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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수목드라마 ‘닥터탐정’ 첫회 하랑(곽동연 분)의 죽음을 접한 중은(박진희 분)의 대사는 많은 시청자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지난 2016년 서울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닥터탐정’은 산업현장을 누비며 질병의 원인을 파헤치는 직업환경의학 전문의(의학탐정)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돈의 논리로 점철된 노동 현장의 현실을 조명하는 드라마다. 대중에게는 생소한 병원 밖 의사의 세계를 다뤘다.
드라마 속 직업이 요즘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추세다. 타임 슬립 등 멜로 드라마 대신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드라마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 이전 사회 현실을 다룬 드라마가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했다면 요즘 드라마는 직업을 통해 사회의 내밀한 명암을 조명하고 있다. 지난 7월부터 방송 중인 ‘닥터탐정’, 9월 첫 방송 예정인 OCN ‘달리는 조사관’, 지난 7월 시즌1을 종영하고 11월 시즌2를 앞둔 JTBC ‘보좌관’, 올 상반기 방영한 MBC ‘특별근로감독관 조장풍’(이하 ‘조장풍’) 등이 대표적이다. 각각 ‘국회의원 보좌관’, ‘국가인권위원회 조사관’, ‘특별근로감독관’ 등 구체적 직업으로 등장인물이 겪는 사회적 위치와 이해 관계를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그 동안 사회문제를 다루는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직업으로 검사와 정치인, 의사, 경찰, 재벌 등이 활용된 사례가 잦았던 것과 달라지면서 ‘식상하다’는 평가에서 벗어나는 성과를 얻고 있다. 생소한 직업군의 인물을 내세워 간접 경험·현실 각성·짙은 감동 세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시도가 방송계 전반에서 포착된다는 분석이다.
실제 인물·실화 에피소드로 몰입도↑
극중 하랑은 유해 물질에 오랜 기간 노출돼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와중에도 그룹사의 정규직을 꿈꾸며 지하철 스크린도어 청소와 점검을 하는 하청업체 직원이었다. 작업 중 발을 헛디뎌 지하철 선로에 추락했지만 정직원이 될 기회를 놓칠까 검진도 포기한 채 일터로 돌아간다. 하지만 안전수칙이 지켜지지 않은 채 업무를 강행하다 결국 선로 추락 사고로 숨을 거둔다. 돈을 받고 산업재해를 은폐하는데 일조했던 중은이 노동자를 위한 직업환경전문의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였다.
대학생 함진희(25·여)씨는 “구의역 스크린 도어 사고, 삼성 직업병 문제 등 실제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에피소드들을 볼 때마다 슬픔과 분노를 느낀다”며 “인권운동가, 대기업, 노동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했다면 뻔했을 텐데 제3자의 입장에서 현장을 바라보는 직업환경의학전문의의 시각을 담으니 더욱 실감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비현실 인물이 그리는 실제 직업·현실…취재력이 관건
국회의원 보좌관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보좌관’도 국회의원, 대통령, 장관이 아닌 대중에게 생소한 ‘보좌관’이란 직업을 통해 권력문제를 다뤘다는 점이 참신했다는 분석이다. ‘보좌관’은 방송 클립 회당 평균 재생수 79만뷰, 총 788만뷰로 최근 안방극장에 등장한 정치드라마 중 가장 좋은 성적을 냈다.
‘조장풍’은 드라마에서 처음으로 고용노동부 근로감독관의 이야기를 다뤘다. 거기에 한국노총이 제작지원으로 나서 현실성을 한층 높였다. ‘조장풍’은 시청률 4%로 출발해 중반부터 동시간대 1위를 차지, 시청률 8.7%로 막을 내렸다. ‘달리는 조사관’은 국가인권위원회 조사관들의 삶과 인권 문제를 다룰 예정이어서 관심을 끌고 있다.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는 “우리 모두가 겪는 사회 문제를 ‘뻔하지 않은’, ‘보다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주인공들을 보며 현실의 결핍을 간접 위로 받으려는 심리”라며 “드라마가 주는 대리만족 판타지를 보다 실감나게 대중이 충족하기 위해 이를 해결해줄 주인공의 사회적 위치도 다양화하고 세분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비현실적인 인물을 내세우지만 그 인물이 그려내는 배경과 문제가 현실과 맞닿아 있어야 한다”며 “대중의 수요를 반영하기 위한 작가의 취재 역량이 앞으로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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