신 인증을 요구할지 여부는 아티스트들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전했다.지난달 29일(현지시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롤라팔루자 뮤직 페스티벌에 관람객들이 입장하고 있다. (사진=AFP)
  • [피용익의 록코노믹스]성탄절마다 연금 타는 가수들
    성탄절마다 연금 타는 가수들
    피용익 기자 2020.12.19
    [이데일리 피용익 기자] 머라이어 캐리가 1994년에 발표한 크리스마스 노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가 12월 셋째주 빌보드 싱글 차트(Hot 100) 1위를 차지해 화제다. 해마다 성탄절 시즌이 되면 가장 많이 들리는 노래 가운데 하나인 이 곡은 발표 당시에는 싱글 차트에 오르지 못했다. 싱글 음반으로 발표된 곡만 차트에 진입할 수 있다는 빌보드의 규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1998년부터 빌보드가 앨범 수록곡도 싱글 차트에 집계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특히 2005년부터는 디지털 다운로드를 차트에 반영하기 시작했고, 2006년부터 음원 스트리밍 횟수도 집계하기 시작했다.이 때까지만 해도 캐리의 노래는 빌보드 싱글 차트 진입할 수 없었다. 1994년에 발표된 곡이 아무런 편곡 없이 재생된 것이기 때문에 ‘재발매’로 간주됐고, 재발매된 곡은 차트 집계에 부적격하다는 규정이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빌보드가 2012년 차트 집계 기준을 ‘모든 노래’로 수정하면서 수십년이 지난 노래도 ‘차트 역주행’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이후 캐리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는 2013년 1월 첫째주 빌보드 싱글 차트 21위에 올랐고, 2017년에는 3위까지 진입했다. 그리고 지난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처음으로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오른 데 이어 올해까지 2년 연속 크리스마스 시즌 최고 인기 노래로 인정받았다. 한국 멜론 차트에도 19일 현재 6위에 올라 있다.음악 업계에 따르면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가 벌어들이는 저작권료는 매년 5억원 이상이다. 캐리는 노래를 불렀을 뿐만 아니라 이 곡의 공동 작곡자이기도 하다. 요즘엔 음반이 잘 팔리지 않지만, 음원 스트리밍과 광고, 드라마, 영화 배경음악 등에서 꾸준히 저작권료가 발생하고 있다.이 곡 외에도 왬의 “Last Christmas”, 슬레이드의 “Merry Xmas Everybody”, 더 포그스의 “Fairytale Of New York”, 빙 크로스비의 “White Christmas”, 아리아나 그란데의 “Santa Tell Me” 등은 매년 겨울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으면서 저작권자들의 ‘연금’ 역할을 하고 있다.한국에도 크리스마스 시즌마다 인기를 끄는 노래가 있다. 아이유가 2010년 12월 발표한 미니 앨범 ‘Real’에 수록된 “미리 메리 크리스마스”는 대표적인 ‘성탄 연금송’으로 꼽힌다. 신사동호랭이와 최규성이 작곡하고 최원갑이 작사한 이 곡은 매년 12월마다 차트에 재진입해 크리스마스가 다가올수록 역주행을 즐긴다. 보아가 2005년 12월 일본에서 발표한 “メリクリ(메리 크리)”도 해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일본 차트에서 역주행하며 변치 않은 인기를 보여주고 있다.머라이어 캐리의 1994년 앨범 ‘Merry Christmas’(왼쪽)와 아이유의 2010년 미니앨범 ‘Real’.
  • [피용익의 록코노믹스]유니버설이 밥 딜런의 저작권을 산 이유
    유니버설이 밥 딜런의 저작권을 산 이유
    피용익 기자 2020.12.12
    [이데일리 피용익 기자] 밥 딜런은 약 60년 간의 음악 활동을 통해 다양한 곡을 썼다. 포크 발라드에서부터 록, 컨트리, 그리고 가스펠까지 그가 작곡한 노래는 600곡이 넘는다. 이 모든 곡에 대한 판권은 이제 유니버설 뮤직 그룹이 갖게 됐다. 앞으로는 딜런이 자신의 옛 노래를 통해 아무런 수입도 얻지 못한다는 의미다. 딜런과 유니버설이 체결한 정확한 계약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딜런은 판권을 양도한 대가로 2억 달러 이상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3억 달러에 육박한다는 말도 있다.딜런은 “Like a Rolling Stone” “Blowin’ in the Wind” “Knocking on Heaven’s Door” 등 수많은 명곡을 작곡했다. 지난 2016년 가수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을 정도로 시적인 가사를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처럼 딜런은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뮤지션이지만, 전성기가 한참 지난 고령의 가수이기도 하다. 음원 순위에서 그의 노래를 찾아보기 힘든 것은 물론이고, 그가 얼마나 오래 무대에 설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이 때문에 유니버설이 그에게 2억~3억 달러나 주고 판권을 사들인 이유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대중음악 업계 관계자들은 딜런의 판권을 사들인 유니버설이 갖게 될 이득은 생각보다 클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NBC 뉴스가 보도했다.첫번째 이유는 딜런이 대부분의 노래를 혼자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가 그의 노래의 유일한 저작권자라는 뜻이다. 비틀즈의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롤링 스톤즈의 믹 재거와 키이스 리처즈 등 대부분 밴드가 공동 작곡을 한 것과 달리 솔로 아티스트인 딜런은 작사에서 작곡, 편곡까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따라서 유니버설은 앞으로 딜런의 노래가 스트리밍되거나 드라마 또는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나오거나 누군가 커버곡을 부를 때 받는 저작권료를 독점할 수 있다. 두번째 이유는 딜런의 노래가 다른 아티스트들에 의해 폭넓게 리메이크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딜런의 곡은 6000회 이상 커버된 것으로 알려졌다. 비틀즈, 에릭 클랩튼, 건즈 앤 로지스, 콜드플레이 등 유명 아티스트들도 예외가 아니다. 김광석의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의 원곡도 딜런의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이다. 워낙 많은 명곡을 남겼기 때문에 앞으로도 커버곡 발표는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유니버설은 이로부터 나오는 모든 저작권료를 챙기게 된다.세번째 이유는 딜런의 노래가 영화와 드라마, 광고 등에 자주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인터넷 무비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딜런의 노래는 영화 ‘포레스트 검프’ 등 800편의 영화의 사운드 트랙으로 사용됐다. 앞으로 이 영화들이 TV에서 방영될 때마다 유니버설은 저작권료를 받게 된다. 사실상 끊임없는 수입원이 되는 셈이다.유니버설이 왜 딜런의 판권을 거액을 들여 사들였는지는 루시언 그레인지 유니버설 뮤직 그룹 최고경영자(CEO)의 발언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그는 지난 7일(현지시간) 딜런과의 계약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지금으로부터 수십년간, 심지어 수백년간 밥 딜런의 노랫말과 음악은 어느 곳에서든 계속해서 불려지고 연주될 것이며 또한 사랑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딜런과 유니버설의 이번 계약 외에도 최근 음악 업계에서는 뮤지션들의 판권 양도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여성 가수 스티비 닉스는 최근 8000만 달러를 받고 프라이머리 웨이브 뮤직에 자신의 판권을 넘겼다. 힙노시스 송즈 펀드는 올해 3월부터 9월까지 6억7000만 달러를 들여 블론디, 릭 제임스, 배리 매닐로우 등으로부터 4만4000곡 이상의 권리를 사들였다.밥 딜런
  • [피용익의 록코노믹스]탐욕이 불러온 반 헤일런의 침몰
    탐욕이 불러온 반 헤일런의 침몰
    피용익 기자 2020.10.10
    [이데일리 피용익 기자] 이제 모두 옛날 얘기가 됐다. 미국 하드록/헤비메탈 밴드 반 헤일런의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 프로듀서였던 에디 반 헤일런이 2020년 10월 6일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1970년대 말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해 록 음악계에 충격을 안겨줬던 에디 반 헤일런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됐다.그가 이끌었던 밴드 반 헤일런은 12장의 스튜디오 앨범을 통해 전 세계에서 800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 이 중 ‘1984’를 비롯한 5개 앨범은 미국에서만 1000만장 이상씩 팔렸다. 1983년에 발표한 “Jump”가 빌보드 싱글 차트(Hot 100) 1위에 올랐고, 빌보드 메인스트림 록 차트 1위에 오른 곡은 총 13개에 달한다.그러나 역사상 가장 성공한 기타리스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에디 반 헤일런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위기는 탐욕에서 비롯됐다. 마이클 잭슨의 “Beat It” 기타 솔로를 ‘공짜로’ 녹음해줬던 그가 돈을 밝혔으리라고는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에디 반 헤일런의 매니저로 활동했던 노엘 몽크의 회고록을 읽어보면 밴드의 성공이 멤버들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알 수 있다. 여느 밴드와 마찬가지로 반 헤일런도 단지 음악이 좋아 모인 젊은이들이었다. 에디 반 헤일런(기타), 알렉스 반 헤일런(드럼), 데이비드 리 로스(보컬), 마이클 앤서니(베이스)는 1970년대 중반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유명 클럽인 위스키 어 고 고 등에서 연주를 하며 인지도를 쌓았다.반 헤일런은 출발부터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이들은 메이저 음반 회사 워너 브러더스 레코드의 모 오스틴 회장에게 직접 발탁돼 1978년 첫 앨범 ‘Van Halen’을 발표했다. 록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앨범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밴 헤일런의 데뷔 앨범은 발매 직후 빌보드 앨범 차트 19위에 오르는 대성공을 거뒀다.문제는 ‘노예 계약’이었다. 반 헤일런의 데뷔 앨범은 발매 몇 달 만에 플래티넘(100만장 판매)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는데도, 멤버들은 돈을 손에 쥐지 못했다. 오히려 활동을 할수록 회사에 갚아야 하는 빚이 늘어나는 구조였다. 심지어 워너 브러더스는 반 헤일런이 2년마다 ‘똑같은’ 조건으로 ‘평생’ 계약을 갱신하도록 하고 있었다. 결국 반 헤일런은 로드 매니저였던 노엘 몽크를 새 매니저로 고용해 잘못을 바로잡기로 했다. 몽크의 첫 번째 임무는 반 헤일런이 과거 무명 시절에 워너 브러더스와 체결했던 노예 계약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었다. 몽크는 “레코드 회사에 로열티와 회계 장부를 요구하는 서류를 끊임없이 제출해서 그들은 나를 지긋지긋하게 여겼다”고 회고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일이 일어났다. 몽크가 보내는 서류들에 질려버렸던 탓인지 워너 브러더스가 반 헤일런과의 재계약 시기를 놓쳐 버린 것이다. 몽크는 기다렸다는 듯이 워너 브러더스의 모 오스틴 회장과 만난 자리에서 반 헤일런이 이제 ‘자유의 몸’이 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진행된 재계약 협상을 통해 몽크는 반 헤일런 멤버들이 곧바로 백만장자가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몽크의 수완은 뛰어났다. 1983년 5월 29일부터 6월 4일까지 열린 ‘US 페스티벌’ 당시에는 주최측과 협상해 반 헤일런보다 높은 출연료를 받는 밴드가 없도록 한 일화는 유명하다. 반 헤일런은 이 페스티벌에서 단 1회 공연으로 150만달러를 받았다. 몽크에 따르면 반 헤일런의 위기는 이 때부터 시작됐다. 손에 돈이 들어오고 여자와 술과 마약을 마음껏 접할 수 있게 되면서 멤버들 사이에 불화가 싹텄다. 서로 더 많은 돈을 가져가겠다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무명 시절 밴드의 수입을 4명이 똑같이 나누기로 했던 약속은 깨져버렸다.갈등의 두 축은 보컬리스트인 데이비드 리 로스와 리더이자 기타리스트인 에디 반 헤일런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밴드의 작곡가였고, 가장 인기가 높은 멤버들이었다. 두 사람이 없는 반 헤일런은 있을 수 없었다. 알렉스 반 헤일런은 동생 에디의 보호를 받았다. 갈등과 불화의 희생양으로 선택된 것은 베이시스트였던 마이클 앤서니였다. 멤버들은 앤서니를 불러 음반의 로열티를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는 반 헤일런의 상업적 성공이 정점에 이르렀던 앨범 ‘1984’를 발표한 직후였다. 반 헤일런의 탐욕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밴드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다 준 매니저 노엘 몽크를 해고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밴드 수입의 20%를 가져가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반 헤일런은 7년 동안 몽크와 일하면서 월 단위로 계약을 갱신했던 것도 모자라, 해고할 때는 7년간의 회계장부를 들여다보며 매니저의 횡령이 있었는지를 조사하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해고당한 옛 매니저의 주장을 그대로 믿기는 어려운 부분도 있다.)밴드 멤버의 로열티를 빼앗고 매니저를 해고한 것으로도 갈등은 봉합되지 않았다. 데이비드 리 로스는 ‘1984 투어’ 직후 반 헤일런을 탈퇴했다. 밴드의 사운드, 이미지, 스케쥴 등과 관련해 에디 반 헤일런과의 주도권 싸움 끝에 탈퇴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솔로 활동을 하면 수입을 나누지 않고 더 많은 돈을 벌 것이라는 계산 때문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실제로 많은 보컬리스트들이 이러한 이유로 밴드를 탈퇴한다.반 헤일런은 새미 헤이거, 게리 셰론을 새로운 보컬리스트로 차례로 영입해 계속 활동했다. 하지만 “Eruption”의 혁신도 “Jump”의 인기도 재현되지 못했다. 로스를 다시 받아들여 2012년 내놓은 12집 ‘A Different Kind of Truth’는 웬만한 팬이 아니라면 발표됐다는 사실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돌이켜 보면 반 헤일런은 커리어의 정점에서 서서히 침몰했고, 침몰의 원인이 된 갈등의 중심에는 돈이 있었던 셈이다.그래서 에디 반 헤일런은 평생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을까? 유명인들의 자산 가치를 평가하는 셀레브리티 넷 워스에 따르면 에디의 사망 직전 자산 가치는 1억 달러로 추산됐다. 그의 유명세에 비하면 적은 돈이라는 평가가 있는 반면, 록 기타리스트로서 이만한 부를 쌓은 사람도 드물다는 반론도 있다.다만 에디 반 헤일런 스스로는 자신의 생애가 꽤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네덜란드 태생인 그는 지난 2015년 스미스소니언 미국사박물관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우리 가족은 약 50달러와 한 대의 피아노를 갖고 이곳에 왔다. 그리고 우리는 영어도 할 줄 몰랐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을 보라. 이것이 아메리칸 드림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느냐”라고 말했다. 위대한 기타리스트 에디 반 헤일런의 명복을 빈다.반 헤일런의 옛 매니저 노엘 몽크가 쓴 회고록 표지.
  • [피용익의 록코노믹스]한국은 어쩌다 록의 불모지가 됐나
    한국은 어쩌다 록의 불모지가 됐나
    피용익 기자 2020.10.03
    [이데일리 피용익 기자] 지난 2010년 8월 10일,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에 있는 한 서점에서 메가데스(Megadeth)의 리더 데이브 머스테인(Dave Mustaine)과 잠깐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당시 메가데스는 12집 ‘Endgame’ 투어에 이어 ‘Rust in Peace’ 앨범 발매 20주년 투어로 바쁜 시기였지만, 내한공연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한국 방문 계획을 묻자 머스테인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안 그래도 에이전시와 얘기 중인데, 잘…”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결국 메가데스는 한국에 오지 않았다.앞서 메가데스는 1998년, 2000년, 2001년, 2007년, 총 네 차례에 걸쳐 내한공연을 했다. 한 번도 한국에 오지 않은 밴드가 수두룩한 가운데 메가데스의 내한공연은 결코 적은 횟수는 아니다. 하지만 이후로 10년이 넘도록 소식이 없다. 일본은 수시로 가고 중국 공연까지 하면서 한국에 오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관객이 모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처럼 록 음악이 인기를 끌지 못하는 나라도 드물다. 한국의 대중문화가 미국이나 일본의 영향을 크게 받아 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두 나라에서 인기를 끄는 록 음악이 유독 한국에서 푸대접을 받는 현상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헤비메탈은 말할 것도 없다. 그냥 머리 긴 남자들이 하는 시끄러운 음악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그렇다고 한국이 처음부터 록 음악의 불모지는 아니었다. 대중음악사를 살펴보면, 한국은 오히려 록의 태동기 때부터 영미권과 호흡을 같이 했다. 1950년대 주한미군 부대를 중심으로 연주 활동을 하던 뮤지션들은 1960년대부터 대중음악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미 8군 연예단 출신 신중현이 대표적이다. 그는 1962년 한국 최초의 록 밴드 에드 포(Add 4)를 결성하고 “빗속의 여인”을 발표했다. 비틀즈(The Beatles)가 영국에서 본격적인 록의 시대를 열었을 당시 이미 한국에도 그럴듯한 록 밴드가 존재했다는 얘기다. 신중현은 1970년대에도 신중현과 엽전들을 결성해 “미인”을 발표했고, 당대 최고 스타 김추자를 발굴하며 트로트 일색이었던 가요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 넣었다. 1960~1970년대 유행에 민감한 젊은이들은 ‘음악 다방’을 통해 팝송과 함께 다양한 해외 록 음악을 접할 수 있었고, 이러한 영향으로 가요계에서도 록 밴드가 연주하는 ‘탈(脫) 트로트’ 노래들이 점점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그러나 록 음악이 한국에 뿌리를 내릴 무렵 대형 악재가 발생한다. 1975년 ‘록의 대부’ 신중현을 비롯해 포크 록 뮤지션인 윤형주, 김세환, 이장희 등이 대마초 흡연 혐의로 구속된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로커들은 ‘약쟁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됐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안타깝게도, 1980년대 들어선 들국화의 전인권과 부활의 이승철, 1990년대에는 신성우, 신해철 등이 대마초 혐의로 구속되면서 록 뮤지션들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좋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심지어 로커의 상징과도 같은 장발은 1970년대엔 단속 대상이었고, 1990년대 말까지도 공영방송인 KBS에는 머리를 뒤로 묶고 출연해야 했다.그나마 1980년대는 한국에서도 록 음악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이다. 그 당시처럼 밴드 뮤직이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던 때는 한국 대중음악사를 통틀어 한 번도 없었다. 송골매, 들국화, 부활 같은 록 밴드들은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었고, 신중현의 아들 신대철이 결성한 한국 최초의 헤비메탈 밴드 시나위, 트로트 가수에서 헤비메탈 보컬리스트로 전향한 유현상의 백두산은 TV 가요 프로그램에도 출연할 정도였다. 특히 1980년대 말에는 한국 헤비메탈의 저변이 본격적으로 확대됐다. 블랙 신드롬(Black Syndrome)이 1988년 발표한 데뷔 앨범 ‘Fatal Attraction’은 그동안 한국 밴드의 음악을 은근히 무시하던 리스너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시나위 등 먼저 데뷔한 헤비메탈 밴드들이 다분히 한국적인 사운드를 들려준 반면, 블랙 신드롬의 음악은 마치 미국이나 영국의 정통 헤비메탈을 듣는 듯한 착각을 불려 일으켰기 때문이다. 같은 해 발매된 한국 최초의 헤비메탈 컴필레이션 앨범 ‘Friday Afternoon’에는 블랙 신드롬 외에도 미국적인 글램메탈을 연주하는 크라티아(Cratia), 한국 최초의 스래시메탈 밴드 아발란시(Avalanche) 등 해외 음악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밴드들이 한국에도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만약 그 당시 자본력이나 유통망 같은 여건만 조성됐더라면, 한국 헤비메탈 밴드들은 K팝에 훨씬 앞서 K메탈의 시대를 열었을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해본다. 그러나 역사에 ‘만약’은 없다. 1990년대 초부터 미국에서 헤비메탈의 인기가 식으면서 한국의 밴드 뮤직도 영향을 받게 됐다. 때마침 유명 록·메탈 밴드 보컬리스트들의 솔로 전향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핵심 멤버의 이탈은 밴드의 활동 중단으로 이어졌다.1990년대에는 록 음악의 요소를 가미한 가요가 드라마 주제곡 등으로 인기를 얻었고, 시나위 출신 서태지가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악을 통해 록과 댄스뮤직을 융합하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언더그라운드에서 마니아 층을 형성하고 있던 스래시메탈 밴드 크래쉬(Crash)는 서태지와 아이들 콘서트에 등장하며 인지도를 높였다. 이 시기 록·메탈 음악은 대중에게 더 다가갔다고 볼 수 있겠지만, 정통 밴드 중심의 음악은 이때부터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사실, 록이 한국에서 부흥할 수 있는 기회는 또 있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는 홍대 앞 클럽을 중심으로 이른바 ‘인디 밴드’들이 활발한 공연 활동을 했다. 크라잉 넛(Crying Nut), 노브레인(No Brain) 등 펑크 밴드들과 델리스파이스(Delispice), 언니네이발관 등 모던록 밴드들은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부류에 속한다. 언론도 인디 밴드 신을 주목했다. 하지만 2005년 7월 30일 MBC ‘생방송 음악캠프’에 출연한 럭스(Rux)의 공연 도중 카우치(Couch)와 스파이키 브랫츠(Spiky Brats)의 멤버가 성기를 노출하는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하면서 인디 밴드 전체에 불똥이 튀었다. 이후 경찰은 클럽에서 성기 노출이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는지에 대한 조사까지 진행했고, 결국 사회적으로 록 음악 전체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줬다. 약쟁이들의 음악이라는 평가에 이어 변태들이 하는 음악이라는 인식까지 생긴 것이다.현재 한국에서 록의 위치는 멜론 차트를 보면 알 수 있다. 2020년 9월 한 달 간 가장 많이 스트리밍된 음원 가운데 록이라고 할만한 노래는 단 한 곡도 없다. 댄스, 힙합, 발라드, 아니면 트로트다. 록 음악의 부재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한국에서 유독 두드러진다.그렇다고 한국 땅에서 록이 사라진 건 아니다. 헤비메탈도 여전히 건재하다. 세월이 흐르면서 멤버 교체는 여러 번 겪었지만, 블랙 신드롬과 크라티아는 물론 ‘Friday Afternoon’ 2집(1989년)과 3집(1990년)을 통해 데뷔한 제로 지(Zero G), 크럭스(Crux) 등은 2020년 현재까지도 활동하고 있다. 디아블로(Diablo), 메써드(Method), 해머링(Hammering) 등 비교적 뒤에 데뷔한 밴드들의 활동도 꾸준하다. 혹자는 현재 한국의 헤비메탈 신이 1980년대만큼이나 활발하다고 평가한다. 안타깝게도, 음원을 듣고 공연을 보는 사람이 드물 뿐이다. 방탄소년단(BTS)이 빌보드 싱글 차트(Billboard Hot 100) 1위를 차지하면서 K팝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이런 세상이 오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K록, K메탈에도 언젠가 기회가 찾아올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방탄소년단 (사진=빅히트엔터테인먼트)
  • [피용익의 록코노믹스]일본 거품경제와 함께 무너진 비주얼록
    일본 거품경제와 함께 무너진 비주얼록
    피용익 기자 2020.08.22
    [이데일리 피용익 기자] 미국에서 글램 메탈이 인기를 끄는 동안 일본에서는 이른바 비주얼계(Visual kei) 밴드들이 록 음악의 메인스트림으로 등장했다. 화려한 패션과 짙은 메이크업, 과장되게 부풀린 헤어스타일로 치장한 로커들은 중성적인 외모와 상반되는 하드하고 헤비한 음악으로 반전 매력을 뽐냈다. 비주얼계 뮤지션들의 패션은 영국과 미국의 글램 로커들에게서 영향을 받으면서도, 이를 일본화하고 극대화한 것이 특징이다. 음악 스타일은 하드록에서부터 헤비메탈까지 다양했지만, 일반적으로 비주얼 록(visual rock)이라는 이름으로 통칭한다. 이 명칭은 비주얼계 대표 밴드였던 엑스(X)의 슬로건인 ‘Psychedelic Violence Crime of Visual Shock’에서 유래했다는 게 정설이다.1980년대 초 일본 언드그라운드 신에서 시작된 비주얼계는 엑스, 데드 엔드(Dead End), 벅-틱(Buck-Tick) 등에 의해 주도되면서 1980년대 말에는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데드 엔드가 1986년 앨범 ‘Dead Line’으로 2만장의 판매고를 올린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벅-틱의 1988년 노래 “Just One More Kiss”는 오리콘 싱글 차트 6위에 오르며 대중적인 인기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비주얼계의 대중화에 가장 크게 기여한 밴드는 엑스였다. 리더인 요시키(Yoshiki)가 설립한 인드 레이블 엑스타시 레코드(Extasy Records)를 통해 1988년 발표한 1집 ‘Vanishing Vision’은 10만장 이상 팔리며 오리콘 인디뮤직 차트 1위에 오른 데 이어 오리콘 앨범 차트 19위에 랭크됐다. 엑스는 대중성과는 거리가 먼 헤비메탈 사운드를 추구하면서도 상업적으로 굉장한 성공을 거뒀다. 특히 엑스가 메이저 레이블인 CBS/소니와 계약한 후 내놓은 1989년작 ‘Blue Blood’는 오리콘 앨범 차트 6위에 올랐고, 차트에 100주 이상 머물렀다. 이 앨범에 수록된 록 발라드 “Endless Rain”은 일본 음악을 들을 수 없던 당시 한국에서도 음악 좀 듣는 사람은 다 아는 노래였을 정도로 인기였다. 그리고 1991년 발표된 엑스의 3집 ‘Jealousy’는 오리콘 앨범 차트 1위에 오른 데 이어 지금까지 100만장 이상 판매됐다. 엑스의 성공을 통해 상업성이 확인된 비주얼 록 밴드들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전성기를 맞았다. 루나 시(Luna Sea), 라크~앙~시엘(L’Arc~en~Ciel), 라크리마 크리스티(La’cryma Christi), 페니실린(PENICILLIN) 등이 잇따라 데뷔했다. 흥미로운 것은 비주얼 록 밴드들의 흥망성쇠가 그 당시 일본의 경제의 모습과 판박이라는 점이다. 1980년대 말 일본 경제를 표현하는 단어는 ‘거품 경제’다. 마치 비주얼계 뮤지션들의 헤어스타일처럼 한껏 부푼 상태였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급격한 엔화 가치 상승은 일본은행의 정책금리 인하로 이어졌고, 주식과 부동산 가치가 급등했다. 1989년 12월 29일 닛케이 지수는 3만8915.87 포인트로 사상 최고치를 찍었다. 이후 일본 증시에서 다시는 볼 수 없는 숫자다. 2020년 8월 닛케이 지수가 2만3000 포인트 선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 주가가 얼마나 폭등했었는지 알 수 있다.일본의 거품 경제는 1990년대 초 실물경제가 후퇴하면서 빠르게 무너졌다. 닛케이 지수는 1991년 2월부터 급락했고, 부동산 가격은 고점 대비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1992년부터 2002년까지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으로 표현되는 장기 불황을 겪게 된다.비주얼계의 인기가 급속하게 식은 것도 1990년대 초부터다. 화려한 의상과 짙은 메이크업의 로커들은 당장 하루하루 살기가 힘들어진 대중으로부터 외면받았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비주얼 록 밴드들이 일본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인기는 예전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다. 엑스에서 이름을 바꾼 엑스 재팬(X Japan)이나 루나 시 같은 메이저 밴드들은 비주얼계의 이미지를 조금씩 벗어 던졌다.X
  • [피용익의 록코노믹스]터프가이라서 부르기 싫었던 발라드
    터프가이라서 부르기 싫었던 발라드
    피용익 기자 2020.08.16
    [이데일리 피용익 기자] 대중음악에서 발라드(ballad)는 사랑을 주제로 한 감상적인 노래를 뜻한다. 물론 반드시 사랑만 노래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외로움, 죽음, 정치, 종교, 전쟁 같은 무거운 내용도 발라드의 주제가 된다. 음악 스타일 측면에선 템포가 느리고 멜로디가 뚜렷한 것이 특징이다. 팝송은 물론 리듬 앤 블루스(R&B), 컨트리, 포크 등 대부분의 장르에서 발라드 곡이 만들어진다. 록 음악도 예외가 아니다.대중음악 저널리스트인 찰스 애런(Charles Aaron)에 따르면 1976년 FM 라디오가 미국에서 대중화되면서 록 발라드가 본격적인 인기를 끌었다. 당시는 1930년대 말 처음 송출된 FM 라디오가 약 40년 만에 AM 라디오의 수를 따라잡기 시작했을 때였다. 배드핑거(Badfinger)의 “Without You”,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의 “Stairway to Heaven”, 에어로스미스(Aerosmith)의 “Dream On”, 레너드 스키너드(Lynyrd Skynyrd)의 “Free Bird” 등은 FM 라디오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1980년대 말 글램 메탈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것도 록 발라드였다. 글램 메탈은 대규모의 여성 팬덤을 형성한 처음이자 마지막 메탈 장르였다. 세바스찬 바크(Sebastian Bach)나 브렛 마이클스(Bret Michaels) 같은 ‘꽃미남’ 보컬리스트가 부르는 애절하고도 호소력 있는 노래에 여성 팬들이 열광하는 것은 당연했다. 글램 메탈 밴드가 부르는 록 발라드는 일종의 ‘미끼상품’과도 같았다.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아름다운 노래를 듣고 앨범을 구입하면, 그 노래 외에는 모두 메탈 음악으로 채워진 경우가 많았다. 다만 헤비메탈에 팝송의 요소를 도입한 글램 메탈 밴드들의 음악은 충분히 대중적이었기 때문에 록 발라드를 통해 유입된 팬들이 글램 메탈 장르에 빠져드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록 발라드는 밴드의 인기를 끌어올리는 동시에 든든한 수입원이 됐지만, 종종 지나친 상업화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일부 로커들도 발라드에 거부감을 가졌다. 스키드 로우(Skid Row)의 세바스찬 바크는 록 발라드 히트곡 “I Remember You”가 발표된 지 30년이 되던 지난 2019년 야후 엔터테인먼트(Yahoo! Entertainment)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이 곡이 너무 나약하다고 생각했다”며 “우리는 터프가이, 불량아, 메탈헤드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이 곡이 “창피하다”고 말한다. 당초 세바스찬 바크와 멤버들은 “I Remember You”를 데뷔 앨범 ‘Skid Row’에 수록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밴드 매니저였던 독 맥기(Doc McGhee)는 앨범 녹음 리허설에서 이 곡을 듣고 “앨범에 넣는다”고 선언했다. 신인 밴드였던 스키드 로우는 키스(KISS), 본 조비(Bon Jovi), 머틀리 크루(Motley Crue) 등 록의 전설들과 함께 작업해 온 맥기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다만 강요에 의해서였든 정말 부르고 싶어서였든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록 발라드 명곡들은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다. 스키드 로우의 “I Remember You”는 물론, 포이즌(Poison)의 “Every Rose Has Its Thorn”, L.A. 건스(L.A. Guns)의 “The Ballad of Jayne”, 화이트 라이언(White Lion)의 “When The Children Cry”, 익스트림(Extreme)의 “More Than Words” 등 일일이 헤아릴 수도 없다.심지어 빠른 템포와 공격적인 기타 리프로 유명한 스래쉬메탈 밴드 메탈리카(Metallica)마저도 1988년에는 느린 템포의 발라드로 시작하는 “One”을 발표했고, 1991년에 내놓은 ‘Metallica’ 앨범에는 “The Unforgiven”과 “Nothing Else Matters” 두 곡의 발라드를 수록했다. 스키드 로우
  • [피용익의 록코노믹스]인터넷이 록 스타를 죽였다
    인터넷이 록 스타를 죽였다
    피용익 기자 2020.08.01
    [이데일리 피용익 기자]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는 과거와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이전까지 3%대의 안정적 성장을 지속해 왔던 미국 등 선진국 경제는 저성장 국면에 진입했고, 각국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낮춰 경기 둔화에 대응했다. 경기가 나빠지면서 물가 상승률은 억제됐고, 취업이 어려워짐에 따라 실업률이 높아졌다. 저성장 · 저금리 · 저물가 · 고실업률로 흔히 설명되는 새로운 경제 질서를 ‘뉴 노멀(New Normal)’이라고 부른다. 뉴 노멀이라는 용어는 정보기술(IT) 버블이 붕괴된 2003년 이후 미국의 벤처투자가인 로저 맥나미(Roger McNamee)가 처음 사용했고, 금융위기 당시 채권운회사 핌코(PIMCO)의 최고경영자 모하마드 엘 에리언(Mohamed A. El-Erian)이 저서 ‘새로운 부의 탄생(When Markets Collide)’에서 언급한 뒤 널리 사용되고 있다.21세기 들어 새로운 질서가 나타난 것은 경제만이 아니었다. 대중음악 시장도 과거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다. 미국의 힙합과 유럽 중심의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EDM)이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고, 소녀시대, 싸이, 방탄소년단(BTS), 블랙핑크 등 한국 가수들이 세계 시장에 본격 진출하면서 K-팝의 시대가 열렸다. 이에 비해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대중음악의 한 축을 지탱해 온 록 음악의 인기는 빠르게 식었다. 물론 이전까지도 록은 팝 음악에 비해 대중적인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그런 시대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즈 이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대 최고 스타는 본 조비(Bon Jovi)가 아닌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과 마돈나(Madonna)였고, 1990년대는 너바나(Nirvana)보다 브리트니 스피어스(Britney Spears)나 뉴 키즈 온 더 블록(New Kids on the Block)이 대세였다. 하지만 20세기에는 적어도 록 음악이 메인스트림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밀레니엄 이후다. 2000년대 들어 록 밴드들의 존재감은 확 낮아졌다. 팝 록, 팝 펑크, 포스트-그런지, 뉴 메탈, 메탈코어, 이모코어 등 장르의 세분화는 더 진행된 반면, 이 가운데 메인스트림 록이 무엇인지, 21세기의 록 음악을 대표하는 밴드는 누구인지 콕 집어 얘기하기는 어렵다. 밀레니멈이 시작된 후 20년 동안 이런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1980년대에는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였다(Video Killed the Radio Star)’고 했던가. 2000년대 이후 록 음악의 인기가 갑자기 시든 것은 인터넷 보급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이 록 스타를 죽였다’고 감히 말해야할 것 같다. 2000년대 초 인터넷의 대중화는 음악을 소비하는 패턴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전에는 라디오를 통해 음악을 접하고 레코드 가게에서 음반을 구입하는 것이 당연한 절차였지만, 인터넷 시대에는 음반을 구입하지 않고도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이 수도 없이 많아졌다. 한 때 유행했던 냅스터 같은 P2P 파일 공유가 금지된 이후에도 음반 판매는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음반 하나 살 수 있는 돈이면 한 달 동안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를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고, 유튜브에서는 짧은 광고 한 편만 보면 무료로 음악을 들을 수도 있는 시대다.특히 록 음반은 전통적으로 앨범 단위의 감상을 위해 제작된 것이 많다. 싱글 위주의 팝 음악과 달리 앨범 전체의 컨셉트와 완성도를 중요하게 여겨 왔다. 그러나 인터넷 시대에는 앨범 단위의 감상보다 싱글 단위의 감상이 대부분이다. 음원 스트리밍 업체들은 자체 차트를 만들어 이같은 현상을 부추긴다. 싱글 단위의 시장에서 대중성이 비교적 떨어지는 록 음악은 경쟁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콜드플레이(Coldplay)나 마룬 파이브(Maroon 5)처럼 대중적인 노래를 부르거나 메탈리카(Metallica)나 AC/DC처럼 원래부터 인지도가 높은 밴드가 아닌 이상 살아남기 어려운 환경이다.2000년대 이후 대중음악에서 록 음악의 자리를 꿰찬 장르는 힙합과 EDM이다. 에미넴(Eminem), 제이-지(Jay-Z), 스눕 독(Snoop Dogg) 등 힙합 가수들은 2000년대 초반부터 대중음악 시장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흑인 음악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힙합은 점점 입지를 넓히면서 그야말로 대중음악이 됐다. 2017년에는 음반과 음원 판매 측면에서 록의 인기를 넘어선 것으로 공식 집계됐다. 또한 1980년대 말부터 클럽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던 일렉트로닉 음악은 2010년대 들어 EDM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면서 젊은층을 사로잡고 있다. ‘록은 죽었다(Rock is Dead)’는 명제가 더는 이상해 보이지 않는 ‘뉴 노멀’의 시대인 셈이다.2000년대 초반 인기를 끌었던 P2P 파일공유 서비스 냅스터 로고.
  • [피용익의 록코노믹스]미국 그런지에 대한 영국의 대답: 브릿팝
    미국 그런지에 대한 영국의 대답: 브릿팝
    피용익 기자 2020.07.25
    [이데일리 피용익 기자] 미국에서 그런지(grunge) 록이 인기를 끌던 시기 영국에서는 브릿팝(Britpop) 장르가 뜨기 시작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영국에서 인기를 끌던 기타 중심의 록을 계승한 브릿팝은 미국의 그런지 신드롬에 대한 영국의 대답과도 같았다. 브릿팝이라니, 이름부터가 영국적이지 않은가! 과거 비틀스와 롤링 스톤스가 미국을 흔들어 놓았던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재현하고자 하는 의지마저 느껴진다. 사실 로큰롤은 미국에서 탄생했지만, 본격적인 록의 시대가 열린 이후 영국은 오랫동안 록의 종주국이었다. 비틀스, 롤링 스톤스 같은 초기 록 밴드부터 블랙 사바스, 딥 퍼플, 레드 제플린 등 헤비메탈의 선구자들은 물론, 아이언 메이든, 주다스 프리스트, 데프 레퍼드 등 ‘뉴 웨이브 오브 브리티시 헤비메탈(NWOBHM)’을 주도했던 밴드들은 모두 영국 출신이었다. 미국에서도 개러지 록, 포크 록, 사이키델릭 록 등이 1960~1970년대에 인기를 끌었지만, 대중음악사에서 큰 획을 그은 뮤지션들 중에는 유독 영국인들이 많았다. 록 음악이 미국 중심으로 재편된 것은 1980년대 들어서였다. 하드코어 펑크를 계승한 스래쉬 메탈 밴드들이 미국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고, 글램 록의 영향을 받은 글램메탈 밴드들은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LA)를 거점으로 전 세계적으로 뻗어 나갔다.특히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발달한 미디어 산업은 대중음악의 판도가 미국 중심으로 흘러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에서 인기있는 음악이 세계에서 유행하는 세상이 펼쳐진 것이다. 이런 추세는 1990년대 초반 그런지 록의 열풍까지 그대로 이어졌다.그런 의미에서 커트 코베인의 자살 이후 그런지 록이 쇠퇴기에 접어든 1990년대 중반은 영국 뮤지션들에게 기회나 다름없었다. 스웨이드, 블러, 오아시스, 펄프 등 ‘빅 4’로 불리는 브릿팝 밴드들은 앞다퉈 음반을 발매하고 무대에 올랐다. 1995년 8월 블러의 싱글 “Country House”와 오아시스의 신곡 “Roll with It”이 인기 순위를 다툰 ‘차트 배틀’은 당시 영국 음악시장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이들이 들려주는 음악은 그런지 록에 비해 가볍고 밝았다. 따라부르기 쉽고 귓가에 맴도는 멜로디는 기본이었다. 가사는 또 어떠했던가. 집에서 차를 마시고 식료품을 쇼핑하러 나가는 평범한 일상은 대중의 공감을 얻었다. 몇 년 동안 우울한 음악을 듣느라 지친 대중은 브릿팝에 열광했다. 브릿팝 밴드들의 인기는 영국을 넘어 전 세계로 확산됐다. 브릿팝이 세계 대중음악 시장을 점령한 배경에는 정부 차원의 지원이 있었다. 영국 정부는 ‘쿨 브리타니아(Cool Britannia)’ 정책을 통해 문화예술 강국인 영국의 이미지 제고와 경제 활성화를 꾀했다. 영국 국기인 ‘유니언 잭’ 문양이 그려진 패션이 유행한 것도 1990년대 중반이었고, 휴 그랜트를 중심으로 한 영국 배우들의 전성기가 시작된 것도 이 시기였다.또 하나의 요인은 경제였다. 미국의 성장률 둔화가 그런지 록의 부흥에 영향을 미쳤던 것과 정반대로, 1990년대 중반 이후 영국의 경제 호황은 브릿팝의 인기를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1990년대 초 미국과 더불어 마이너스 성장까지 겪었던 영국 경제는 1995년 3.6%의 성장률을 기록하는 등 존 메이저 총리 재임 기간 동안 매년 2%대 중반에서 3%대 후반의 호황을 이어갔다.메이저 총리의 뒤를 이어 1997년 43세의 나이로 영국 총리에 취임한 토니 블레어는 사회정의와 시장경제를 결합시킨 ‘제3의 길’을 표방해 영국의 국력을 강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블레어 총리의 첫 임기(1997~2001년) 동안 영국 경제는 매년 3% 이상 성장했다. 물가는 안정됐고 실업률은 떨어졌다. 다만 브릿팝의 인기는 1990년대 말 급격히 시들었다. 오아시스가 1997년에 발표한 3집 ‘Be Here Now’는 전작에 비해 저조한 판매량에 그쳤고, 비슷한 시기 블러의 음악 스타일 변화는 인기의 기반이었던 10대 소녀들의 외면을 받았다. 글램메탈이나 그런지 록의 몰락처럼 브릿팝의 쇠퇴는 갑작스러웠다. 이유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오아시스나 블러의 흉내를 내는 비슷한 밴드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시장이 포화됐다는 진단에서부터 1997년 영국 왕세자비 다이애나의 비극적 죽음으로 인해 명랑한 분위기의 음악이 어울리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됐다는 분석까지 다양하다. 브릿팝 열풍이 식은 이후에도 라디오헤드, 버브 등의 밴드가 브릿팝의 명맥을 이어갔고, 트래비스, 콜드플레이, 뮤즈 등 영국 록 밴드들이 인기를 끌었지만, 과거 브릿팝의 영광을 재현하기엔 역부족이었다. 20세기의 끝과 함께 록의 시대는 이렇게 저물고 있었다.블러와 오아시스의 ‘차트 배틀’을 다룬 1995년 8월 음악 잡지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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