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 칼럼] 과거사 원혼 불러낸 청구권협정

  • 등록 2019-07-19 오전 6:00:00

    수정 2019-07-19 오전 6:00:00

한·일 양국이 1965년 국교정상화를 이루고도 여러 우여곡절이 따랐지만 그중에서도 1983년의 경제협력교섭은 외교 관례를 무시한 돌연변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전두환 정부가 일본의 ‘안보 무임승차론’을 거론하며 100억 달러 규모의 차관을 요청한 것부터가 일본 측으로는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결국 2년 동안 밀고 당기다가 나카소네 내각이 출범하면서 40억 달러로 낙찰되긴 했어도 지금껏 양국 사이에 가장 큰 경협 규모로 기록돼 있다. 한·일협정 당시의 8억 달러였던 청구권자금과도 대조를 이룬다.

궁금한 것은 당시 일본 정부가 경협을 최종 결정하면서 청구권협정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상대국 정부의 반발을 예상하면서도 경협을 요청한 우리 정부의 입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만약 청구권협정이 먼지 쌓인 서류뭉치 속에서 다시 고개를 쳐들고 일어날 것이라고 판단했다면 과연 경협이 성사됐을까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본의 교과서왜곡 파동으로 양국 간 국민 정서가 험악해졌던 난관을 헤치고 성사된 경협이었다.

지금에 와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문제가 거론되는 것이 바로 청구권협정의 효력과 관련돼 있다. “양 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것이 그 제2조의 내용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강제노역을 포함한 개인의 손해배상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피해자들의 주장도 무시하기는 어렵다.

결국 이러한 시각 차이로 인해 최종적인 결정이 사법부 판단에 맡겨졌을 것이다. 과거 노무현 정부 시절 민관 공동위원회가 “강제징용 배상 문제가 청구권협정에 반영됐다”고 결정했다는 사실 관계가 논란을 빚기도 하지만 대법원 판결로 이미 화살이 시위를 떠나 버린 상황이다. 그 과녁을 피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무역보복에 돌입했으며, 우리 정부는 피해를 줄이려고 대책을 마련하는 중이다. 사법부가 국가 간 조약을 벗어난 판결로 국경을 침해했다는 비난도 없지 않지만 거기에 매달려 있을 만큼 사정이 한가롭지 않은 게 당면 현실이다.

외교적 대화로 문제를 풀어간다고 하면서도 서로 변죽만 울리면서 상대방의 투항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 더욱 심각하다. 일본은 ‘제3국 중재위’에 올려 논의하자는 반면 우리 정부는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해 일본 조치의 부당성을 국제적으로 공론화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는 것이 일본 입장이라면 우리는 현재 벌어지는 사태의 부당성을 성토하고 있는 것이다. 간격이 좁혀질 리가 없다.

그렇다고 지도층 인사들이 동학혁명 때의 ‘죽창가’나 일제 침략기 시절의 국채보상운동을 들먹이며 민족감정을 과도하게 부추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심지어 ‘정한론’이라는 용어까지 등장하고 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경제보복특위’를 ‘경제침략특위’로 명칭을 바꾼 배경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관제 민족주의’가 되살아나고 있다는 경계론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역사를 망각한 일본의 처사가 얄밉기는 하지만 우리도 반일감정을 국내 정치에 이용하고 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설사 이번 사태가 해결된다 해도 또 다른 뇌관이 터지지 말라는 보장도 없는 상황이다. 과거사의 원혼이 어디서 되살아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렵게 이뤄졌다가 무위로 돌아간 위안부 협상이 하나의 사례다. 앞서 1983년의 양국 경협도 비슷하다. 우리 측 이범석 외무장관의 카운터파트로서 협상에 나섰던 아베 신타로 외상이 현 아베 신조 총리의 부친이라는 사실부터가 상징적이다. 우리 실무 책임자였던 김병연 아주국장이 청와대 안보실 김현종 2차장의 부친이라는 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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