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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생각]①정교일치…'선택의 전쟁'서 승리한 무함마드

지상 강의: 'WarStrategy' 10강 이슬람의 팽창과 전략적 사유
상인 출신 특유의 현실감각…메디나 헌장 통해 존재감 입증
27일간의 청야전술…기발한 전략으로 수적 열세 뒤집기도
  • 등록 2021-04-07 오전 5:00:00

    수정 2021-04-07 오전 5:00:00

오늘의 강연 및 지성인

☆ 워-스트래티지(WarStrategy)

전쟁은 무기의 질, 병력의 수보다 어떻게 준비하고 어떤 전략과 작전을 바탕으로 전투를 수행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 한국전쟁을 시작으로 페르시아 전쟁 등 인류사의 향배를 결정지은 수많은 전쟁과 이에 얽힌 전략적 사유를 통해 개인과 국가의 행위를 이해하는 폭을 넓힌다.

☆ 최영진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중앙대에서 정치국제학과 교수로 재직.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육군, 지작사, 특전사 발전자문위원. ‘전쟁과 미술’ 발간. ‘현대군사명저를 찾아’, ‘군사고전 다시읽기’, ‘역사속의 군사전략’ 등 기고 중.

최영진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가 서울 중구 순화동 KG하모니홀에서 ‘위대한 생각 : 워-스트래티지’ 10강 ‘이슬람의 팽창과 전략적 사유’ 편을 강의하고 있다.(사진=김태형 기자)
[총괄기획=최은영 부장, 연출=권승현 PD, 정리=유현욱 기자] 최영진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는 “이슬람 세력은 무함마드 시대(622~632년)부터 정통 칼리프 시대(632~661년)까지 40년 만에 북아프리카,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이란까지 영토를 팽창했다”면서 “이런 대단한 역사가 가능했던 것은 시대를 초월한 무함마드의 전략적 사유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는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이슬람식 종교·군사·정치적 시스템의 초석을 놓았다. 무함마드 시대 중요한 전투들을 중심으로 이를 해부해본다.

불혹에 상인에서 선교자로 대변신…무함마드의 생애

무함마드는 570년 메카(쿠라이시 부족)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차례로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된 무함마드는 할아버지와 삼촌 손에서 자랐다. 장성하면서 카라반(무역상)에 합류한 무함마드는 자신의 진가를 알아봐 준 상단의 여주인과 결혼해 비교적 순탄한 삶을 살았다. 우리로 치면 불혹(40세)을 넘긴 610년 무함마드는 은둔과 명상에 들어갔다.

무하마드가 동굴에서 대천사 가브리엘을 만나 계시를 받고 있다. (이미지=강사 제공)
이때 대천사 가브리엘로부터 계시를 받고 613년부터 이를 본격적으로 전파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삶은 이전과 180도 달라졌다. 이내 메카 주류 사회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고 622년 메디나로 근거지를 옮겨야 했다. 자신을 따르던 몇 안 되는 무슬림(이슬람교도)을 이끌고서다. 후세에선 그해를 이슬람의 원년(元年)으로 본다. 최 교수는 “메디나에서 메카로 순례를 온 사람 가운데 무함마드와 만나 감화받은 이들이 그를 초청한 측면도 있다”고 부연했다.

당시 메디나는 보복이 또 다른 보복을 불러오는 등 부족 간 불화와 갈등이 끊이질 않았다. 여기에서 무함마드는 중재자로서 권위를 인정받으면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데 성공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함무라비 법전식(式) 대응이 아니라 살인 등 범죄에 대해 위자료를 물리는 방식으로 상인 특유의 현실감각을 발휘했다. 피비린내나는 복수의 시대는 그렇게 무함마드에 의해 저물었다.

최 교수는 “(무함마드는)자신들을 포함한 9개 부족 간의 평화협정을 주선했다. 이들은 하나의 공동체인 ‘움마’(Ummah)를 형성하는 데, 움마는 나중에 무슬림 공동체 전체를 일컫는 말이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무함마드가 성립시킨 ‘차트 오브 메디나’, 즉 메디나 헌장에 따라 내적인 단결을 도모하고 외적인 위협을 함께 막아내는 안보공동체가 만들어졌다”면서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라고 평가했다. 메디나에 이주하자마자 이뤄낸 이 같은 업적은 무함마드가 단순한 종교 지도자를 뛰어넘는 존재임을 대내외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사람들을 설득해 타협을 이끌어내는 정치력과 외교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무함마드의 기념비적 첫 전투…3배 이상 전력 차이 극복한 전략가

그럼에도 이주 직후 무함마드 세력은 보잘것없었다.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취약했다. 무함마드의 첫 번째 군사활동은 메카와 메디나를 오가는 카라반을 습격하는 것이었다. 무함마드와 이슬람에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이들은 메카에 놓고 와 빼앗긴 재산을 되돌려받는다는 명분으로 카라반을 공격했다.

처음에는 10명 내외의 소규모로 부대를 구성했으나 점점 규모가 커지더니 급기야는 메카의 최대 상단 중 하나였던 아부 수피얀의 카라반을 약탈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아부 수피얀의 카라반은 시리아에서 물건을 사서 메카로 되돌아오는 길이었다. 메디나에 첩자를 보내 무함마드의 계획을 알게 된 아부 수피얀은 메카에 협조를 요청했다. 메카에서 무함마드를 막기 위한 쿠라이시 부대가 메디나로 북진했다. 624년 양측 군대는 바드르에서 만나 전투를 벌이게 된다.

바드르 전투 개요.(자료=강사 제공)
당시 무함마드의 군대는 수적 열세에 놓여 있었다. 아부 수피얀의 군대와 전력 차이는 3~4배나 됐다. 이에 무함마드군은 전면이 좁은 곳을 전장으로 택할 수밖에 없었다. 메카에서 달려온 군대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우물을 파괴하기도 했다. 물을 마시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장수끼리 대결에서 승리한 무함마드군은 기선을 제압했고, 이어진 전면전에서도 기어이 승리했다.

최 교수는 “무함마드 군대는 종교적 사명감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명령에 의해 움직이는 쿠라이시 군보다 강력했다”고 말했다. 제대로 된 전투에서 무함마드 군이 처음으로 거둔 승리였다. 메디나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무함마드의 권위를 다시금 공고히 한 기념비적인 전투이기도 했다.

최 교수는 “포로 처리 문제 역시 쟁점이었는데, 관행에 따라 처형하지 않고 무함마드는 몸값을 받고 풀어주며 자신의 관대함을 과시했다”면서 “(동시에) 전투의 발단이었던 경제적 어려움도 해소했다. 무함마드는 이를 이슬람 세력의 전력을 강화하는 기반을 닦는 데 썼다”고 말했다.

정치-종교 길항관계에도 균형 감각 발휘한 전무후무 지도자

무함마드가 명성을 드높이면서 이슬람에 귀의하는 이들도 조금씩 늘어났다. 반대로 그를 경계하고 적대시하는 이들도 많아졌다. 그로부터 1년 후 메카에서 더 많은 쿠라이시 군이 메디나를 공격해온다. 전력 차 역시 더 벌어졌다. 메디나 북서쪽 우후드 산기슭에 진을 친 무함마드는 길목 한가운데 언덕에 궁수를 배치해놓았다.

최 교수는 “전선 전면은 제한된 병력이 싸워야 해 전투 결과는 전면의 전사들에게 달려 있었다”면서 “무함마드의 기대대로 쿠라이시 군을 밀어냈지만 궁수들이 자신들의 자리를 떠난 사이 쿠라이시 군 일부는 무함마드 군을 측면에서 공격했다”고 말했다. 무함마드 군은 전열이 흐트러졌지만 산기슭으로 달아나 궤멸만은 피했다.

쿠라이시 부족을 중심으로 유대인, 베두인 등이 연합한 1만명이 626년 또다시 메디나를 공격했다. 이에 맞선 메디나 방어군은 6000명가량이었다. 메카 연합군이 진군하는 6일간 무함마드 군은 참호전을 준비했다. 참호 밖에는 곡식 한 톨 남기지 않고 없애버리는 청야 전술로 장기전을 대비했다. 12월 아라비아 반도의 밤은 춥고 혹독한 비바람이 몰아쳤다. 최 교수는 “무함마드는 연합군의 중요한 병력인 베두인 가타판을 회유하는 한편 적군에 붙은 바누 쿠라이자 부족을 적절히 견제해 27일간 이어진 칸다크 전투는 결국 무함마드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고 말했다.

무함마드 군은 자신들을 배반한 쿠라이자 부족의 남자는 처형하고 여자는 노예로 팔아치운다. 최 교수는 “포로에 관대했던 무함마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집단학살”이라며 “배신이 반복되지 않게끔 하는 경고하면서 자신의 위용과 권능을 강조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래픽=강사 제공)
628년 무함마드는 1400명의 순례단을 이끌고 메카의 카바로 향하는 결정을 내린다. 카바는 신을 모시는 곳으로 성지 중에서도 가장 성스러운 곳이었다. 무함마드가 평화적인 행군에 나서자 메카 세력은 어찌할 줄 몰랐다. 군대로 공격하자니 체면이 서질 않았기 때문이다. 순례길을 막아보려 했지만 무함마드는 이를 피해 메카에 근접했다. 이 일을 계기로 양측은 10년간의 평화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최 교수는 “그동안 공성, 수성 등 군사적 활동이 많았으나 이 사건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메카 세력을 약화시켰다”면서 “무함마드의 전략적 사유가 빛을 발한 사례”라고 말했다.

630년 무함마드는 스스로 메카를 떠난 지 8년 만에 1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메카로 진군했다. 소소한 전투는 있었지만 사실상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무함마드의 군대는 메카에 무혈 입성했다. 아부 수피얀은 무함마드에 항복하고 이슬람으로 개종을 약속했다. 무함마드 역시 정적인 그에게 축복을 내리고 그의 지위를 인정해줬다. 이로써 무함마드는 메카-메디나 등 아라비아 동부 지역을 거느리게 됐다.

이슬람의 팽창 과정. (자료=강사 제공)
632년 무함마드는 눈을 감았지만 4명의 정통 칼리프들은 영토 확장을 계속했다. 최 교수는 “질서정연하고 강인한 이슬람군을 만든 건 종교의 힘”이라면서 “열심히 싸우다 죽는 자는 천국에 간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군사적 성취는 사회·정치적 지위나 명예와도 직결됐다.

무함마드는 승리를 위해 외부와 손잡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베두인 기병부대는 무함마드 군과 함께했으며 비 무슬림교도도 마찬가지였다. 최 교수는 “대단한 실용주의적 정신”이라며 “종교의 확산을 위한 전쟁이지만 (이에 얽매여) 전술적 유연성을 잃지 않은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면서 “무함마드는 다른 종교 지도자는 물론 정치 지도자와도 비교할 수 없다. 인류 역사에서 종교적 삶과 정치적 제도를 결합해 성취를 이룬 전략가는 무함마드가 유일무이하다”고 총평했다.

◇‘위대한 생각’은…

이데일리와 이데일리의 지식인 서포터스, 오피니언 리더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경제 인문학 토크 콘서트입니다. 우리 시대 ‘지성인’(至成人·men of success)들이 남과 다른 위대한 생각을 발굴하고 제안해 성공에 이르도록 돕는 프로그램으로, 지난해 이데일리 창립 20주년을 맞아 기획했습니다. ‘위대한 생각’은 매주 수요일 오후 6시 이데일리TV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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