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정조의 화성행차, 사도세자 향한 효심 뒤에 숨긴 속내는?

정조의 수원화성행차를 따라가다.
재위 20주년·혜경궁 홍씨 회갑 맞아 수원行
도착 후 가장 먼저 사도세자 묘 '융릉' 찾아
융릉 이전 위해 이주민 위한 수원화성 세워
'개혁도시' 꿈꾼 정조의 발자취 따라가볼까
수원천 일대서 열린 '수원 화성 미디어아트쇼"
성곽 아...
  • 등록 2022-10-07 오전 6:00:00

    수정 2022-10-07 오전 8:38:20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호호부귀 인인화락(戶戶이ㄷ 人人和樂). ‘집집마다 부귀하고 사람마다 즐겁다’는 뜻이다. 조선의 제22대 국왕인 정조가 꿈꾼 이상향이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꿈을 펼치기 위한 개혁도시를 만들었는데, 지금의 경기도 수원의 화성이다. 하지만 그는 화성 완공 5년 후 47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미처 그의 꿈도, 개혁도 완성하지 못한 것이다. 살아생전 그토록 꿈꾸었던 이상향을 보지 못한 정조. 화성 성벽 곳곳에 아로새겨졌던 정조의 꿈은 성 완공 후 226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비로소 성벽 곳곳에 다시 그려졌다.

수원화성의 장안문
◇길이는 1km, 6천명 동원된 퍼레이드


정조의 수원 화성 행차를 따라가는 길. 시작은 1795년. 정조 재위 20주년이자, 그의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을 맞는 해였다. 그야말로 경사 중의 경사였던 셈. 정조는 이를 축하하기 위해 대규모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바로 수원 화성 행차다. 8일간 왕복 112㎞를, 6000여명이 움직이는 대규모 행렬이었다. 실제 행렬의 길이만 1㎞에 달했다. 당시로는 상상하기 힘든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그 모습을 가늠해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 있는데, 바로 ‘능행반차도’다. 길이만 16m에 달하는 대형 그림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1779명, 말은 779필로, 실제로는 이보다 약 3배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화성능행도병풍(사진=국립고궁박물관).
이 엄청난 퍼레이드에 얼마의 비용이 들었을까. 기록에 의하면 약 10만 냥의 돈이 쓰였다고 한다. 쌀로 치자면 2만 섬 정도다. 쌀 한섬이 144㎏, 2만섬이면 288만㎏이 된다. 20㎏인 쌀가마니로 14만4000가마니다. 이를 지금의 돈으로 환산하면 어떨까. 쌀 20㎏을 5만원으로 계산해도 14만4000가마니면 72억원에 달한다. 정조는 이 행차를 위해 너무도 큰 지출을 했던 것이다.



행차의 준비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규모가 큰 만큼, 여러가지 문제도 많았다. 첫번째는 혜경궁의 건강이었다. 요즘이야 환갑은 제2의 인생 시작이라고도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환갑이면 무척 많은 나이였다. 그렇다 보니 가마를 타고 먼 길을 이동하는 것은 혜경궁에게 무리가 될 수 있었다. 편하게 눕지도 못하고 한 자세로 앉아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행차 열흘 전부터 가마타기 연습을 했을 정도였다.

수원화성 성곽길 야경
◇한양에서 수원까지, 조선의 새길이 열리다


수원까지 가는 길도 쉽게 정할 수 없었다. 과천을 통과하는 게 가장 빠른 길인데 남태령 고개를 넘어야 했다. 혜경궁이 가마를 타고 그 오르막을 넘기에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을 터. 이에 정조는 시흥~안양~의왕을 지나는 경로인 ‘시흥대로’ 코스를 선택했다. 시흥이라는 명칭도 이때 처음 생겨났다. 시흥은 한자로 ‘처음 시(始)’와 ‘일어날 흥(興)’을 쓰는데, ‘새로운 문화가 처음 일어났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시흥은 경기도 시흥시가 아닌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이다.

수원천에 미디어아트로 재현된 배다리
두번째 문제는 한강이었다. 서울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한강은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도심의 넓은 강 중 하나. 조선시대에도 한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배를 이용해야 했다. 배를 타자니 행차의 모습이 망가지고, 다리를 만들자니 엄청난 토목공사가 되어 현실적으로 어려웠으니 화성 행차 준비의 큰 장애물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한 이가 바로 정약용이었다. 그는 행렬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예산까지 아낄 방법으로 다리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배다리’다. 정약용은 총 36척의 배를 횡목으로 연결해 튼튼한 배다리를 만들었다. 길이만 무려 1km가 넘는 행렬이 한강을 건너는 장관은 그래서 가능해졌다.

장조로 추존된 사도세자의 묘인 융릉의 모습(사진=문화재청)
◇정조가 수원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어디…


수많은 난관을 헤치며 화성에 도착한 정조가 이곳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어디였을까. 바로 그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였다. 사도세자는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에 희생돼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목숨을 잃었다.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는 왕이 된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원래 있던 자리에서 조선 제일 명당인 융릉(경기도 화성)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사도세자의 무덤에는 ‘능’이라고 이름 붙일 수가 없었다. 대신 ‘수은묘’라고 했다. 사도세자가 왕이 되지 못하고 죄인의 취급을 받아 죽었기 때문이다. 정조가 즉위하고 나서야 영우원으로 격상시켰다. 이후 ‘천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명당’이라는 지금의 위치로 이장하면서 현륭원으로 개칭했고, 이후에 장조로 추존되면서 융릉으로 바뀌었다.

산책하기 좋은 융건릉의 소나무 숲
융릉은 정자각과 능침이 이루는 축이 일직선이 아니라 약간 비켜 조성했다. 이유가 있었다. 효심 깊은 정조가 아버지의 능을 조성할 때 “뒤주에 갇혀 돌아가실 때도 답답하셨을 것인데 정자각 바로 뒤에 능침을 조성한다면 얼마나 더 답답하시겠느냐”라고 말한 것을 따랐다. 융릉으로 이전하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이 땅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모여 살고 있었다. 정조는 강제 이주 대신 새로운 장소에 성을 쌓고 집을 지을 돈과 이사비용까지 챙겨 이 사람들을 살게 했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수원 화성이다. 그리고 정조는 이곳에 터를 잡고 자신의 정치적 이상향을 새로 그리고자 했다.

제사를 지내는 건물인 융릉의 정자각
◇정조가 꿈꾼 유토피아, 다시 되새겨지다


정조는 ‘만천명월’(萬川明月)을 정치 철학으로 삼았다. 달빛이 모든 냇물을 가리지 않고, 다 비추듯 모든 사람에게 마음을 베풀겠다는 뜻이다. 그는 노비제도를 없애고, 신분 해방을 통한 평등사회를 구현하고자 했다. 이런 그의 정치 철학은 혁명에 가까웠다. 화성은 강력한 개혁 정치를 펼치고자 했던 정조의 꿈을 주도할 도시였다.

문화재청의 세계유산 미디어아트 사업 중 하나로 이달 23일까지 수원화성 화홍문에서 열리고 있는 수원화성 미디어아트쇼
미완의 역사로 남은 화성. 그 성벽에 정조의 꿈이 다시 새겨졌다. 화홍문과 남수문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수원천 일대에 ‘2022 수원 화성 미디어아트 쇼’(사업주관 수원문화재단, 총괄감독 이창근)가 열리고 있어서다. 밤마다 두 수문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수원천 일대가 화려한 빛깔의 옷을 수차례 갈아입으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를 띠게 한다. 성곽의 아름다움과 하천의 자연스러움에 기술의 화려함을 더한 하나의 거대한 ‘예술’ 그 자체다.



수원천 물줄기와 제방의 돌덩이, 양 천변을 연결하는 다리까지. 모든 자연물과 조형물들이 미디어아트 작품에 참여했다. 여기에 버드나무들은 기꺼이 빛을 품고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 커튼 역할을 하면서 가을밤 산책에 나선 이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준다.

최중필 수원특례시청 관광과장은 “수원화성 미디어아트 쇼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이 첨단기술과 만나 관람객과 색다르게 소통하는 축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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