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休]봄오는 제주 숲길에서 신령한 기운을 얻다

  • 등록 2013-02-26 오전 7:06:33

    수정 2013-02-26 오전 7:06:33

[제주=이데일리 이승형 선임기자]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타박타박 걷는다. 발바닥에 전해져 오는 부드러운 느낌이 좋다. 나무들의 숨소리에 호흡을 맞춘다. 내 안에 있는, 내가 아닌 모든 것을 버리기 위해 애써 본다.

이마에 서서히 땀이 맺힌다. 잠시 발걸음을 멈춰 눈을 감는다. 바람이 전하는 호명(呼名)에 귀를 기울인다. 나는 제주도의 숲길 한 가운데에 서 있다. 나의 오감(五感)은 이 숲과 함께 한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절물자연휴양림 입구에서 장생의 숲길로 이르는 길. 50년된 삼나무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다. 이승형 선임기자
깊고 그윽한 ‘장생의 숲길’

“잡념을 없애는 데엔 숲 만한 것이 없어. 특히 제주의 숲은 말이야, 기운을 북돋는 데 최고지. 그런데 그만큼 위험하기도 해. 중독성이 있거든. 너무 깊이 빠지지는 말게.”

주말이면 산행을 하는 선배의 조언을 들은 것이 화근이었다. 그 유혹을 떨치지 못해 무작정 떠났더니 눈 앞에는 어느덧 하늘을 향해 늠름하게 솟은 삼나무들이 펼쳐져 있다. 제주시 봉개동 산 78번지 절물자연휴양림.

입장료 1000원을 내고 조금 걸으니 ‘숲과 만나는 법’이라 적힌 표지판이 있다.

‘포옹하고, 악수하라. 냄새를 맡고, 소리를 들어라.’

이 곳에는 여러 개의 길이 있지만 나는 ‘장생(長生)의 숲길’을 택한다. 어른 걸음으로 대여섯시간은 족히 걸리는 왕복 22km의 길. 그래서 오후 3시 이후에는 문을 닫는다. 해가 떨어져 숲속에서 길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장생의 숲길에서 만난 기이하게 늘어진 나무. 이승형 선임기자
호위병들처럼 곧게 뻗어 있는 50년산 삼나무들 사이로 걷다 보니 깊고 고요한 숲이 나온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운 숲. 어디선가 마녀와 숨바꼭질하는 헨젤과 그레텔이 보일 것만 같은 숲이다. 기괴하게 생긴 나무들이 구부정한 뿌리와 가지들을 사방에 뻗고 있다.

그래서 예닐곱 걸음마다 나무가지에는 길의 방향을 알려주는 노란 리본들이 매달려 있다. 남매가 떨어뜨린 빵 조각들은 없다. 이 리본을 따라 걷다보면 제주 특산 식물인 ‘조릿대’ 자생지를 만난다. 벼과에 속하는 조릿대는 엽록소, 미네랄, 비타민, 아미노산, 폴리페놀 등이 풍부해 과거 제주에서 큰 가뭄과 역병이 돌면 사람들의 기력을 되찾아 준 구황식물이다. 조릿대는 사람과 많이 닮았다. 수명도 비슷해서 60~100년간 생존한다. 일생에 딱 한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뒤 죽는다.
장생의 숲길 나무의자. 잠시 앉아서 명상을 해보는 것도 좋다. 이승형 선임기자
장생의 숲길은 긴 만큼 곳곳에 쉬어 갈 나무 의자들이 있다. 잠시 앉아 명상에 잠긴다. 자기 최면을 건다.

‘나는 지금 고요하다. 나는 숲과 하나가 된다. 나는 살아 있다.’

신령함이 서려 있는 ‘사려니 숲길’

절물자연휴양림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또 하나의 숲이 있다. 사려니 숲. 사려니는 ‘살안이’ 혹은 ‘솔안이’라고 불리는데, ‘살’ 혹은 ‘솔’이라는 단어는 신령스러운 곳이라는 신역(神域)의 산명(山名)에 쓰인다. 신의 영역. 신의 숲.

이 곳에서 나를 처음 반기는 것은 까마귀 떼다. 독수리처럼 커다란 까마귀들이 신의 사령(使令)처럼 이 숲 곳곳을 지킨다.
사려니숲길에서 만난 까마귀. 길 위를 지키다 인기척이 들리자 날아올랐다. 이승형 선임기자
사려니 숲길은 레드카펫처럼 붉고 푹신한 황토길이다. 숲길 들머리에서 참꽃나무숲과 물찻오름 입구 등을 지나 사려니오름까지 이어지는 총 15km의 길이지만, 지금은 10km 가량만 개방돼 있다. 중간 중간 송이길도 있다. 송이는 화산 쇄설물의 일종으로, 작은 자갈처럼 생겼다. 90년대말 보존자원으로 분류돼 제주 밖으로의 반출이 금지돼 있다.

신의 숲길에서는 온대림에서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나무들이 있다. 졸참나무, 서어나무, 산딸나무, 때죽나무, 갈꽃나무, 초피나무, 예덕나무, 머귀나무, 누리장나무, 단풍나무….
사려니숲길의 나무들. 온대와 난대에서 서식하는 때죽나무, 서어나무, 산딸나무 등이 있다. 이승형 선임기자
“이 곳이 좋다고 해서 일부러 엄마랑 같이 왔어요. 그런데 여기 노루가 사나요?”

서울서 온 한 여학생이 묻는다. ‘네, 아마도 그럴 거에요.’ 보이지는 않지만 저 숲 속 어딘가엔 노루들이 있다. 한때 멸종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20여년전부터 보존돼 지금은 일정한 개체수를 유지하고 있다. 사려니 숲 부근 괴평이오름, 말찻오름, 마은이오름,거린오름 등에는 노루들이 즐겨 먹는 풀과 떨기나무가 많다.

이렇게 신의 동물들과 나무들 사이로 걷는다는 것. 숲과 의기투합한다는 것. 한걸음, 또 한걸음 옮기는 사이 몸과 마음의 균형은 조금씩 맞춰진다. 2월 어느 날 오후 사려니 숲길엔 신의 부름을 받은 봄의 정령들이 서서히 몰려오고 있었다. 겨울의 푸석한 공기는 온데 간데 없다.
비자림 사랑길을 연인들이 걷고 있다. 이승형 선임기자
둘이 걸으면 더 좋은 ‘비자림’

장생과 사려니 숲길이 트레킹에 좋은 길이라면, 비자림은 가볍게 산책하기 좋은 숲길이다. 천천히 걸어도 1시간을 넘지 않는다.

제주시 구좌읍 평대리에 자리한 비자림에는 ‘천년의 숲 사랑길’이란 이름의 숲길이 있다. 살짝 ‘손발이 오글거리는’ 이름이 붙여진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유명한 연리목이 있기 때문이다. 뿌리가 서로 다른 두 그루의 비자나무가 마치 샴쌍둥이처럼 한몸으로 붙어 있다.
비자림의 연리목. 두 나무가 한몸이 되어 엉켜있다. 부부와 연인들은 이곳에 와 영원한 사랑을 기원한다. 이승형 선임기자
그래서 부부나 연인들은 이 연리목을 찾아 영원한 사랑을 기원한다. 물론 이 기원의 의식에 기념 촬영을 빼놓을 수 없다. 혹여 홀로 이 길을 걷는다면 여기저기서 사진 찍어달라는 부탁을 감안해야 한다.

1.8km 사랑길은 맨발로도 걸을 수 있도록 조성돼 있다. 봄날에 손을 맞잡고 거대한 비자나무 사이로 송이와 황토를 느끼며 걷는 일은 기쁜 추억으로 각인될 것이다. 숲과 바람과 연인이 전해줬던 향기를 잊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여기서 또 유명한 것은 비자나무 우물이다. 오래 전 비자나무 지킴이인 산감(山監)들이 먹던 우물이다. 물이 귀한 제주지만 이 곳만은 항상 맑은 물이 고여 있다. 비자나무들의 뿌리가 물을 머금고 있다가 조금씩 흘려보내기 때문이다. 자연이 만든 정수기. 비자나무 정기가 온전히 물 속에 녹아있는 물. 그 한 모금에 내 안의 불순물이 사라진다.

약수에 취했든, 피톤치드(식물이 해충·세균 등에 저항하려 내뿜는 분비물) 혹은 테르펜(피톤치드와 유사한 항균성 숲속 공기 성분)에 빠졌든, 선배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숲의 늪으로 빠져드는 기분은 떨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제주의 숲길은 꼭 다시 돌아올 곳이다.
국내 비자나무 가운데 최고령목인 비자림 새천년비자나무. 나이는 825살. 키 14m, 가슴둘레 6m, 수관폭 15m의 위용을 자랑한다. 이승형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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