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그룹의 지배구조 정점에 있는 호텔롯데의 회사채 신용등급은 ‘AA’다. 전체 신용등급 중 셋째로 높다. 사실상 돈 떼일 위험이 없는 이런 우량 채권도 가격을 대폭 낮춰야 겨우 거래가 이뤄지는 셈이다. 채권평가사 관계자는 “최근 5년 새 회사채 금리 상승 속도가 이렇게 빠른 적이 없었다”며 “채권을 사려는 매수자가 거의 없고 어떻게든 털고 나가려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국내 자본시장에 ‘4월 위기설’이 고개를 들고 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기업이 직접 자금을 조달하는 창구인 회사채 시장이 꽁꽁 얼어붙으며 산업계 전반의 ‘돈맥경화’ 현상을 빚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신용 경색이 심해지면 대기업조차도 빚 상환에 어려움을 겪는 등 유동성 위기가 확산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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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다음 달 만기가 도래하는 회사채는 이달보다 57% 증가한 6조5495억원에 이른다. 협회가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1991년 이후 4월 기준으로 역대 최대다. 올해 전체 회사채 만기 도래액(50조8713억원)의 약 13%가 4월에 몰려 있다.
주요 기업 중에는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은 대한항공(003490)이 다음달 중 2400억원 규모 회사채를 갚아야 한다. 만기 도래액이 전체 기업 중 둘째로 많다. 주류 시장 침체를 겪는 하이트진로(000080)도 회사채 1430억원어치의 만기를 맞는다. SK머티리얼즈(036490), 풍산(103140) 등도 만기액이 1000억원을 넘는다. 상당수 회사가 새로운 채권을 발행해 기존 회사채를 갚아야 하는 상황이다.
김민정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정부 정책에 대한 기대감에도 불구하고 4월에 회사채 만기 물량이 워낙 몰려있는 데다 향후 기업 실적이 나빠져 신용등급이 하락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보니 투자 심리가 회복되지 않고 있다”면서 “기업의 회사채 발행 금리가 상승하는 것을 넘어서 현 시장 상황에서 자금 조달을 할 수 있는지 유동성 확보가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4월 고비 넘겨도 또 고비…신용등급 추락 ‘경고등’
정부 대책이 기업의 유동성 문제를 해소하고 시장 불안을 잠재우기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일례로 4월에 만기가 도래하는 회사채의 20%가 넘는 1조4555억원가량이 신용등급 ‘A+’ 이하~‘BBB-’ 이상인 중간 등급에 속한다.
반면 정부가 다음달 초부터 20조원 규모로 조성할 예정인 채권시장 안정 펀드의 경우 이보다 높은 신용등급 ‘AA-’ 이상의 우량 기업을 지원 대상으로 잠정 설정하고 있다. ‘AA’ 등급 아래 기업을 주로 대상으로 하는 회사채 신속 인수 제도 등은 아직 구체적인 지원의 밑그림이 나오지 않은 상태다.
4월 고비를 넘긴다 해도 우려는 여전하다. 당장 오는 9월 회사채 만기 도래액이 올해 중 둘째로 많은 6조4753억원에 달한다. 코로나19 확산세가 상반기(1~6월) 중 수그러들어 시장이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지 않는다면 지금 같은 자본시장의 위기 심리가 상시화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최근 상당수 기업의 신용등급 전망에 빨간불이 켜지며 이 같은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다.
실제로 국내 3개 신용평가 회사가 올해 들어 현재까지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한 회사는 LG디스플레이(034220), 두산중공업(034020), 현대로템(064350), 이마트(139480) 등 21개사(이하 중복 포함)에 이른다. 반면 신용등급이 올라간 기업은 한 곳도 없다. 직전 지난해 4분기(10~12월)에는 신용등급 상향 기업이 6개나 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기업의 기초 체력이 크게 약해진 것이다.
증권사의 한 채권 담당 실무자는 “정부 대책 발표 후 시장이 약간 개선되는 듯하다가 다시 안 좋아지는 분위기”라며 “시장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