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씻어내는 일, 에로틱과 일상의 경계[이윤희의 아트in스페이스]<3>

▲장 레옹 제롬, 프랑수아 클루에가 들여다본 '목욕탕'
'밧세바' 고혹적인 목욕, 훔쳐보며 탐한 다윗왕
타인 들인 '디안' 욕실, 여가 즐기는 장소인 듯
씻는 여인에 씌운, 관음-일상공간 극과극 시선
  • 등록 2021-09-24 오전 3:30:00

    수정 2021-09-24 오전 3:30:00

장 레옹 제롬이 1889년 그린 ‘밧세바’(Bathsheba). 제롬은 19세기 프랑스 미술의 선구자로 꼽힌다. 인상주의가 밀려들던 시절에도 신고전주의의 엄격한 화풍을 고집했고, 시력을 잃어가던 말년에는 조각으로 전향해 예술관을 이어갔다. 당시 프랑스 미술은 북아프리카 노예시장과 하렘, 유럽인처럼 보이는 여인의 목욕 장면을 그린 그림에 관심이 높았다. 제롬은 한때 여행한 터키·그리스·이집트·중동 등을 배경으로 이런 장면을 꼼꼼하게 묘사한 데다가 드라마틱한 분위기까지 얹어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밧세바’는 제롬 특유의 부드러운 붓질로 벌거벗은 여인의 관능적 자태뿐만 아니라 이국적 정취가 넘치는 주변 풍경까지 고혹적으로 이끌어낸 작품이다. 캔버스에 유채, 60.5×100㎝, 개인 소장.


200여년 전 소설 ‘오만과 편견’이 탄생한 곳은 낡은 책상이었답니다. 종이 몇 장과 잉크병, 깃대펜이 전부인 그곳이 바로 영국작가 제인 오스틴의 작업실이었던 셈입니다. 장서가 그림처럼 꽂힌 책장, 큼직한 책상이 근사한 ‘서재’란 공간은 남성 작가만 차지할 수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서재뿐인가요. 화가의 공간이던 ‘아뜰리에’도 그랬고,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카페’와 ‘술집’ ‘광장’도, 한 가정집의 ‘부엌’과 ‘식당’ ‘침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속해 있던 공간이지만, 그곳이 모든 이들에게 늘 공평했던 것은 아니었던 겁니다. 오랜 시간 미술관을 일터로 삼아온 이윤희 학예연구관이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때론 객관적 기록으로, 때론 상징을 담아, 때론 비틀린 풍자를 숨겨낸 ‘그림으로 읽는 공간이야기’ ‘그림으로 읽는 사람이야기’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이윤희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나무꾼은 하늘에서 내려와 계곡에서 목욕하던 선녀의 날개옷을 감춰 결혼에 성공했다. 현대의 시각으로 보자면 형사처벌감이지만, 옛이야기는 선녀와 나무꾼이 아이를 둘이나 낳고 잘 사는 것으로 전개됐다. 나무꾼이 방심해 날개옷을 보여주는 바람에 선녀가 두 아이를 데리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으로 마무리되긴 했지만 말이다.

목욕은, 특히 여성의 목욕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사건의 모티프가 됐다. 구약성경에서 전하는 일화로, 수잔나도 목욕을 하는 바람에 두 장로에게 성폭행을 당할 뻔했고, 밧세바의 목욕도 다윗왕의 음심을 자극해 불륜의 씨앗이 됐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화가들의 손에 의해 다양하게 변주되며 수많은 작품으로 남았다. 계곡에서, 집안의 욕실에서, 혹은 공중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는 모티프의 작품들은 대개 여성의 목욕을 과할 정도로 에로틱하게 그려내는 경향을 보인다. 어떤 사건의 전조로 관능적인 목욕이 이토록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쯧쯧, 목욕이 잘못했네’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목욕이 잘못한’ 그 전형적인 예를 19세기 프랑스 화가 장 레옹 제롬(1824∼1904)의 그림 ‘밧세바’(1889)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느 저택의 옥상에서 밧세바가 목욕을 하고 있다. 그녀의 남편은 해외원정 중인 장군 우리아다. 이 그림의 배경인 이스라엘은 고지대고 물이 부족해 적은 양으로 목욕을 해야 했다고 하니 얕은 물동이의 형태가 이해가 간다. 밧세바는 하녀의 도움을 받아 목욕 중인데, 높은 가옥의 옥상은 어쩌면 가장 안전한 목욕탕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장군의 집보다 더 높이 지어진 왕궁이 있었으니, 왼쪽 높은 건물 테라스에서 난간을 부여잡고 밧세바의 목욕에 온통 집중하고 있는 남성이 보인다. 바로 그 왕궁의 주인 다윗왕이다. 다윗이 누군가. 미켈란젤로의 저 유명한 다비드상의 주인공, 골리앗을 돌팔매질 한 번으로 쓰러뜨린 영웅적인 인물이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그는 한 손이 공중을 향해 허우적대고 있어 자칫하면 떨어질 것만 같은 한 남성일 뿐이다.

흰 살결, 굴곡진 몸매…‘유혹의 아이콘’ 밧세바

밧세바는 온몸의 관절을 꺾으며 최대한 굴곡진 몸매를 보여주는데, 목욕을 저렇게 고혹적으로 할 일인가 싶다. 마침 떠오르는 햇살을 받아 푸른 대기와 대조적인 흰 살결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푸른 옷을 휘감은 하녀는 밧세바의 몸을 닦아주기 위한 수건을 얕은 대야에서 적시고 있다. 수건을 적시면서도 눈은 밧사바에게로 향하고 있으니, 이 광경에서 벌거벗은 밧세바를 쳐다보는 눈길은 벌써 둘이다.

하녀의 눈길은 다윗의 허덕거리는 눈길을 정당화시켜준다. 남녀를 막론하고 누구라도 쳐다볼 수밖에 없는, 밧세바의 목욕이 그런 것이라는 지점을 하녀의 눈길이 말해주는 것이다. 이후 밧세바는 결국 다윗의 부름에 응하게 되고 남편이 죽고 솔로몬을 낳게 되는 등의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결국 화가가 그리고 싶어 했던 것은 눈길의 잘못보다는 목욕의 잘못 아닌가 싶다.

하지만 목욕이란 것은 고대부터 남녀 구분 없이 인간이 당연히 해오던 일이었다. 다만 로마의 카라칼라 같은 대규모 공중목욕탕부터 왕족이나 귀족의 개인목욕탕까지 목욕탕의 형태는 지역과 신분에 따라 매우 다양했다. 카라칼라는 무려 1600명이 들어갈 수 있었고, 목욕뿐 아니라 이발과 운동, 음식과 술을 마실 수 있는 장소까지 있었다니 고대 로마에서 목욕탕에 가는 일은 휴식과 여가생활이었다. 목욕을 금기시한 것은 중세 서양에 신체의 금욕을 중시하는 문화와 더불어 각종 전염병의 대유행이 목욕을 통해 열린 땀구멍으로 전파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 때문이었다. 평생 목욕을 멀리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것이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는 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물로 몸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행위 자체가 완전히 없어질 수는 없었다.

프랑수아 클루에가 1571년경 그린 ‘목욕하는 여인’. 클루에는 프랑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초상화 대가 장 클루에의 아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궁정화가였던 아버지를 이어 1545년 궁정화가로 임명된 이후 프랑수아 1세, 앙리 2세, 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등 4명의 왕을 섬기며 궁정 초상화를 그렸다. 정교하고 세밀하지만 자연스러우면서도 우아한 표현으로 당대 왕족·귀족을 묘사해 미술사는 물론 역사적 가치도 뛰어나단 평가를 받는다. ‘목욕하는 여인’은 앙리 2세의 애첩을 그린 작품으로 ‘디안 드 푸아티에의 초상’으로도 불린다. 나무패널 위에 유채, 92.3×81.2㎝, 미국 워싱턴DC 내셔널갤러리 소장.


주로 누드를 그려야 할 명분이 필요했기 때문에 미술의 주된 테마로 들어온 목욕은, 앞서 보았듯이 성경이나 신화 속 인물로 그려지는 것이 통상적이었지만, 특이하게 실제 인물의 초상을 목욕하는 장면으로 그린 작품들도 남아 있다. 16세기 프랑스에서 활약한 플랑드르 출신의 화가 프랑수아 클루에(1520 이전∼1572)가 그린 ‘목욕하는 여인’(1571경) 속 여인은 프랑스 궁정에서 자신보다 어린 왕 앙리 2세의 사랑과 신임을 받았던 디안 드 푸아티에로 여겨지고 있다.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있었지만, 앙리 2세가 어린 시절 타국에 볼모로 잡혀갈 때 마지막으로 따스한 키스를 해줬던 디안을 잊지 못하고 평생의 첫사랑으로 여겼다고 하니, 열네 살이나 연상인 여인을 왕이 된 후 애첩으로 머물게 한 배경이 이해되기도 한다.

순결의 유니콘, 따스한 표정…‘평생의 첫사랑’ 디안

그림은 디안이 자신의 처소에서 목욕하는 장면이니 아주 내밀한 초상이 아닐 수 없다. 실제 여인의 초상을 누드로 그릴 때는 신화나 성경의 탈을 씌우는 것이 관례라, 실제 인물의 목욕탕을 들여다보듯이 그린 이 그림이 혹시 다른 이야기 속 어떤 누군가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 시기 프랑스 왕궁에 거처를 둔 여인의 목욕탕 그림은 이것 말고도 또 다른 사례가 있다. 이러한 목욕 그림들은 전신을 보여주는 부담을 덜면서도 여성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구도로, 프랑스 왕가를 중심으로 주로 왕의 정부들을 모델로 그렸다. 디안의 다른 초상화와 비교해봤을 때, 목욕탕 안에 있는 인물은 디안의 초상적 특징과 거의 동일하다.

목욕통은 나무로 만들어졌고 디안이 목욕통에 걸친 천을 살짝 걷어 올린 손 아래 부분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목욕통은 구리나 나무로 만들었는데, 통 안에 들어가면 구리나 나무가 차게 느껴질 수 있으므로, 천을 씌워 그 위에 물을 받았다. 물은 당연히 하녀가 데워서 채워야 했고, 그림의 원경에 물통을 들고 좀 지친 얼굴을 한 하녀가 물을 데워 퍼 나르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녀의 옆에는 벽에 기댄 의자가 보이는데, 등받이에는 자수로 놓인 유니콘이 있다. 흰 뿔을 가진 유니콘은 상상 속 동물인데, 원래는 사납지만 처녀 앞에서는 유순해지는 동물로 그림 속에서는 처녀성과 순종을 상징해 성모 마리아와 함께 등장하기도 한다.

욕조의 한 부분에는 역시 천으로 감싼 나무판이 있는데 그 위에 여러 허브와 과일이 놓인 것을 볼 수 있다. 먹음직해 보이는 포도 위로 어린 남자아이의 손이 막 닿기 직전이다. 디안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패랭이꽃이다. 이 꽃의 그리스어가 디안투스(Dianthus)로 이 초상이 디안의 것이라는 데 단서를 하나 더 추가한다. 가장 독특한 것은 욕조를 감싼 붉은 천. 목욕탕 너머의 장면을 활짝 열어 보여주고 있는데, 원래는 물이 식지 않게 한 보온의 용도를 가졌겠지만, 화가는 이 천을 마치 연극무대를 열어젖히는 것처럼 활용하고 있다.

장 레옹 제롬의 ‘밧세바’(1889·왼쪽)와 프랑수아 클루에의 ‘목욕하는 여인’(1571경)의 부분을 클로즈업했다. 난간에 매달린 다윗왕과 목욕물을 데워 나르는 하녀. 벌거벗은 여인의 목욕이란 같은 소재의 그림이지만 ‘훔쳐보는 이’와 ‘관심없는 이’의 ‘다른 눈’을 통해 작품이 내보이는 ‘다른 지향’이 보인다.


눈이 갸름하고 코가 긴 특징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디안의 얼굴은 목욕하는 사람답지 않게 엄숙하고 진지한 표정이다. 젖을 먹이고 있는 유모가 웃는 모습을 생동감있게 보여주는 것과 대비되면서, 약간의 웃음기를 빼면 거의 성모 마리아의 얼굴처럼 이상화돼 있는 것이다. 이는 목욕 중의 한때를 열어 보여주는 것이지만 디안이란 인물이 언제 어디서든 품위를 잃지 않는 이상적인 여인이란 점을 강조하는 것이리라. 목욕 중임에도 불구하고 에로틱함을 발산하기보다는 일상의 풍경과 결합한 따스한 성격과 우아함이 더욱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디안의 목욕은 밧세바의 목욕과는 달리 젖먹이 아기와 뛰어다니는 남자아이, 유모와 물을 데우는 하녀를 한 프레임 안에 가두고 있어, 여인의 목욕을 다뤄 미술사에 남은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에로틱한 상상을 마음껏 허용하진 않는다. 아름다운 여인의 목욕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즐거운 한때를 그들만의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감상하게 한 것이다. 날개옷을 훔치고 엿보는 관음의 공간으로 묘사했던 목욕탕을, 일상의 여느 장소처럼 열린 공간으로 확장해낸 독특한 시도였다고 할까.

△이윤희 학예연구관은…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해외여행 자유화 덕분에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누구나 들렀던 어느 미술관에서 뜻밖에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그 수많은 작품을 설명하는 언어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도 함께였다. 이화여대에서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론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를 시작으로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등을 거치며 오래전 그 렘브란트의 감동을 현장으로 옮겼다. 지금은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으로 일한다. 일터에 나가면 미술작품들이 바로 곁에 있다는 것에 만족하며 전시기획을 하고, 글을 쓴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 ‘여성의 눈으로 보는 미술 키워드’의 출간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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