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히 거짓말"…4000점에 배인 예술혼 찾기

'김종영, 그의 여정' 전
'추상조각 선구자' 배경 찾는 특별전
서예·드로잉·조각 등 엄선한 100여점
겸재·추사 글·그림에 빠진 배경 보여
내달 31일까지 김종영미술관서
  • 등록 2017-04-17 오전 12:15:03

    수정 2017-04-17 오전 8:10:09

김종영의 ‘세한도’(1973). 종이에 펜과 먹, 수채로 그려낸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의 동명작품을 모티브로 했다. 58세의 추사가 제주도를 배경으로 삼은 ‘세한도’는 58세의 김종영이 찾아낸 배경 삼선교에서 다시 태어났다(사진=김종영미술관).


[이데일리 오현주 선임기자] “예술이란 거짓에 기초를 둔다. 그러므로 작가는 거짓이란 것을 철저히 인식하고 확고한 거짓 위에 자기의 예술이 되어지도록 해야 한다. 예술의 진실은 어디까지나 가공적인 거짓에 있는 것이고 진실한 거짓만이 예술이다. 촉감을 느낄 수 있도록 철저히 거짓말을 해야 한다”(1958년 11월 김종영의 메모에서).

우성 김종영(1915∼1982). 세상은 그를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라고 부른다. 추상이 도대체 뭔지, 세상이 미처 파악하기 이전부터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들이미는 작품세계를 꾸려냈던 거다. 후대가 봤을 때야 선구자지, 세월을 일찍 거스른 ‘남다른’ 그의 작품은 감동의 조각품보단 이해 못할 덩어리였다. 정말 “철저히 거짓말” 같은 예술이었다.

김종영 ‘자화상: 두보 단청인증조장군패’(1975)(사진=김종영미술관).
아쉬운 건 하나 더 있다. 조각가란 타이틀 말이다. 김종영이 생전에 남긴 조각품은 나무·돌·브론즈 등 알려진 것만 100여점. 수장고에 보관한 200여점을 포함해 300여점에 달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하지만 그가 남긴 일필휘지의 서예작품은 1000여점이다. 빼어난 붓질의 수채·유화·드로잉 등 회화작품은 3000여점. 묵직한 중압감에만 눌려 ‘편의상’ 조각가로 부를 일이 아니란 얘기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이 김종영 다시보기에 나섰다. 오는 5월 31일까지 열고 있는 ‘김종영, 그의 여정’ 전이다. 서예·드로잉·조각은 물론 편지·유품 등 100여점을 엄선해 미술관 전관을 통틀어 세우고 걸었다.

1915년 경남 창원서 태어난 김종영은 사대부가의 후손답게 선비교육을 받았다. 시서화는 기본이었다. 17세 휘문고보에 재학 중이던 1932년에 ‘제3회 전조선학생작품전람회’에서 중등부 습자 장원을 받은 것도 무관치 않다. 미술계 데뷔작이라 할 그 글씨가 이번 전시에 나왔다. 나란히 붙은 “온정신을 드려 만히(많이) 써볼 일임”이란 헤드라인의 동아일보 인터뷰 기사가 재미있다.

김종영 ‘자각상’(1971)(사진=김종영미술관).
탄탄한 재능으로, 궁극적으론 서양회화와 조각에까지 동서양 미학의 기본기를 만들어낸 김종영의 서화작품이 세상에 공개된 건 채 10년이 되지 않는다. 겸재 정선이나 추사 김정희의 글·그림에 빠져든 배경도 비로소 드러났다. 겸재의 ‘만폭동도’를 모방해 거침없는 선과 색으로 채운 드로잉 ‘만폭동도 방작’(1970년대 초반), 추사의 ‘세한도’에서 모티브를 얻어 당시 살던 삼선교를 배경으로 그린 ‘세한도’(1973)는 결국 전통을 입은 현대였다. 특히 추사가 제주도에서 ‘세한도’를 그린 58세, 김종영 역시 같은 그 나이에 ‘세한도’를 그렸다는 건 우연만으로 보기 힘든 고리가 있다.

언제가 됐든 김종영을 제대로 한번 살피고자 했다면 이번 전시는 꽤 적절하다. ‘만폭동도 방작’이나 ‘세한도’ 등의 드로잉을 비롯해 ‘옥순봉’(1964), ‘옹유등 송승유산’(1970) 등의 서화, 구태여 깎지 말라는 ‘불각(不刻)의 미’를 글씨로 남긴 ‘불각재’(不刻齋) 등의 서예·판각작품, 1970년대 집중적으로 빚고 그린 다수의 ‘자각상’ ‘자화상’ 등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초기작도 여럿이다. 18세에 그린 유화 ‘동소문 고개’(1933), 1953년 국전에 출품했던 추상 나무조각 ‘새’(연도미상), 철제조각 ‘전설’(1958) 등이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여정을 만든다.

김종영 ‘겸재 만폭동도 방작’(1970년대 초반)(사진=김종영미술관).


전시는 50세가 되던 1964년을 기점으로 이전과 이후의 변곡점만 구분했을 뿐 굳이 연대기식 나열로 피로감을 만들지 않는다. 변곡점을 잡아낸 이유는 하나다. 1964년 1월 1일의 일기. “지금까지의 제작생활을 실험과정이었다고 하면 이젠 종합해야 할 것”이라고 썼다. “조형의 본질, 형체의 의미 등 실험을 종합할 수 있다면 50이란 나이가 결코 헛된 세월은 아닐 것”이라고.

드문드문 박은 메모와 일기 등은 예술가 본연의 자세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의 철학까지 아우른다. 1948년부터 1980년까지 서울대 미대 교수로 재직하며 체득한 예술교육의 안과 밖이다. 인공적인 손질을 최소화할 것, 재료 자체의 원형을 살릴 것, 사람과 자연을 거스르지 말 것. 35년 전 타계한 인물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 나무·돌·철의 무게감은 바닥에서 잡아당기는 뿌리 때문이었다. 절제가 지나쳐 참으로 무심한 예술. ‘진실한 거짓을 흠씬 묻힌’ 깊이가 거기에 있다.

김종영 ‘동소문고개’(1933)(사진=김종영미술관).
김종영 ‘옹유등 송승유산’(1970)(사진=김종영미술관).
김종영 ‘작품68-1’(1968)(사진=김종영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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