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머물러 있는 한국 여자 배구

포지션별 선발도 힘든 대표팀
감독의 '빠른 배구' 공언 실종
예견된 리시버의 체력 고갈
  • 등록 2018-10-06 오전 8:00:00

    수정 2018-10-06 오전 8:00:00

(사진=FIVB 홈페이지)
[이데일리 장영락 기자] 한국 여자대표팀이 2018 국제배구협회(FIVB) 세계배구선수권대회 예선에서 1승4패의 성적으로 예선 탈락했다. 코치진의 잘못된 선수 선발, 전술적 착오 등이 겹치며 대표팀은 국제무대에서 크게 뒤처진 현실을 확인했다.

그나마 이번 대회에서 눈에 띈 점은 라이트 공격수의 활용이었다. 박정아는 주포 김연경이 체력 저하와 집중 견제로 어려움을 겪은 가운데 공격에서 활로를 만들어 주며 대표팀에서 가장 많은 득점을 올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박정아의 선전은 한국 여자 배구의 약점도 그대로 보여줬다.

◇포지션도 제대로 못 갖춘 대표팀

리그에서 아웃사이드히터(레프트)로 뛰는 박정아는 주전 김희진 부상으로 이번 대회에서 아포짓스파이커(라이트)로 경기를 치렀다. 그러나 라이트 경험이 적어 왼쪽에서 오는 세트를 처리하는 데는 상대적으로 약점을 보였다. 이는 오른쪽에서 주로 공격을 해야 하는 아포짓스파이커에게는 문제가 된다. 이 때문에 박정아가 후위로 가면 라이트 후위 공격이 아닌 후위 레프트의 중앙 후위 공격을 대신하는 변칙적인 전술도 나왔다. 사실 국내 여자배구에서 이같은 전술은 자주 활용된다. 세터들의 라이트 백세트가 불안하고 오른쪽을 스트롱사이드(오른손잡이 윙스파이커의 레프트윙, 왼손잡이 윙스파이커의 라이트윙 포지션)로 활용할 수 있는 왼손잡이 스파이커 자원이 부족한 탓에 생긴 현상이다.

한국 대표팀 외에는 보기 힘든 이런 전술은 공격 경로를 단순화해 세터와 스파이커의 부담을 줄여준다는 장점이 있지만, 오른쪽 공격 옵션을 포기해야 하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상대 수비는 중앙후위에서 공격 준비를 하는 라이트 공격수를 보고 왼쪽 블록을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왼손잡이 아포짓이 없다는 것도 변명이 되기 어렵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왼손잡이보다 오른손잡이가 많은 것이 현실이어서 각국 대표팀 주전 라이트는 오른손잡이가 더 많기 때문이다. 라이트 공격 부실은 국내 리그의 외인 의존 현상과 궤를 같이 하는 한국 여자배구의 근본적 문제다.

◇실종된 ‘빠른 배구’ 공언

그나마도 대회 내내 부진했던 이재영이 러시아 경기를 앞두고 어깨 이상을 보이자 차해원 감독은 더 극단적인 선택을 내린다. 라이트에 이재영을 리시버로, 박정아를 리셉션을 면제한 레프트로 넣어 레프트에 공을 몰아주는, 정석을 벗어나는 전술을 선택한 것이다. 이는 국내에서 흥국생명 박미희 감독이 지난 몇 시즌 동안 활용한 방법이기도 하다.

이런 편법은 오른쪽 공격옵션을 크게 줄이는 일종의 전술적 ‘자해’ 행위다. 또 선수 한 두 명의 효율을 위해 다른 선수를 손쉽게 희생시키는 국내 배구의 불합리한 관행을 그대로 보여주는 전술이기도 하다. 이런 구식 전술은 국내에서나 통할 뿐 세계선수권과 같이 강팀과 경기를 가져야 하는 대회에서는 효용성이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사실 혼전 상황이 될 때 레프트 전위만 바라보는 세터들의 상황 대처 능력도 문제 악화에 한 몫 했다. 그러나 패스를 맡는 레프트를 3명만 뽑은 대표팀 선발은 피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는 점에서 더 심각한 문제로 지적돼야 한다.

하물며 차해원 감독이 부임 직후 직접 빠른 배구를 거론한 상황이었다. 빠른 배구는 공격 옵션 최대화를 통해 상대 수비의 분산을 파고드는 전략이다. 그래서 안정적인 리셉션과 공격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아웃사이드히터의 존재가 더욱 중요하다. 그럼에도 감독은 대회 막판 리시버 부족 사태로 ‘레프트 몰빵’이라는 다른 팀들한테서는 구경조차 힘든 전술을 택했다. 이 선택은 정통 아포짓 스파이커의 부재, 세터의 코트 활용능력 부족, 리시버 체력 안배 실패라는 각종 문제가 종합돼 나온 결과물이다. 차 감독 부임 이후 내내 노출된 코치진의 전략적 패착이 가장 크게 드러난 순간이기도 했다. 감독이 자신의 공언과 달리 부임 후 단 한번도 빠른 배구를 보여주지 못한데는 이유가 있다.

(사진=FIVB 홈페이지)
◇예상된 리시버들의 체력 고갈

체력 안배 실패의 영향은 레프트 이재영을 통해 뚜렷이 확인됐다. 이번 대회 대표팀 고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도 이재영의 부진이었다. 이재영은 지난 발리볼네이션스리그에서 중국을 상대로 팀 최다득점을 하며 승리를 이끌던 때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패스는 자주 흔들렸고, 공격은 힘이 크게 떨어졌다. 이는 올해 발리볼네이션스리그와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까지 거의 전 경기를 풀타임으로 나서 패스와 공격을 시도한 대가라고 봐야 한다. 이재영은 신장 180cm도 안되는 신체조건으로 프로 데뷔 이후 소속팀과 대표팀에서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다. 대표팀 롱런을 위해서도 이재영에게는 무조건적인 휴식이 필요한 상황이다.

리시버의 활약 없이 좋은 경기를 하기 힘든 것이 현재의 대표팀인 것을 감안하면 이재영의 컨디션 저하는 더 심각한 문제다. 무엇보다 이재영은 김연경을 제외하면 현역 아웃사이드히터 가운데 국제무대에서 적정 수준의 공격이 가능한 몇 안되는 선수 중 한명이다. 장신인 박정아의 공격력이 더 낫지만, 박정아의 리셉션은 국내 리그에서도 수준 이하다. 몸에 문제가 생긴 것이 확연한 데도 이재영이 마지막 경기까지 뛰어야 했던 이유도 리셉션 때문이었다.

사실 리셉션 불안은 모든 팀이 다 겪는다. 한국과 강팀의 차이도 뛰어난 리시버의 존재 여부가 아니다. 네트에서 떨어진 패스를 공격으로 자연스럽게 연결해줄 수 있는 운동능력 뛰어난 세터도, 팀 차원에서 이 같은 공격 세트를 만들어줄 전술적 안배도 없다는 점이 대표팀의 리셉션 불안을 더 치명적인 약점으로 만드는 것이다.

◇프로리그와 따로 노는 국가대표팀 운영

배구는 단체구기 가운데서도 국가대표팀간 경기가 가장 활발한 종목이다. 배구 흥행을 위해 국제배구연맹(FIVB)이 국가 간 경기를 장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대표팀 간의 리그라는 개념으로 출발한 ‘월드리그’ (여자는 월드그랑프리, 현재 발리볼네이션스리그로 통합)가 존재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도 한국 배구는 프로리그와 국가대표가 따로 논다. 여자부조차 한 시즌 30경기를 소화하는 빡빡한 일정 덕에 구단은 대표팀 차출에 소극적이다. 이 와중에 배구협회는 프로리그 인기 속에 적당히 이득을 보는 것에 안주하는 모양새다. 6개나 되는 프로구단에 적지 않은 연봉, 상당한 인기까지 누리고 있는 여자 배구판에서 권위 있는 국제대회 출전을 앞두고 정상 엔트리를 채울 선수도 뽑지 못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납득하기 어렵다.

이번 대회를 통해 현재 여자 대표팀에는 오늘의 승리를 위한 배구도, 내일의 발전을 위한 배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됐다. 대표팀은 오랜 타성으로 이어온 과거의 관행에 연연하다 1승4패 예선 탈락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는 비단 대표팀만 아니라 현재 한국 여자 배구 전체가 공유하는 문제다.

물론 리그가 흥행하고 팬들이 즐거워한다면 대표팀이 승리하지 못해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 그러나 국제 흐름과 너무도 동떨어진 배구가 리그의 고립과 퇴보를 촉진할 위험도 존재한다. 이미 한국 배구는 90년대 후반 이후 그같은 심각한 후퇴를 경험한 바 있다. 더욱 장기적인 안목에서 세심하게 대표팀을 운영해야할 필요성도 여기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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