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빌려준 돈 달라 하니 따귀를 때리기 시작했다

반포 태영건설 사업장, 선순위 채권자 선택에 쏟아진 비난
시장 합리성은 어디로...미성숙한 韓 자본주의의 일면
노른자 땅 강남서도 분양 실패 속출
길어지는 부동산 침체, 장담할 수 없는 시장
‘강남 사업성’에 대한 무지성적 환상 내려놔야
  • 등록 2024-06-05 오전 5:30:00

    수정 2024-06-05 오전 6:39:28

[이데일리 마켓in 지영의 기자] 아무개씨는 수년 전 강남에 건설 사업을 하겠다는 업계 동료들에게 노후자금을 떼어 빌려줬다. 같이 돈을 빌려주는 이들보다 낮은 금리를 받는 대신 문제가 생기면 우선적으로 돌려받기로 시장 평균 수준의 계약도 걸었다. 그러다 최근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강남에 복합 주거시설을 짓는다던 동료들의 회사가 부도위기에 놓였다는 것이다.

저금리와 부동산 호황기에 사방에서 거액의 돈을 빌려 마구잡이로 사업장을 늘렸던 것이 원인이었다. 리스크와 시장 동향을 고려하지 않고 늘린 과도한 빚부담에 끝내 걸려 넘어진 것이다. 다행히 대부분의 자금을 최우선적으로 돌려받기로 했던 아무개씨는 약속을 이행하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돈을 빌려간 동료들은 조금만 버티면 시장 회복될 텐데 왜 지금 자금을 뺀다고 하냐며 비난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변제 우선순위를 양보하라는 요구도 꺼내들었다.

아무개씨는 거절했다. 부동산 시장 침체가 길어지면 노후자금을 날릴 것이란 걱정에서다. 다툼이 길어지자 지켜보던 제 3자들도 한 대씩 말로 따귀를 때리기 시작했다. 아무개 저거 아주 나쁜 놈이래. 쟤만 양보하면 다 잘 되는데 양보를 안 한다네.

태영건설 반포 사업장에 빌려준 대출금을 회수하겠다고 했다가 거세게 얻어맞고 있는 과학기술인공제회의 지금 처지가 딱 이 모양새다. 불확실한 시장에서는 그 무엇도 장담할 수 없음에도 선순위 채권자만 양보하고 협의하면 모든 게 잘 풀릴 것이란 기묘하고 불안한 낙관주의를 기반으로 한 비난이 쏟아진다. 비난의 요지를 잡아보자면 지금 선순위 채권자가 자금을 회수하면 손실을 볼 이들이 많으니 권리 행사를 유보하고, 양보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비난에 쓰이는 주요 주장들은 사실관계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서울 전경 (사진=방인권 기자)


태영건설의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조차 반포 사업장이 워크아웃 추진에 미치는 영향이 거의 없다고 선을 긋고 있건만 비난은 계속되고 있다. 워크아웃 자금이라 중후순위 채권자(KB증권 등)가 투입을 검토한 공사자금이 최우선권을 가지기에 선순위가 양보하라는 주장도 법적 근거가 없다. 태영건설의 직접적인 워크아웃에 쓰이는 자금이 아닌, 개별 사업장 관계자들의 이해관계 해소에 쓰일 자금이어서다. 그저 선순위가 지금 나가면 손실이 확정되니 손실을 보전해보고 싶은 중후순위 채권자의 이해관계가 크다. 사업성이 보장돼 있는 사업장을 이기주의로 멈춰세운다는 일각의 주장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과연 과학기술 연구자들의 노후자금을 회수해 리스크를 막겠다는 과기공의 판단이 부당할 만큼 그 사업장은 ‘알짜’가 맞을까. 선순위 채권자인 과기공이 반포 사업장에서 돈을 빼면 안 된다고 비판하는 논리의 근거는 대체로 ‘강남 사업장’에 대한 과거의 믿음에 기반한다. 10여년 넘게 이어진 저금리 기조 동안 강남 부동산은 ‘불패’였다는 것이다. 금리가 곧 내릴텐데 감히 강남의 사업성, 노른자 땅의 부동산을 믿지 못하고 투자금을 지금 회수해서 피해를 키우냐는 이야기다.

그런데 강남권에 공급되는 부동산들 중에서는 분양에 실패해 공매로 떨어지는 사례가 나오기 시작했다. 강남구 개포동의 ‘대치 푸르지오 발라드’ 78가구가 극심한 미분양에 시달리다 일부 분양 물량 마저 취소된 뒤 공매로 떨어진 사례가 대표적이다. 낮은 분양률에 신음하고, 대주단 근심이 날로 깊어지고 있는 반포 소재 또다른 A사업장 사례도 이미 시장에 소문이 파다하다.

더군다나 서울, 특히 강남 부동산 가격은 저금리를 타고 올랐다. 시장을 짓누르고 있는 금리는 곧 내리는게 확실할까. 고금리 기조가 이어진 최근 수년 사이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금융사들과 이코노미스트들의 금리 전망 대다수가 틀렸다.

이밖에도 그 누구도 확답하기 어려운 의문이 꼬리를 문다. 고물가 시대에 무거운 공사비로 지어지는 부동산 분양 물량들은 과연 시장에서 기대만큼 비싸게 팔릴 수 있을까. 정말로 사업성이 보장된다면 왜 그 사업장은 잡음 없는 리파이낸싱(자금재조달)으로 선순위 대주 교체가 안 되나.

이번 사안에 깔려있는 가장 큰 문제는 과기공을 비난하는 대다수의 논리들이 자본시장의 근본적인 원칙을 훼손하고 있다는 점이다. 투자 사업에 대한 향후 사업성 판단과 자금 회수는 선순위 채권자의 지극히 당연한 권리다. 권리 행사를 마치 부당하고 부도덕한 행위처럼 매도해서는 자본시장 질서와 신뢰가 유지될 수 없다. 자본시장은 신뢰가 가장 중요하고, 신뢰 유지를 위해선 원칙이 지켜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비난과 여론전 때문에 계약과 다르게 리스크를 끌어안는 주체가 바뀌는 나쁜 선례를 남긴다면 이야말로 진정한 도덕적 해이의 극치다.

국내시장 관계자간에서 벌어진 다툼이니 ‘네가 좀 양보해서 일단 살려보자’는 온정주의를 거세게 밀어붙이는 것이겠지만, 반포 선순위 대주단에 글로벌 투자사라도 들어와 있었으면 이야말로 한국 자본시장의 망신이었을 것이다. 외신에서 ‘한국 자본시장에선 계약이 의미가 없냐’고 물으면 뭐라 답할텐가.

반포 외에도 국내에 기한이익상실(EOD)이 발생한 사업장은 수두룩하다. 협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특정 대주를 비난하고 막연한 희망, 선의에 기대 일방적 양보를 강요하는 미숙한 방식이 엿보인다. 손실 문제는 민감해서 갈등이 필연적이겠지만 책임져야할 사람이 그 책임을 올곧이 감수함으로써 합리적이고 성숙하게 구조조정을 마무리하는 경험을 쌓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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