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 칼럼]노사 관계 변화 못 따라가는 노동법

  • 등록 2021-05-24 오전 5:55:00

    수정 2021-05-24 오전 5:55:00

[여연심 법무법인 지향 변호사] 최근 수년 동안 대법원에서 선고된 가장 중요한 노동 관련 판결이 무엇인지 법률가들에게 물어보면 어떤 답이 나올까. 지극히 주관적인 의견이지만 2018년의 학습지 교사 판결을 꼽고 싶다. 대법원이 학습지 교사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는 아니지만 노동조합법상 근로자에는 해당한다고 판단한 사건이다.

여연심 법무법인 지향 변호사.
예전에는 ‘근로계약’을 체결한 한쪽 당사자가 사용자이고, 한쪽 당사자가 근로자라는 사실이 자명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근로계약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자-근로자 관계는 성립할 수 없었다. 단순하고 쉬운 논리이다.

하지만 이른바 특수고용형태근로자가 늘어나면서 이 쉬운 논리를 그대로 둬서는 안 된다는 논의가 확대됐다. 이를테면 산재의 측면에서, 사용자-근로자 관계가 아니지만 근로자와 유사하게 용역/위탁계약을 체결하고 일하는 사람들도 산재보험의 체계 속에서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논의를 거쳐 산재보험법에 특수형태근로자종사자에 대한 특례 규정이 신설된 때가 2007년이었다.

하지만 산재보험법과 노동조합은 별개 문제였다.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고 일하는) 특수고용형태근로자가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근로자가 아닌 자들이 결성한 단체라는 이유로 노조 설립 신고가 반려되기도 하고, 설립 신고가 받아들여진 후에도 사용자가 교섭 절차에 나서지 않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2018년 대법원은 학습지 교사 판결을 시작으로 방송연기자, 철도역 매점위탁운영자를 노동조합법상 근로자로 인정하는 판결을 잇따라 내놨다. 대리운전기사나 배달라이더로 구성된 노동조합이 설립 신고를 마치고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노동조합법상 근로자’임을 인정받는다고 하더라도 곧바로 노동조합으로서의 모든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다. 단체교섭을 요구 받는 상대방은 해당 노동조합에 대해 자신이 ‘사용자’가 아니라면서 교섭에 응하지 않는다. 사용자도 할 말은 있다. 근로계약이 아닌 용역/위탁계약을 체결했는데, 왜 난데없이 ‘사용자’의 법적 책임을 지라는 것이냐고 반문한다. 그러면 노동조합은 어떻게 합법적인 대응을 해야 하는가. 단체교섭응낙가처분과 단체교섭청구 소송을 제기하고, 사용자의 교섭 거부를 부당노동행위로 고소하거나 구제 신청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최종 결론이 나올때까지 5~6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 특수고용형태근로자 노동조합의 단체교섭권에 관한 제대로 된 선례가 없기 때문이다. 누가 승소할 것인지도 장담할 수 없다. 이쯤되면 한국에 제대로 된 노사관계 ‘제도’가 존재한다고 말하기 어렵지 않을까. 개정된 노동조합법에도 특수고용형태근로자에 대한 내용은 담기지 않았다. 특수고용형태근로자 노동조합을 다른 노동조합과 달리 취급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용을 만들기 난감했기 때문일까. 아무도 제대로 답하지 않는 ‘현실’만이 존재할 뿐이다.

113주년 노동절 하루 전날, 136일째 농성 중이던 엘지 트윈타워 청소노동자 노동조합과 사용자 측의 합의가 타결됐다. 원래 근로계약상 상대방이었던 기업은 물론, 원청에 해당하는 기업도 합의 당사자라고 전해졌다. 현재의 노동조합법상으로 또 판례상으로 원청이 단체교섭에 나서야 하는 명백한 근거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원청이 나서지 않으면 제대로 된 협상이 진행될 수 없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노동조합은 원청에게 교섭에 나서라고 요구할 수밖에 없다. 물론 하청 노동조합과 원청이 교섭을 어떻게,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역시 법률 규정도 선례도 없다. 이번 합의는 이런 혼란한 상황에서 건져 올린 귀한 결과물이거나 또는 시작점일 것이다.

노사관계의 변화가 빠르다. 하지만 제도가 현실의 꽁무니만 바라보며 너무 늦게 쫓아가서야 되겠는가. 정부가 나서서 특수고용형태근로자와 하청 노동조합의 단체교섭에 관한 공론의 장이라도 열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이데일리
추천 뉴스by Taboola

당신을 위한
맞춤 뉴스by Dable

소셜 댓글

많이 본 뉴스

바이오 투자 길라잡이 팜이데일리

왼쪽 오른쪽

스무살의 설레임 스냅타임

왼쪽 오른쪽

재미에 지식을 더하다 영상+

왼쪽 오른쪽

두근두근 핫포토

  • 홈런 신기록 달성
  • 꼼짝 마
  • 돌발 상황
  • 우승의 짜릿함
왼쪽 오른쪽

04517 서울시 중구 통일로 92 케이지타워 18F, 19F 이데일리

대표전화 02-3772-0114 I 이메일 webmaster@edaily.co.krI 사업자번호 107-81-75795

등록번호 서울 아 00090 I 등록일자 2005.10.25 I 회장 곽재선 I 발행·편집인 이익원

ⓒ 이데일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