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간작가…수없이 벗긴 달걀껍데기 연잎으로 환생시켜"

누크갤러리서 개인전 '숨, 쉼' 연 작가 정채희
잘게 부순 흰 달걀껍데기 조각 하나씩
6~7번 칠한 옻칠판에 붙여 만든 연잎
종이풀 쒀 빚은 닮은듯 다른 동자상도
몸 고되고 시간 걸리는 지난한 작업도
하나둘 모여 형상화 하는 과정에 매력
  • 등록 2021-10-19 오전 3:30:00

    수정 2021-10-19 오전 3:30:00

작가 정채희가 서울 종로구 평창동 누크갤러리 개인전 ‘숨, 쉼’에 내놓은 21점의 ‘동자’ 상 앞에 앉았다. 종이풀을 쒀 만들었다는, 닮은 듯 다른 동자들은 고택 서까래였던 나무기둥에 올라서서 저마다의 생각에 빠져 있다. 정 작가는 “다른 재료와 재료가 만나 또 다른 형체를 만들어가는 게 인연인 것 같다”고 말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두 갈래 길이 보인다. 양쪽을 향해 있지만, 으레 그렇듯 선택을 해야 하는 건 아니다. 아니, 선택할 수가 없다. 둘 다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서다. 덕분에 ‘특별한 규칙’이 생겼다. 한 길에서 다른 길로 넘어가려면 반드시 출발했던 그 자리로 되돌아와야 한다. 그래도 좋다. 몸은 고되고 시간은 배지만, 못 간 길이 아쉬워 땅을 칠 후회는 없을 테니. 사는 일도 그럴 수 있다면 좋으련만. 하지만 결국 그 양 갈래 앞에서 또 멈칫하고야 만다. 하나를 고르진 않아도 하나를 먼저 잡는 순서는 있을 텐데 싶었던 거다. 뭐 사는 일이 다 그렇지, 쉬운 게 있으려고.

발도 디디기 전 머리와 마음을 참으로 복잡하게 만든 여기는 작가 정채희(64)가 개인전을 열고 있는 곳이다. ‘숨, 쉼’이란 테마를 달고 서울 종로구 평창동 누크갤러리에 펼쳤다. 눈치가 빠른 편이라면 알아챘겠지만, ‘숨, 쉼’은 바로 그 두 갈래 길에 붙은 ‘표지’다. 굳이 내걸진 않았지만 내건 것보다 더 선명하게 방향을 가리키는. 그 표지 아래 언뜻 한 작가의 작업이라 생각하기 쉽지 않은, 닮지 않은 평면과 입체, 회화와 조각, 두 길이 나 있다.

정채희의 ‘연(緣) 2021-1’(2017∼2021·92.5×122㎝). 옻칠을 겹쳐 만든 바탕에 잘게 부순 달걀껍데기 조각을 정교하게 박고, 나전으로 포인트를 주고 분채로 색을 입혀 신비롭고 고즈넉한 연잎을 그려냈다. 옻과 달걀껍데기, 연잎이 새로운 인연으로 다시 만난 순간이다(사진=누크갤러리).


옻칠에 얹은 달걀껍데기로 그려낸 연잎

정 작가는 칠화 작업을 한다. 흔히 ‘옻칠’이라는 그거다. 또 ‘동자’를 빚는다. 작고 동글한 몸통을 수줍게 내린, 다리 없는 조각상이다. 이 두 작업은 때론 섞이고, 때론 떨어져, 장르적 심정적 간격을 유지한 채 ‘작가 정채희’를 만들어왔다.

“공간을 해석해 그에 걸맞게 작품을 만드는 작업과정을 좋아한다. 전시할 장소가 달라지면 다른 장면이 나올 수밖에 없다.” 특히 이번 개인전이 그랬다. 하늘을 향해 창이 난 전시장, 나무상자 같이 깊이 들어앉은 전시장, 두 갈래의 공간을 보는 순간 ‘이거다!’ 했단다. 그렇게 ‘숨’에 칠화 20여점을 걸고, ‘쉼’에 동자상 21점을 놓았다.

그저 쉬운 말로 ‘옻칠’이고 ‘조각’이지만 작업 수위는 ‘힘들다’를 넘어선다. 우선 옻칠한 화면. 작가의 칠화에는 ‘난각’이 필수다. ‘동물 알의 껍데기’ 말이다. 주로 달걀껍데기를 사용하는데. 한마디로 이거다. ‘잘게 부순 달걀껍데기 조각을 옻칠한 화면에 하나씩 붙여낸 작품.’

정채희의 ‘연(緣) 2017’(2017·100×120㎝) 부분. 온전히 옻칠한 배경에 조각낸 달걀껍데기만을 붙여 완성한 작품이다. 바람에 휘날리는 연잎을 작가의 느낌 그대로 옮겨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강도를 이해하려면 작업 속속을 들여다보는 게 빠르다. 시작은 알맹이를 뺀 달걀껍데기를 모아 물에 불리고 속껍질을 벗겨내는 것부터다. 누구나 아는 껍데기 속 얇은 막을 빼내는 일인데, 생각처럼 그 막이 한 겹인 건 아니란다. 손끝으로 수없이 문질러 몇겹을 ‘모조리’ 벗겨내고 순도 100%로 말끔해진 껍데기만 모아둔다. 하루종일 붙들고 있어도 속도가 나질 않는 데다가 한 알에서 반쯤 건지면 꽤 수확한 거라고 했다. 게다가 ‘색’을 입히려면 노란달걀은 자격미달. 한국에선 절대소수인 하얀달걀만을 쓴다는데. 그러니 어쩌겠나. 수입을 해야지. “외국에 사는 지인·친구를 총동원해 하얀달걀의 껍데기를 공수받는다”고 했다.

다음은 ‘바탕’이다. 비로소 옻이 등장하는데 나무판에 하염없이 칠을 해 바닥을 만든다. 꾸덕하게 마르면 칠하고, 꾸덕해지면 또 칠하고 그렇게 6∼7번이 ‘최소한’이란다. 여기에도 복병이 있다. 옻이란 게 예민하기가 칼끝이라 온도·습도가 최적일 때만 말을 듣는단다. 사람은 더위·추위에 시달려도 ‘옻칠’은 지켜야 한다니, 상전이 따로 없다.

정채희의 ‘연(緣) 2021-4’(2021·60×50㎝·왼쪽)과 ‘연(緣) 2021-5’(2021·60×50㎝). 연잎이라기엔 대단히 화려한, 마치 밤하늘에 불꽃이 터진 듯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극도의 밀도감이 단연 돋보이는 작품들은 난각·나전은 기본이고 금박(오른쪽)까지 박아낼 만큼 공을 들였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 험난한 준비를 끝내야 ‘본 게임’이다. 옻칠한 판 위에 대략의 스케치를 올린 뒤 잘게 부순 달걀껍데기를 한 조각씩 붙여나가는 거다. 그 조각을 고정하는 것도 옻이라고 했다. 딱 하루분량을 정해 그 넓이만큼 칠하고 완전히 굳기 전 잽싸게, 열심히 조각을 붙여내는 거다. ‘잽싸게 열심히’ 해도 한 작품에 ‘족히 몇달’은 기본이다.

그렇게 ‘산’도 세우고 ‘고목’도 심었다. 이번에 공을 들인 건 ‘연잎’이다. 칠흑같은 밤 누군가 저 밖에서 아스라이 빛을 쏜 듯한, 신비스럽고 고즈넉한 연작 ‘연’(緣)을 그려냈다. 제각기 다른 세상에서 온 재료가 맺어졌다고 해서 ‘연’이다. “이 작업에 빠진 이유가 있다. 균열을 안고 흩어졌던 작은 인연들이 모여 새 길을 찾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거다. 세포처럼 조각이 하나하나 모이고 연결돼 어떤 형상을 꾸려가는 과정과 결실이 좋다.”

정채희의 ‘그 안의 것들’(2015∼2021·100×75×5.5㎝)과 ‘그 밖의 것들’(2015∼2021·100×75×5.5cm). 나무 한 그루의 안팎을 반전시켜 나란히 대비한 작품.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어떤 걸 볼지가 결정된다. ‘연잎’ 이전에 시도한 나무 시리즈다. 완성까지 장장 6년이 걸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닮은 듯 다른 21점 ‘동자’ 상은 ‘쉼’이 맞다. 고된 칠화에서 잠시 벗어나려 시작한 일. 작가는 “잠시 쉬려고 손을 댄 작업인데 이 역시 만만치 않더라”며 웃는다. 세라믹으로 빚기도 하지만 전시작은 모두 종이풀을 쑤어 제작했다. 여기에도 ‘인연 스토리’가 있는데, ‘동자’들을 올려둔 버팀목 말이다. 어느 집 난로 아궁이에 들어갈 뻔한 고택의 서까래를 극적으로 구조해 사용했다는 거다.

서른아홉에 다시 떠난 길에서 찾은 인연

세상에 편안한 작품은 많다. 하지만 편안한 작업한 작품은 많지 않다. 정 작가의 작품은 그 보편적 기준에서도 벗어난다. 편안하게 볼 수도 없을 뿐더러 작업에는 더할나위 없는 불편이 따르니. 이 복잡다단한 길에 들어선 건 중국에 유학을 가면서부터란다. “벽화를 전공하는 중에 ‘옻’의 매력에 빠져버렸다”고 했다. 사실 작가는 서양화로 출발했다. 서울대 회화과로 입학해 당시 ‘대세’던 서양화전공으로 졸업을 했는데. 남들 다 하는 그 평범한 그리기에 흥미를 못 가졌나 보다. 어느 순간 붓을 놔버렸고 하루이틀이 결국 10년이 됐다. 10년 만에 복귀한 뒤 첫 개인전은 혼합매체의 추상작업. 그런데 그것도 영 아니었다. “이럴 거면 왜 다시 한다고 했나 하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그래서 중국으로 갔다. 서른아홉 살이었다.”

정채희의 조각상 ‘동자’ 21점 중 부분.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표정이든 자세든 같은 형체는 하나도 없다. 어느 고택 서까래로 썼던 나무를 잘라낸 기둥에 세워 또 다른 인연을 만든 셈. “완성을 의미하는 숫자 7을 3번 반복해 나온 21은 더 큰 세상으로 나가는 기본단위”라고 귀띔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살아온 과정이 딱 그랬다. 이번 개인전의 두 갈래 길. 다른 길을 가기 위해 그이는, 처음 떠났던 그 자리에서 다시 출발했다. 몸이 고되고 시간도 오래 걸렸지만 후회는 없다. 아니 잘 걸어온 길이었다. 그러곤 그이는 ‘중간작가’가 됐다. 신진작가도 아닌 중견작가도 아닌, 신진에게 주는 지원과 배려를 받을 수도, 중견에게 걸맞은 대우와 보상이 따르지도 않는, 작가군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됐다는 얘기다.

그 길목에서 만난 이가 조정란 누크갤러리 대표다. 중간작가를 재조명해보자 했던 건 조 대표가 개관 이래 죽 유지해온 고집 같은 신념이다. “끊임없이 작업하지만 흐름에 맞지 않으면 주목조차 받지 못하는 그런 작가를 좀더 알려야겠다”는 다짐을 실천했던 거다. 옻을 만난 달걀껍데기라고 할까, 연잎을 마주한 동자라고 할까. 인연은 이렇게 또 빚어졌다. 전시는 29일까지.

작가 정채희가 서울 종로구 평창동 누크갤러리 개인전 ‘숨, 쉼’에 건 자신의 작품들 가운데 섰다. 왼쪽부터 ‘연(緣) 2021-8’(2021·50×60㎝), ‘연(緣) 2021-4’(2021·60×50㎝)과 ‘연(緣) 2021-5’(2021·60×50㎝). 정 작가는 “하면 할수록 정복되지 않는 천연재료가 갖는 복잡미묘한 까다로움에 재미를 느낀다”고 말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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