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전 8시를 조금 넘긴 수요일 출근길, 서울 안암동 고려대학교 앞 차도 한복판에 20대로 보이는 젊은 남성이 느닷없이 뛰어들었다. 옷을 모두 벗은 채였다. 친구로 보이는 두 명의 청년이 그의 뒤를 따랐다. 한 명은 나체 질주하는 남성의 것으로 보이는 옷을 들었고, 또 다른 한 명은 카메라를 들었다. 청년은 200여 미터 정도 거리를 내달리다 골목길로 돌연 사라졌다. 이들의 신원은 그 이후에도 밝혀지지 않았다.
이튿날 경향신문은 이 사건을 “스트리킹이라는 광태가 급기야 서울 거리에 출현하고 말았다. 참으로 통곡할 일이다”라고 썼다. 스트리킹은 ‘벌거벗고 대중 앞에서 달리는 일’을 뜻하는 영단어로, 1974년 초 미국에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처음엔 소수 개인의 일탈로 시작됐지만 곧 단체 질주로 확대됐고 그 규모 역시 점차 커졌다.
이 즈음 시작된 세계 최고의 명문 사학 미국 하버드대학교 학생들의 집단 스트리킹 ‘원시의 비명(Primal Scream)’ 행사는 지금도 매년 12월 연례행사로 열린다. 시험 시작 전날 학생들이 모여 30분 간 스트리킹을 하는 전통으로, 시험과 공부의 중압감에서 벗어나려는 ‘하버드 공붓벌레들’의 유쾌한 일탈로 자리잡았다.
1974년 시작된 미국의 스트리킹 열풍은 유럽과 일본, 우리나라까지 삽시간에 전파됐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스트리킹이 발생한 날 이웃나라 일본에서도 역시 첫 스트리커가 등장했다. 헬멧을 쓴 채 맨몸으로 히로시마 시내를 질주한 이 스트리커는 망치를 들고 등에는 ‘탄원하다’는 뜻의 ‘강소(强訴)’란 글자를 크게 써넣었다.
결국 경찰은 스트리킹에 대한 처벌을 강화, 공공장소에서의 음란행위죄를 적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즈음 전국적으로 다시 장발 단속령도 내려졌는데 그것도 스트리킹 유행 때문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고려대 앞에 잠시 나타났다 사라진 우리나라 첫 스트리커가 장발족이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경찰은 안암동 스트리커를 체포하기 위해 전담 수사반까지 편성했지만 그를 검거하는 덴 끝내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