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한 것은 당시 일본 정부가 경협을 최종 결정하면서 청구권협정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상대국 정부의 반발을 예상하면서도 경협을 요청한 우리 정부의 입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만약 청구권협정이 먼지 쌓인 서류뭉치 속에서 다시 고개를 쳐들고 일어날 것이라고 판단했다면 과연 경협이 성사됐을까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본의 교과서왜곡 파동으로 양국 간 국민 정서가 험악해졌던 난관을 헤치고 성사된 경협이었다.
지금에 와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문제가 거론되는 것이 바로 청구권협정의 효력과 관련돼 있다. “양 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것이 그 제2조의 내용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강제노역을 포함한 개인의 손해배상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피해자들의 주장도 무시하기는 어렵다.
외교적 대화로 문제를 풀어간다고 하면서도 서로 변죽만 울리면서 상대방의 투항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 더욱 심각하다. 일본은 ‘제3국 중재위’에 올려 논의하자는 반면 우리 정부는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해 일본 조치의 부당성을 국제적으로 공론화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는 것이 일본 입장이라면 우리는 현재 벌어지는 사태의 부당성을 성토하고 있는 것이다. 간격이 좁혀질 리가 없다.
설사 이번 사태가 해결된다 해도 또 다른 뇌관이 터지지 말라는 보장도 없는 상황이다. 과거사의 원혼이 어디서 되살아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렵게 이뤄졌다가 무위로 돌아간 위안부 협상이 하나의 사례다. 앞서 1983년의 양국 경협도 비슷하다. 우리 측 이범석 외무장관의 카운터파트로서 협상에 나섰던 아베 신타로 외상이 현 아베 신조 총리의 부친이라는 사실부터가 상징적이다. 우리 실무 책임자였던 김병연 아주국장이 청와대 안보실 김현종 2차장의 부친이라는 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