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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신문 | 이 기사는 이데일리신문 2012년 01월 11일자 30면에 게재됐습니다.

▲ 해강 김규진의 열 폭 병풍 `월하죽림도(月下竹林圖)`(사진=학고재갤러리)

[이데일리 오현주 기자] 문향십리(聞香十里). `깊은 숲속 알아주는 이 없어도 십리 넘겨 향을 풍긴다.` 난(蘭)이다. 난은 곤궁할지언정 덕 쌓는 데 게으르지 않는 군자의 모습을 닮았다. 그 향조차 투명한 청향이다. 죽보평안(竹報平安). `대나무는 평안함을 가져다준다.` 흔들리지 않으니 오히려 안온하다. 죽(竹)은 절개다. 칼끝 같은 성향은 쉽게 휘지 않는 군자의 절의와 기개를 닮았다. 다르되 결코 다르지 않은 난죽은 `중용과 강직`으로 표상되는 사군자(四君子)의 중심이다.
 
조선 초 왕공사대부들이 가끔 그렸다는 난이 유행을 탄 것은 18세기부터다. 강세황·이인상·임희지 등의 `문인화`가 도드라졌고, 이후 추사 김정희와 석파 이하응 등이 그린 `묵란`이 각광을 받았다. 그 중에 소호(小湖) 김응원(1855∼1921)이 있었다.
 
소호는 이하응의 `석파란`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이하응이 청탁 받은 그림을 대신 그렸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그림에선 새로운 구도법을 썼다. 이하응이 먹의 농담으로 원근을 표현한 데 비해 소호는 멀고 가까움은 무시했다. 난의 위치에 관계없이 일정한 묵색으로 예리한 난엽의 활발한 운동감을 뽑아냈다. 후대 묵란 화풍을 뒤흔든 난법, `소호란`이다. 

▲ 소호 김응원의 석란도 `인정향투(人靜香透)`(사진=학고재갤러리)

묵죽화는 고려시대부터 그려졌지만 조선에 와서도 멈추지 않았다. 강세황·이정·신위·유덕장 등이 묵죽에 뛰어났다. 그러나 빼어난 대나무 그림엔 단연 해강(海岡) 김규진(1868∼1933)이 꼽힌다.
 
해강 대나무의 특징은 자유분방함이다. 굵은 통죽은 더욱 탁월했다. 통죽 중간에 바람에 나부끼는 잎을 배합해 아주 독특한 화면을 만들어냈다. 중간먹으로 줄기를, 농묵의 가느다란 선으로 죽간을 표현하고, 한쪽으로 날리는 댓잎으로 바람을 끌어내는 기법은 현대에까지 계승됐다. 특히 고암 이응노(1904∼1989)가 이 화풍을 고스란히 이어갔다.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가 한국 근대 `난죽`화의 최고봉을 소개한다. 새해 첫 전시로 펼친 `소호와 해강의 난죽` 전이다. 소호의 난 20점과 해강의 죽 13점, 이들이 함께 작업한 작품 1점을 걸었다.

길이 375cm에 달하는 해강의 `월하죽림도 10폭 병풍`은 전시장을 푸른 댓바람으로 휘감는다. 보름달 뜬 밤에 굵은 대나무가 무성한 숲의 풍경을 호방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죽에 빗댄 선비의 절개는 `맑은 바람 곧은 절개(淸風明月)`란 `풍죽도`로 이어진다.
 
또 바위 틈새와 절벽에서 자라는 난초를 주로 그렸던 소호는 다채로운 `석란도`를 선뵌다. `인정향투`에선 단아한 난 위에 `산 깊고 해 긴데 사람자취 고요하고 향기만 그윽하다(山深日長 人靜香透)`고 적는다.

전시는 한국 근대서화의 미학과 가치를 되새겨보자는 의도다. 학고재갤러리가 지난 2009년 처음 시작한 `한국 근대서화의 재발견` 전의 긴 줄 위에 있다. 2월19일까지. 02-720-1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