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화백이 미리 쓴 비문 "변하지 않으면 추락, 변해도 추락"

국립현대미술관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전
구상·추상 초기작, 앵포르멜 작업부터
연필 수천번 그어 시작한 '묘법' 연작
"근육 빠져 배만 볼록해도 발가벗고"
70년 화업 망라한 대규모 회고전으로
  • 등록 2019-06-24 오전 12:45:01

    수정 2019-06-24 오전 12:50:19

박서보의 ‘묘법 No.080618’(2008·왼쪽)과 ‘묘법 No.931215’(1993). 왼쪽은 색채묘법이라 불리는 후기작. 일정간격을 두고 막대기 등으로 밀어내는 방식으로 길고 선명한 선과 고랑을 만들어냈다. 오른쪽은 연필묘법에서 지그재그묘법으로 변화하던 시절의 작품. 바탕에 진한 원색을 입히고 검은 물감을 다시 발라 밀어내며 회화성을 얻어냈다(사진=국립현대미술관).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10분쯤 늦을 거라 귀띔한다. “연로한 노화백이니 이해해 달라”고 했다. 얼핏 상상이 안 됐다. 그 쟁쟁하던 분이 정말 그럴까. 결국 10분을 넘겨서야 화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입장이 단순치 않다. 휠체어에 앉은 채였으니까. 긴 지팡이까지 어깻죽지에 걸치고.

분위기를 감지한 건가. 첫마디부터 무게가 실렸다. “내가 숨기고 싶었던, 내가 살아온 과정을 다 드러낸 전시다. 발가벗고 선 입장이다. 사실 내가 발가벗은 것보다 그림이 발가벗은 게 더 아름다울 텐데. 난 이제 근육이 다 빠져나가고 배만 볼록한 노인이 됐으니.”

박서보(88). 그가 누구던가. 한국추상미술의 선구자로, 거장으로 불려온 이다. 그를 빼놓고 한국의 현대미술을 말하는 건 불가능하다. 국내 최초 앵포르멜(2차대전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새로운 회화운동. 작가의 즉흥적 행위·감정을 중시하는 추상미술) 작가로 이름을 올리며 한국미술의 흐름을 틀고 비틀더니, 1990년대 중반 이후 ‘단색화’ 바람을 타고서는 그 기둥이 됐다. 교육가로 행정가로 평론가로 활약한 것도 모자라 한 점당 수억원을 호가하는 단색조 대표작가로도 우뚝 섰다. 화단에선 무서울 게 없던 그였다. 그런데 세월은 어찌하지 못했나 보다. 어느덧 아흔을 바라보는 ‘연로한 노화백’으로 우리 앞에 나섰으니.

박서보 화백이 휠체어에 올라탄 채 자신의 작품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뒤로 ‘묘법 No.991004’(1999)가 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 대규모 회고전으로 마련한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전. 개막 이후 한 달 남짓, 거장이 일생을 활활 태운 70여년 화업을 경외하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1950∼1960년대 구상·추상 초기작, 한국식 앵포르멜 회화로 전쟁의 상흔과 불안·고독의 정서를 내보인 ‘원형질’시대, 옵아트·팝아트를 수용한 기하학적 추상에 한국 전통색을 띄워 물질-추상의 관계를 밝힌 ‘유전질’시대를 잇는다. 이후는 1970년대부터 평생을 품어온 ‘묘법’ 시리즈다. 연필로 수없이 그어댄 선긋기를 거쳐 닥종이 등 한지물성을 색감으로 극대화한 ‘지난한 노동’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냈다. 160여점을 걸었다. 그저 수행자처럼 걸어온 인생그림이다. 지치지도 않고 지칠 겨를도 없었다.

박서보의 ‘유전질 No.7-69-70’(1970). 전통과 서구의 결합을 실험하던 시절의 작품이다. 오방색 비키니를 입은 여인이 등장하고, 몸이 빠진 채 옷만으로 형태를 잡은 인간상도 이즈음 만들었다. 붓을 사용하지 않고 스프레이만으로 작업했는데, 화백이 건강을 해친 것도 이 때문이라 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한국추상미술 선구자가 쓴 ‘반골의 역사’

“수많은 일을 겪었다. 자다가 중앙정보부가 있던 남산에 끌려가기도 하고. 하지만 한 번도 굴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 앞에서 도도하게 내 생각을 펼쳐왔다.” 말이 쉽지, 이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린 안다. 빛이고 그늘인 삶. 전쟁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한 동료작가들이 하나둘 사라져 갈 때도, 반정부작가로 낙인찍히고 매장당할 때도, 남들이 인정하지 못하는 화풍으로 이단아 취급을 받을 때도, 길을 놓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1956년 반(反)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을 선언하며 화가 김영환·김충선·문우식과 의기투합해 독립전을 이끌었던 게 그 한 단면. 명실공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미술상에 ‘초짜화가’가 정면으로 대든 ‘괘씸한 사건’이었다. 이때 나온 작품이 ‘회화 No.1’(1957)이다. 한국의 첫 앵포르멜 작품으로 기록됐던 이 그림이 이번 전시에 나왔다. 첫 공개다.

박서보의 ‘회화 No.1’(1957). 한국 최초의 앵포르멜 작품으로 기록돼 있다. 한국전쟁 이후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도시의 건물잔해에 철근이 뒤엉킨 광경을 보고 제작했다고 전한다. 이번 전시에 처음 나왔다(사진=국립현대미술관).


화백의 ‘반골’기질은 홍익대 교수 시절 도드라졌다. “미술시간에 화병과 꽃·사과·명태 놓고 그리라는 교육으론 절대 좋은 작가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뻔한 미술교육에 반하며 홍대 미대 개혁의 선봉에 섰던 셈인데. 당장 미운털이 박혔다. “더러워서 사표를 냈다.” 1966년 일이다. 그런데 이 일이 화백의 일생을 바꿨다. 호기롭게 사표는 냈는데 아득하더란다. 경제사정도 그랬지만 ‘화가의 고민’도 시작됐으니. “그동안 해온 게 뭐냐. 서양 애들의 회화이론을 짜깁기하고 있었던 거 아니냐.” 자신에 대한 매질을 시작한 셈이다. 불경·노자·장자 안 읽은 게 없다던 그 시절 끝에 결국 다다른 지점은 여기다. “결국 나를 비워내야 하겠더라. 캔버스를 비우자. 그래야 다른 사람이 와서 쉬어갈 수도 있고.”

그런데 도대체 방법을 모르겠더란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작은 아들이 방한지 노트에 한글을 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단다. 글자가 작은 네모 안에 제대로 안 들어가는 게 짜증이 났던지 마구 긋다가 내던져버리는 그 모습이. 아차, 했다. 내가 찾던 게 저기 있구나. 일생을 고민하고 탐닉해온 ‘묘법’이 탄생하던 순간이다. 화백이 “연필을 가지고 날 비워나가는 작업”이라 했던 그것.

박서보의 ‘묘법 No.190227’(2019). 올해 제작한 신작이다. 빗질로 그어낸 듯한 분홍·회색 바탕에 유백색 물감을 얹고 마르기 전에 연필로 무수히 그어 완성했다. 10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진 이후 도와주는 이 없이 처음으로 오롯이 혼자 이뤄낸 작품이란다(사진=국립현대미술관).


전시장 초입에 걸린, 올해 어렵게 완성했다는 대작 ‘묘법 No.190227’ ‘묘법 No.190411’ 두 점은 그때 이후 반세기를 더듬어온 역작이다. 빗질로 그어낸 듯한 분홍·회색 바탕에 유백색 물감을 얹고 마르기 전에 연필로 무수히 그었다. 10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진 이후 처음으로 오롯이 혼자 이뤄낸 작품이다. 그 앞에서 화백은 돈 보따리를 던져줘도 팔지 않을 거란 한마디로 차마 더 풀어내지 못한 지난 과거를 에둘렀다.

△치열한 ‘독종’이 미리 써둔 묘비명

단연 ‘묘법’이 중심이지만 전시는 회고전답다. 초기 구상·앵포르멜 작업부터 중기 ‘원형질’ ‘유전질’ 연작에까지 고르게 할애했다. 박서보스럽지 않은 파격적인 설치작품 한 점도 눈에 띈다. 육체는 빠져나가고 육체를 감싸던 외피만 남긴 인물군상이 붉은 조명과 어우러진 작품. ‘허의 공간’(1970·2019 다시 제작)이다. 절친이던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의 제안으로 만들어 1970년 일본 오사카엑스포 한국관에 세웠더랬다. 전시기간을 채우지도 못했다. 반정부기질이 보인다 해 도중 철거됐던 거다. 49년 만의 귀환이라고 할까.

박서보의 설치작품 ‘허의 공간’(1970·2019). 육체는 빠져나가고 외피만 남긴 인물군상을 붉은 조명과 어울렸다. 절친이던 건축가 김수근의 제안으로 1970년 일본 오사카엑스포 한국관에 세웠으나 반정부성향을 트집잡혀 도중에 철거됐다. 49년 만에 다시 나왔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화백을 두고 후대는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라 말한다. 평생 꿈틀거렸으니, 지키고 바꿨으니, 전통을 부수지 않은 혁신을 끊임없이 꾀했으니. 하지만 이 때문에 발목이 잡히기도 했다. 1970년 교수직에 복직한 뒤 미술계에 고질적 병폐가 된 ‘홍익대 사단’을 단단히 굳힌 인물로 비난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나와 같이 출발한 친구들이 사라져갔다. 그 유능한 작가들이 중도에 다 실패하고 나 같은 독종만 살아남았다. 끝까지 물고 있어서 성공한 거다.” 맞다. 달리 어찌 설명해낼 건가.

일생 품어왔다는 좌우명이 철학으로, 글로, 그림으로 전시장 곳곳에 배어 있다. ‘변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그러나 변하면 그 또한 추락한다.’ 아마도 그는 이 명제를 영원히 품고 갈 작정인가 보다. “오래 살 것 같지 않아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는데, 이 문구를 내 비석에 적으려 한다.” 전시는 9월 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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