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기축통화는 달러여야만 하나"…트럼프가 자초한 달러 종말론

카니 영란은행 총재 달러 비판에 각국 중앙은행 잇딴 호응
자본유출 대비 달러 비축하다 투자 줄어 성장률 잠식
트럼프 노골적 달러 가치 하락 압박..달러 무기화 우려 확산
달러 대안으로 IMF 기능강화 및 디지털 화폐 부상
  • 등록 2019-09-16 오전 5:00:00

    수정 2019-09-16 오전 9:31:26

지난 23일(현지시간) 미국 와이오밍주 잭슨홀 미팅에 참석한 마크 카니(왼쪽) 영국 중앙은행 총재와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 의장이 얘기를 나누며 걷고 있다. [사진=AP]
[이데일리 안승찬 김정현 기자] 왜 반드시 달러여야만 하는가.’

이 대담한 질문을 던진 주인공은 마크 카니 영란은행(BOE) 총재다. 그는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미국 중서부 와이오밍주(州)의 작은 관광도시 젝슨홀에 모인 전 세계 중앙은행 총재들을 앞에서 선언하듯 말했다.

“세계 경제 질서가 바뀌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달러의 지위는 1971년 그 때와 하나도 달라진 게 없습니다.“

1971년은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금본위제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던 바로 그 때다. 미국은 35달러를 주면 언제든 금 1온스(약 28.3g)를 내주겠다는 약속을 던져버렸다. 그때부터 금으로 교환할 수 없는 ‘미국의 화폐’인 달러를 명실상부한 기축통화가 됐다. 그로부터 47년이 지난 지금까지 달러의 지위는 변하지 않았다.

문제는 미국 경제의 위상이 과거에 비해 크게 약화됐다는 점이다.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 세계 교역의 10%,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15%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미국의 달러는 비교 불가능한 지위를 누린다. 국제교역 결제의 50%. 전 세계 주식·채권 발행의 3분의2가 달러로 거래된다. 달러의 중요성은 47년 전과 비교해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달러 체제에 대한 도전은 카니 총재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카니 총재의 연설에 대해 “과거에 찾아볼 수 없던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올리 렌 유럽중앙은행(ECB) 이사는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놀라운 연설이었다”며 깊은 관심을 표했다.

[이데일리 김정훈 기자]
◇ “비상용 달러 쌓느라 성장률 저하”

영란은행의 분석에 따르면 달러 자본의 유입이 크게 증가했던 나라의 20% 정도에서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달러 중심의 자본유입이 늘어나면 일반적인 상황보다 금융위기 발생 확률이 3배 이상 높아진다는 게 영란은행의 분석이다. 신흥국 입장에서 유입됐던 달러가 급속도로 빠져나가는 상황을 늘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막대한 달러를 외환보유고로 비축하고 있는 이유다.

달러의 비축은 필연적으로 ‘과잉 저축’ 현상을 낳는다. 투자에 써야 할 돈을 앞으로의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쌓아두고 있다는 뜻이다. 과잉저축은 전 세계의 성장률을 잠식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카니 총재는 “달러 자산 축적은 글로벌 과잉저축을 야기한다. 이는 지속 가능한 국제자본흐름의 규모를 축소시켜 세계 잠재성장률을 하락시키는 요인”이라며 “각국의 경제 성장 가능성을 하방으로 왜곡시키거나 위기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신흥국에게 영향이 클 것”이라고 경고했다. 신흥국 입장에선 자본유입에 따른 성장률 진작 효과보다 자본유입의 변동성을 줄이기 위해 달러 자금을 비축의 악영향이 더 크다는 것이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역시 외환보유고 문제에 공감을 표시한다. 이 총재는 지난달 말 기자간담회에서 “한국이 (외환보유고를) 4000억달러가량 보유하고 있는 것처럼, 신흥국 입장에서는 달러 자금을 과도한 수준으로 보유해야 하는 부담감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외환보유고 문제를 고려하면)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국제통화체제의 개선은 당연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 트럼프가 촉발시킨 ‘달러 리스크’

숱한 불만에도 47년동안 견고히 유지된 달러 중심 통화질서에 대한 비판이 유독 최근 들어 더욱 강하게 불거져 나오는 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책임이 크다. 자국 우선주의를 내건 트럼프 정부가 자국 기업의 경쟁력 회복을 위해 달러화를 과도하게 흔들고 있다는 우려가 커진 탓이다.

미·중 무역분쟁이 격화되고 중국이 미국의 관세에 대해 자국의 통화가치를 낮추며 대응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노골적인 달러가치 하락을 요구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트위터에 “달러가 너무 강하다”면서 “연방준비제도(Fed)는 짧은 기간에 금리를 최소 1%포인트 내려야 한다”고 썼다.

심지어 미국이 직접 외환시장에 개입할 수 있다는 불안감도 퍼지고 있다. 스티븐 므누신 미국 재무장관은 지난달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당장 미국 당국이 달러 시장에 개입할 생각이 없다”면서도 “앞으로 상황이 바뀔 수 있다”고 여지를 남겼다.

이는 달러에 의존해야 하는 전 세계 국가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에스와르 프라사드 코넬대 교수는 “달러의 패권은 미국 시스템의 지속성과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서서히 약화시키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이 다른 국가들을 통제하는 무기로 달러를 휘두를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커지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기축통화가 되기 위해서는 자국통화가 자기 나라 밖으로 광범위하게 퍼져야 하고, 그 때문에 기축통화국인 미국에게 경상수지 적자는 숙명과 같은 것”이라며 “기축통화인 달러를 가진 미국이 무역수지 개선을 위해 보호무역주의를 들고 나오는 건 반칙”이라고 말했다.

◇ IMF 확충과 디지털 화폐의 부상

달러가 문제라고 해서 다시 영국의 파운드나 중국의 위안화가 달러를 대신한다는 건 해답이 아니다. 특정 국가에 의존하는 시스템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기능을 강화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온 배경이다. IMF를 중심으로 자본이탈에 대응하는 공동의 글로벌 펀드를 만들면 각국의 달러 외환보유고를 쌓을 유인이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카니 총재는 “전 세계는 협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면서 “앞으로 10년동안 신흥국이 위기 대응을 위해 보유해야 할 준비금 확충 규모는 현재보다 두 배가량인 9조달러(약 1경원)에 달하겠지만, IMF의 재원을 늘리면 3조달러(약 3539조원)면 충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장기적으로는 디지털 화폐가 새로운 기축통화로 떠오를 것이란 주장도 나온다. 이른바 ‘합성패권통화(Synthetic Hegemonic Currecy)’을 만들자는 구상이다. 각국 중앙은행이 디지털 화폐를 만들고 이 네트워크를 연결하면 국제통화로 쓸 수 있는 디지털 화폐 도입이 달러를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카니 총재는 “이제 기술이 발전했다”면서 “합성패권통화의 바스켓을 구성하는 통화들의 위상도 함께 강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디지털 화폐에 대해 이견도 많다. 이주열 총재 역시 부정적인 입장이다. 이 총재는 “(카니 총재가 제시한)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의 경우 현재로서는 구체적으로 실행 가능하다는 생각이 안 든다”며 “다만, 이 문제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여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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