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나올 듯한 '여관'에 그림 보러 간다

보안여관 김정헌·주재환 '유쾌한 뭉툭' 전
1980년대 민중미술 이끌던 두 노장 콜래보
뚫린 천장 흙돌벽 드러낸 80년 보안여관서
'날선 시대정신' 다시 꺼내 고발·풍자 채워
  • 등록 2018-07-02 오전 12:12:00

    수정 2018-07-02 오전 12:31:38

서울 통의동 보안여관 1층 전시실 전경. 복도 끝에 ‘유쾌한 뭉툭’ 전에 나선 작가 주재환의 ‘절규’(1999)가 보인다. 성냥개비와 소주병 뚜껑을 소재로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내뿜는 부르짖음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보는 둥 마는 둥 그냥 지나칠 건물이다. 한마디는 붙였을 거다. “아니 이런 데 아직도 여관이….” 그도 그럴 것이 여기는 서울 종로구 통의동이다. 뒷골목도 아니다. 시내 한복판에서 청와대를 향하는 도로변, 경복궁 담벼락을 마주 보고 선 길가에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옛 목욕탕 사인을 올린 큼지막한 간판이 시선을 유혹한다. 이름하여 ‘보안여관’.

만약 용기를 내서 안으로 들어간다면 더 ‘해괴한’ 전경과 맞닥뜨리게 된다. 곧 꺼져버릴 것 같은 바닥, 너덜너덜한 벽지 사이 흙과 돌이 다 드러난 벽, 서까래만 간신히 얹힌 뚫린 천장, 삐거덕거리는 계단. 뒤에서 뭔가 튀어나올 듯한 분위기인데 그 틈과 틈 사이 용케 ‘그림’이 걸리고 ‘작품’이 서 있다.

맞다. 여기는 전시장이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낸 친절한 표시는 아무것도 없다. 건물 밖에 붙인 포스터가 안에서 뭔가 벌어지고 있다는 신호를 보낼 뿐.

이미 알고 있는 이들에겐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보안여관이 비영리 전시공간이 된 건 벌써 8년째다. 2004년 경영난 끝에 여관으로서의 생을 다하고 수년간 버려졌다가 2007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으면서다. 당시 복합문화예술공간을 운영하던 최성우(58) 일맥문화재단 이사장이 건물을 사들였고 2010년부터 전시를 비롯해 연극·워크숍 등 다양한 문화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운영을 시작했다.

서울 통의동 보안여관의 입구 전경. 80년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여관이란 이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옛 목욕탕 사인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여관건물을 언제 완공했는지, 언제부터 영업을 시작했는지 정확한 날도 모른다. 그저 1930년대부터 여관이었다던 이 건물은 80년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여관이란 이름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굳이 콘셉트라면 ‘낡은 건물의 역사성을 최대한 살려 과거·현재를 잇는 의미를 찾자’는 정도가 될까. 덕분에 외형은 ‘방치’되다시피 하고 있다. 최소한의 안전만 체크하는 정도로.

△두 노장, 여전히 살아있는 ‘날 선 시대정신’

이 엄청난 공간에서 원로미술가 두 사람이 만났다. 김정헌(72) 작가와 주재환(78) 작가다. ‘유쾌한 뭉툭’이란 타이틀을 내걸고 두 작가는 오래 묵히고 숙성해온 담론을 위트와 풍자, 고발과 상징으로 이어간다. 주 작가의 별칭인 ‘유쾌한’과 김 작가의 별명이란 ‘뭉툭’이 기꺼운 결합을 이룬 셈이다.

두 작가는 서슬 퍼런 1980년대 ‘민중미술’ ‘참여미술’이란 시대적 흐름을 함께 건너 왔다. 처음 만난 건 1979년이란다. ‘현실과 발언’의 동인이었다. ‘현실과 발언’은 1980년대 미술형태와 풍조를 반성하며 10여명의 미술가가 의기투합해 만든 민중미술운동의 핵이었다. 이후 탄압과 해체 등 이러저러한 사건·사고에 휘말렸지만 두 작가는 40여년째 막역한 사이로 지내고 있다. 세월의 우정, 시대의 동료. 그러면서도 2인전은 처음이다.

서울 통의동 보안여관 2층 전시실 전경. 삐거덕거리는 계단, 서까래만 간신히 얹힌 뚫린 천장 등 살점이 다 들어난 건물 프레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70여점의 회화·설치작품으로 꾸린 전시는 이들의 장기이자 무기인 ‘날 선 시대정신’을 다시 꺼내보인다. 예전 대표작과 미공개작 등을 최신작과 묘하게 대비시켜 ‘세상을 향한 성찰’ ‘세상에 대한 회오’ 두 가지 모두를 가져다 놨다.

전시는 2개 층의 전시장을 한 층씩 한 작가에게 할애하는 식으로 구성했다. 2층에 통째 올린 김 작가의 작품은 신작보단 과거작이 많다. 그만큼 과거는 그이에게 한 컷 사진 같은 흔적이다. “때와 장소를 근거로 해 치러냈던 작업들이 ‘과제미술’처럼 여겨졌다”고 말하는 그의 상황은 작품이 대신 말한다. 그 대표작이라고 하면 합판에 아크릴로 그린 ‘경제 정치 종교’(1995). 20년 전 세상을 움직인 거대한 실체를 130×486㎝짜리 대형평면에 상징적으로 묘사했다. ‘오직 나의 기억 속에는’(1996)이나 ‘농부 김씨’(1984) 등도 그의 한때 회한이 불거진 ‘끝나지 않은 이야기’처럼 보인다. 서정성 짙은 신작도 몇몇 나섰다. ‘달빛이 주목나무를 주목하네’(2017)나 ‘달빛과 주목나무’(2017) 등. 푸른 바탕에 새긴 서늘한 감성이 눈보다 가슴을 잡는 ‘주목’ 시리즈다.

김정헌의 ‘경제 정치 종교’(1995). 20년 전 세상을 움직인 거대한 실체를 130×486㎝짜리 대형합판에 상징적으로 묘사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서울 통의동 보안여관 2층 전시실 전경. 복도 끝에 ‘유쾌한 뭉툭’ 전에 나선 작가 김정헌의 ‘이상한 항해’(2017)가 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김 작가에 비한다면 주 작가의 작품세계는 좀더 ‘발랄’하다. 껌·낙엽·사탕·성냥개비·소주병 등 상상도 못한 오브제를 대거 동원한 덕이다. 그이에게 세상 모든 일은 유쾌한 농담과 해학으로 깔끔하게 정리된다. 밧줄에 묶인 벽돌을 액자에 가두곤 ‘정신타격 01’(2017)이란다. 그럴듯한 풍경화 액자 아래 노인얼굴이 든 패널을 걸곤 ‘정신해방 02’(2017)라 하고. 컴퓨터를 해체해 얻은 소모품에 낙엽을 달곤 ‘오, 인공지능이여 낙엽도 만드는가?’(2017)란 이름을 붙였다. 그러곤 이렇게 말한다. “80여년 가까이 살아보니 세상을 정말 모르겠더라.”

주재환의 ‘정신해방 02’(2018). 그럴듯한 풍경화 액자 아래 노인얼굴이 든 패널을 걸었다. 액자는 동네 분리수거장에서 주어온 작가미상의 그림이라고, 패널은 같은 운명에 처할지 모를 10년 전 자신의 그림이라고 소개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주재환의 ‘비깨도 05’(2018·왼쪽)와 ‘껌 댄스’(2004). ‘2017 평화달력’과 ‘몇 통의 껌’을 소재로 폭력 없는 세상에 대한 기원을 위트있게 꾸몄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서정주·이중섭·이상이 묵었다는 80년 흔적

80년 여관에 ‘작품’을 낸 원로작가의 2인전보다 화제가 될 만한 건 전시장이다. 사실 보안여관은 태생부터 문화예술과 무관치 않다. 보안여관이 진짜 여관이었을 그때 문인과 화가가 뻔질나게 드나들던 공간이었다는 거다.

역사적인 사건은 이것이다. 시인 서정주(1915∼2000)가 몇몇 동료시인과 문예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한 것. ‘시인부락’의 판권에 적힌 주소가 바로 ‘서울시 통의동 보안여관’이다. “1936년 가을 함형수와 나는 둘이 같이 통의동 보안여관이라는 데에 기거하면서 김동리, 김달진, 오장환 등과 함께 ‘시인부락’이라는 한 시의 동인지를 꾸며내게 되었다”(‘서정주 문학전집’ 3권 ‘천지유정’ 중에서).

서울 종로구 통의동 보안여관의 외부 전경. 시내 중심에서 청와대로 향하는 도로변, 경복궁 담벼락을 마주 보고 선 길가에 자리잡고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어찌 보면 이것만이 유일한 흔적이다. 일본에 가족을 떠나보낸 화가 이중섭(1916∼1956)이나 화가 구본웅(1906∼1953), 시인 이상(1910∼1937)도 보안여관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렸다고는 하나, 아쉽게도 기록이 없는 ‘사실’로만 전해진다. 옛 문학인의 ‘기’를 받으려는 지방예술가들이 장기투숙하던 장소였다는 얘기도 떠돈다. 이후 공무원 차지였던 시절도 있다. 통행금지가 있던 때 발이 묶여 야근하던 청와대 직원들이 종종 이용하기도 했단다. 하긴 폐업할 때까지 이 일대의 여관이라곤 이곳뿐이었다니.

그렇다고 ‘낡은’ 표상만 떠도는 건 아니다. 보안여관 바로 옆 건물에 들어선 ‘보안1942’가 역사성의 잔재를 수거하고 현재와 미래를 붙이는 가교역할을 해준다. 이 공간은 옛 보안여관을 인수한 최 이사장이 지난해 문을 연 ‘보안여관의 확장관’이다. 북카페·게스트하우스 등으로 ‘과거 여관’의 정통성을 잇고, 전시장·독립서점 등으로 ‘현재 여관’의 맥을 잇는다. 마치 시간여행을 보내듯 두 건물 사이에는 구름다리를 띄웠다. 어찌 보면 ‘처연한 모던’이다. ‘유쾌한 뭉툭’이 결합이 그랬듯이. 전시는 8일까지다.

서울 통의동 보안1942(왼쪽)와 보안여관. 보안1942는 보연여관의 확장관으로 지난해 문을 연 ‘새 건물’이다. 보안여관과 연계한 전시장과 더불어 북카페·독립서점·게스트하우스 등을 갖췄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서울 종로구 통의동 보안1942와 보안여관 사이. 마치 시간여행을 보내는 듯 두 건물 사이에 구름다리를 띄웠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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