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로, 붓으로 '평생 뮤즈' 아내에 바친 사랑

김종영미술관 특별기획전 '조각가의 아내'
이효영 여사 모델로 한 조각·회화
미공개 드로잉·스케치 등 37점 공개
내조자 넘어 '영감' 불어넣어
아내 모습서 작품변화 엿보여
  • 등록 2016-08-13 오전 6:16:10

    수정 2016-08-13 오전 8:34:39

김종영의 ‘부인’. 1949년 종이에 파스텔로 그린 작품이다(사진=김종영미술관).


[이데일리 김용운 기자] “내 남편이던 사람이지만 이제 깨달았어요. 보통보다는 조금 다른 분이라고. 보통 사람과는 달라요. 김종영 씨가.”

일제가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습하면서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1년 12월 7일. 경상북도 의성이 고향이던 21세 처녀 이효영은 혼례를 올린다. 남편될 사람은 경남 창원서 조선의 명문가 김해 김씨 삼현파의 후손으로 태어나 일본 도쿄미술학교에 유학을 다녀온 27세의 청년 김종영이었다. 그 시절 대부분 결혼이 그렇듯 연애란 것도 없이 집안 어르신의 중매에 평생가약을 맺었다. 막 스무 살을 넘긴 처녀 이효영은 이후 한평생 예술가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살림을 꾸리고 자식을 키웠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이 특별기획전으로 선보이는 ‘조각가의 아내’ 전은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이자 근현대미술의 거장 우성 김종영(1915~1982)이 아내 이효영(95) 여사를 모델로 제작한 조각품과 회화, 드로잉, 스케치 등 37점의 작품을 한자리서 감상할 수 있는 전시다. 여기에 김종영이 이 여사에게 보낸 자필 편지와 이 여사의 인터뷰 영상 등을 통해 생전 김종영이 아내에 대해 품은 마음을 보다 각별하게 느낄 수 있도록 꾸몄다.

◇‘평생의 뮤즈’에게 바친 아내사랑

김종영의 ‘드로잉’. 1970년대 말 종이에 펜과 수채로 그렸다(사진=김종영미술관).
김종영은 서울대에서 미대 교수를 역임한 것 외에는 다른 외부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오롯이 학교와 집을 오가며 평생 자신의 작품에만 매진했다. 당시 서울대 교수직의 월급은 말 그대로 박봉. 덕분에 이 여사는 7남매를 키우고 집안을 챙기는 것 외에 할 일이 한 가지 더 있었다. 바로 남편 작품의 모델이 돼 주는 일이다. 당시를 이 여사는 이렇게 회상했다.

“모델을 하고 있으면 전신이 막 뒤틀려요. 그러면 남편은 ‘가만히 있어라’라고 하거든요. ‘조금만’ ‘옳지’ 그러데요. 마치 아기 다루듯이. 우리 큰아들을 가졌을 때도 전신이 아파죽겠는데 모델 서라고. ‘내 예쁘구러 그릴게’ 그러면서 그리셨지요.”

이번 전시가 의미 있는 이유는 지난해 ‘김종영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서도 공개하지 않았던 김종영의 초기 드로잉과 스케치를 내놨다는 것이다. 이번 전시를 보면서 김종영의 작품세계가 어떤 과정을 거쳐 훗날 어떻게 단순화하고 추상화했는지를 알 수 있게 했다.

김종영은 결혼 후 1940년대부터 1950년대까진 아내를 그릴 때 볼과 입술을 강조하는 등 구체적인 묘사를 주로 했다. 파스텔과 유화로 채색화를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기 드로잉에는 얼굴의 형태만 잡았을 뿐 세부적인 묘사는 생략했다. 생전에 추상조각 외에 드로잉·스케치 등을 거의 공개하지 않았기에 전시를 둘러보면 김종영 조각의 기원과 발전 과정을 이 여사라는 모델이 변화하는 모습과 함께 비교할 수 있다.

1970년대 후반 경남 창원 생가 마당에 나란히 앉은 김종영·이효영 부부(사진=김종영미술관).
미술작품 외에 눈에 띄는 것은 김종영이 이 여사에게 보낸 자필 편지들이다. 편지들은 미의 근원을 추구하는 예술가 이전에 아내에 대한 사랑이 깊었던 남편이자 건실한 가장이었던 김종영의 내면을 말해준다. 한국전쟁 이후 노모를 모시고 가난을 이겨내야만 하는 상황에서 김종영은 “나는 결코 절망하지는 않으오. 우리의 사랑과 건강이 있는 한 이러한 괴로움은 얼마든지 해결해 나갈 자신이 있소이다”라고 아내를 다독이는 편지를 썼다. “무심한 지아비에 대한 원망이 많은 형편에 이르렀소. 다하지 못한 사죄와 임자 억울한 하소연은 대면으로서 주고받기로 하고 우선 이것으로 붓을 놓겠소”라고도 썼다. 마치 옛 선비들의 부부애를 보는 듯해 신기한 생각까지 들게 한다.

◇올곧게 교육자·예술가의 길만…선비같은 조각가

1948년 서울대 교수로 임용된 이후 정년퇴직할 때까지 김종영은 교육자와 예술가의 외길을 걸었다. 대내외적으로 이름을 알린 건 1953년. 영국 런던 테이트갤러리에서 열린 ‘무명 정치수를 위한 기념비’ 국제공모에 ‘나상’을 출품해 52개국 3246명의 작가 중 140명의 입상자 명단에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당시 전쟁에 황폐해진 한국 예술계에 큰 자극을 줬다.

김종영의 ‘부인’. 1955년에 캔버스에 유채로 그렸다(사진=김종영미술관).
부와 명예를 위해 작품을 이용하지 않은 작가로도 유명하다. 특히 돈이 된다는 공공조각에는 주변의 청탁에도 불구하고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그가 남긴 공공조각은 포항의 ‘포항전몰학도충혼탑’과 서울 탑골공원의 ‘3·1독립선언기념탑’ 두 점뿐이다. 대작도 없이 작은 소품 위주로 작업을 하며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올곧이 지켜나갔다.

현재 남아 있는 김종영의 조각품은 200여점. 이외에도 서예 800여점과 드로잉 3000여점이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해 리움미술관 등이 몇몇 조각품을 가지고 있으나 대다수는 김종영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김종영미술관은 유족인 7남매가 힘을 모아 세운 사립미술관이다.

전시를 준비한 오보영 김종영미술관 학예사는 “조각가의 아내는 기꺼이 남편의 모델로 남편이 온전히 예술가로서의 삶을 끌어갈 수 있도록 기둥이 돼주었다”며 “김종영은 유난스럽지 않고 시대를 초월하는 마음과 시선으로 조각을 만들었고 그렇게 아내를 대했다”고 말했다. 전시는 11월 16일까지다.

김종영 ‘부인상’. 1960년대 초반 나무로 조각한 아내의 형상(사진=김종영미술관).
김종영 ‘부인상’. 1950년대 초반 대리석으로 빚은 아내의 얼굴이다(사진=김용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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