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웃게 해드리겠습니다"…대통령이 된 코미디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당선
유권자 4명중 3명, 젤렌스키 찍어…드라마가 현실路
기성 정치에 실망·새인물 열망…“최소한 거짓말은 안해"
정치경험 전무 최대 ‘걸림돌’…"사람만 잘쓰면 OK”
  • 등록 2019-04-23 오전 12:00:00

    수정 2019-04-23 오전 8:08:42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21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결선 투표 결과가 발표된 뒤 압승이 예상되자 함박웃음을 지으며 축하를 받고 있다.(사진=AFP)
[이데일리 방성훈 기자] TV드라마에서 대통령을 연기해 인기를 모은 코미디언이 현실세계에서 대통령에 당선되는 영화같은 일이 벌어졌다. 21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대통령에 당선된 국민배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41)가 그 주인공이다.

젤렌스키는 이날 결선 투표에서 연임을 노리는 페트로 페트로 포로센코 현 대통령을 3배 가까운 표차이로 누르고 압승했다. 지난 2018년 12월 31일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한 뒤 불과 4개월 만이다.

출구조사 결과에서 73.2%에 달하는 득표율이 공개된 뒤 젤렌스키는 상기된 얼굴로 “우크라이나 국민 한 사람으로서 소비에트연방 출신 국가들(post-Sovoet Union)에게 전한다. 우리를 보라.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외쳤다. 그는 “절대로 국민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며 승리를 선언했다.

◇코미디언은 어떻게 대통령이 됐나

젤렌스키가 대통령이 된 과정을 살펴보면 그를 국민배우로 만든 정치 풍자 드라마 ‘국민의 종(Servant of the People)’을 보는 듯 하다. 지난 2015년 방영된 이 드라마에서 젤렌스키는 주인공인 역사 교사를 연기했다. 수업 시간 학생들에게 정치권 부패를 비판하는 모습이 인터넷 동영상으로 퍼진 뒤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이 되는 ‘드라마에서나 가능할’ 역할이다. 그는 드라마속에서 대통령이 되고 난 뒤엔 부패 정치인과 악덕 재벌들을 척결하는 등 국민들이 원하는 개혁 정치를 펼친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젤렌스키에게 드라마속 주인공과 같은 모습을 기대하고 표를 던진 유권자들도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가디언은 “젤렌스키의 선거 유세는 드라마와 현실의 경계를 흐리는 방식이었다”고 분석했다. 유권자들이 드라마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 여기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젤렌스키는 유세 기간 무능한 정치권을 비판하며 “우크라이나 경제를 살리고 내전을 종식시키고 부패를 뿌리뽑겠다”고 약속했다. 아울러 “우크라이나에 사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다. 즐거워하는 표정을 보고 싶다”고 했다.

젤렌스키가 정치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2013년 ‘유로마이단(Euromaidan)’ 운동을 공개 지지하면서부터다.

유로마이단이란 당시 대통령이었던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유럽연합(EU)과의 무역 협정을 무기한 연기하자 이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시민운동으로 친러시아 대신 친서방을 요구하는 운동이다.

유로마이단 운동은 친러반군과 정부군간 내전인 돈바스 전쟁의 시발점이 됐다. 젤렌스키는 돈바스 전쟁과 관련해 정부군 편에 서면서 정치 행보를 강화해 왔으며 작년 3월 자신이 주연을 맡은 드라마 제목에서 이름을 딴 ‘국민의 종 당’을 창당했다. 이후 지난해 12월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기성 정치 실망·새인물 열망 뒤섞인 결과

코미디언, 배우, 사업가, 1978년생, 유대인. 젤렌스키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들은 모두 정치와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정치경험이 전무한 그를 대통령 자리에 앉혔다.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불만, 그리고 새로운 인물에 대한 열망이 뒤섞여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CNN은 “기성 정치권에 대한 뿌리깊은 실망, 만연한 부패에 대한 혐오감, 오랜 경기침체에 대한 불만 등이 반영된 결과”라고 설명했다.

BBC는 젤렌스키의 압승에 대해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기성 정치인들을 벌한 것”이라고 했다.

젤렌스키와 결선 투표에서 맞붙은 포로센코 대통령은 지난 2014년 친서방·친EU를 표방하며 당선됐다. 하지만 1만3000명의 사망자를 낸 돈바스 내전 종식, EU 가입 등의 공약을 지키지 못했다.

부정부패 또한 기존 정치권에 대한 불신을 키운 요인이다. 포로셴코 대통령은 러시아에 맞서겠다며 지난 2014년 33억달러였던 국방 예산을 올해 78억달러로 2배 이상 늘렸다.

그런데 지난 2월 국방위원회 부의장인 올레 글라드코프스키의 아들이 러시아에서 밀수한 부품을 우크라이나 방산업체에 비싸게 판매한 혐의로 고발됐다. 글라드코프스키는 초콜릿 재벌 출신인 포로셴코 대통령의 사업파트너였다가 국방위원회 부의장에 앉은 인물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21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결선 투표 결과가 발표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사진=AFP)
◇정치·행정 경험 전무…전문가 도움 받아 해결 약속

문제는 젤렌스키가 정치·행정과 관련한 경험이 아예 없다는 것이다. 젤렌스키는 유세 기간 동안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았다. 대통령 후보 토론에서도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구체적으로 내놓을 수 있는 ‘컨텐츠’가 없어서다.

취업자를 늘리고, 젊은이들에게 주택을 공급하고, 부패를 척결하고, 임금과 연금을 늘리겠다고 추상적인 주장만 늘어놨다. 어떻게 세제를 개편할 것인지, 부동산 정책은 어떻게 펼칠 것인지 세부 계획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다만 부족한 분야에선 전문가 도움을 받겠다며 한발 물러서는 방식으로 공세에 대처했다. 경제 문제와 관련해선 전직 재무장관을 대선 캠프에 영입해 조언을 들었다. 다른 정책들에 대해서도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아이디어를 묻거나 대안을 함께 모색하는 방식으로 소통했다.

젤렌스키 지지자들은 그가 모든 것을 알지 못해도, 또 다 잘하지 못해도 대통령직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각 분야에서 일을 잘 해낼 인사만 제대로 앉히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판론자들은 젤렌스키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협상해 돈바스 내전을 끝낼 수 있을지, 국제통화기금(IMF)과 구제금융지원 협상을 잘 해낼 수 있을 것인지, 국제 무대에서 우크라이나 권위를 떨어뜨리지는 않을 지 등을 우려한다.

우크라이나 금융재벌 이고르 콜로모이스키와의 유착관계 의혹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다. 젤렌스키가 대선 출마를 선언한 방송 채널 ‘1+1’을 콜로모이스키가 소유하고 있다. 콜로모이스키는 우크라이나 최대 은행 프리바트방크를 소유했던 인물이다. 프리바트방크는 포로센코 정부 출범 후 2016년 국유화됐다. 콜로모이스키가 보복을 위해 젤렌스키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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