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리뷰]그림인가 '하얀 판때기'인가…웃음 속 예술의 의미

2년 만에 돌아온 연극 '아트'
야스미나 레자 희곡 무대로
우정 이면의 허영과 오만 폭로
맛깔나는 대사, 배우들 열연 눈길
  • 등록 2020-04-02 오전 5:35:00

    수정 2020-04-02 오전 5:35:00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25년 동안 알고 지내온 친한 친구가 그림을 무려 3억을 주고 샀다. 가로 150㎝, 세로 120㎝에 달하는 커다란 그림이다. 그런데 화폭에 담긴 것은 오직 하얀색뿐. 설상가상으로 친구라는 녀석은 “여러 각도에서 잘 보면 다른 색깔의 선이 보인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친구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 모를 일이다. “이건 ‘하얀 판때기’잖아.”

연극 ‘아트’의 한 장면(사진=더블케이필름앤씨어터).


서울 강남구 백암아트홀에서 공연 중인 연극 ‘아트’는 그림인지 ‘하얀 판때기’인지 알 수 없는 한 작품을 놓고 25년지기인 세 친구가 겪는 갈등을 그린 작품이다. 연극 ‘대학살의 신’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프랑스 극작가 야스미나 레자의 작품으로 2002년 국내 초연 이후 꾸준히 무대에 올라 사랑을 받아온 연극이다. 2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오른 이번 공연은 이건명, 엄기준, 강필석(이상 세르주 역), 박건형, 김재범, 박은석(이상 마크 역), 조재윤, 이천희, 박정복(이상 이반 역) 등이 출연하고 있다.

작품은 예술에 관심이 많은 피부과 의사 세르주와 고전을 좋아하는 항공 엔지니어 마크의 갈등에서 비롯된다. 자신이 특별하다고 믿는 마크는 3억이나 주고 그림을 산 세르주의 현대미술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반대로 세르주는 예술에 대한 자신의 심미안을 깔보듯하는 마크에 대한 불만으로 속이 끓는다. 이들의 갈등은 우유부단한 성격의 문구 도매업자 이반이 끼어들면서 예측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아트’는 그림 작품을 둘러싼 세 남성의 갈등으로 우정 뒤에 감춰진 허영과 오만을 드러내 보인다. ‘대학살의 신’처럼 세 배우가 주고 받는 맛깔나는 대사의 재미가 크다. 세르주가 그림을 가리키며 “여백미가 있다”고 말하자 이반이 “큰 여백이 있네”라고 답한다. 극 곳곳에 담긴 재치 있는 말들이 시종일관 웃음을 자아낸다. 극 중반을 넘어서면 세 인물이 한 자리에 모여 쉼 없는 말싸움을 벌인다. 유치해 보이는 이들의 싸움은 배우들의 생생한 연기가 더해져 객석을 웃음바다로 만든다.

물론 ‘아트’에 웃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고전주의적인 마크와 모더니즘을 따르는 세르주의 갈등은 예술을 바라보는 다양한 해석의 충돌을 보여줘 흥미롭다. 예술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빚어지는 인물들의 갈등을 지켜보다 보면 어렵고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예술이 어쩌면 대단한 것이 아닌, 각자만의 해석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파국으로 치닫는 세 친구의 소동은 우여곡절 속에서 일단락된다. “이렇게 우리 사이가 끝나는 것이냐”는 한탄 속에서 세 사람은 싸움을 멈추고 자신들의 모습을 바라본다. 이성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자 세 사람은 서로가 친구라는 사실을 다시 깨닫는다. 세상은 꼭 합리적으로만 돌아가지 않는다. 이를 받아들일 때 세상은 조금 더 따뜻해질 것이라는 메시지가 ‘아트’에 있다. 공연은 오는 5월 17일까지.
연극 ‘아트’의 한 장면(사진=더블케이필름앤씨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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