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대 단색화가의 캔버스는 '텅 비어'

이동엽 개인전
흰색 질감 살려 심오함·숭고미 표현
'사이-명상' '순환' 등 15점 연대기별 전시
학고재갤러리서 8월23일까지
  • 등록 2015-07-31 오전 6:20:00

    수정 2015-07-31 오전 6:20:00

이동엽의 ‘사이 3’. 2000년에 시작해 2008년에 완성했다. 평생 ‘흰색’을 화두로 삼아 작품에 매진한 이 화백은 단색화 1세대 작가로 최근 뒤늦게 조명받고 있다(사진=학고재갤러리).


[이데일리 김용운 기자] “조선의 백자를 연상시킨다.” 일본의 한 유명 화랑의 대표가 대학을 막 졸업한 청년 작가의 작품을 보더니 감탄을 했다.

1972년 한국미술협회가 파리비엔날레를 비롯해 각종 국제미술전에 나갈 작가를 선발하기 위해 ‘제1회 앙데팡당’ 전을 열었다. 참가비만 내면 전시가 가능했기에 젊은 작가가 많이 참여했다. 작품을 둘러보기 위해 당시로선 아시아미술의 중심지였던 일본에서 참가한 야마모토 다카시 도쿄화랑 대표는 회화와 조형, 설치미술 등 여러 장르의 작품 가운데 얼핏 보면 밋밋하기 그지없는 작품에 찬사를 보냈다.

스물여섯 살의 이동엽(1946~2013)이 내놓은 ‘상황’ 연작이었다. 심사위원을 맡은 이우환은 ‘상황’ 연작을 1등작으로 뽑았다. 100호짜리 캔버스 세 점으로 이뤄진 ‘상황’은 컵에 담긴 얼음이 녹는 과정을 컵과 얼음의 테두리만 갈색톤으로 그린 단순한 작품이었다.

2년 뒤인 1974년 이동엽은 프랑스에서 열린 제6회 카뉴국제회화제에 출품작가로 선정돼 ‘3인 공동 국가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이듬해 박서보·권영우·서승원·허황과 함께 도쿄화랑에서 열린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개의 흰색’ 전에 공식 초청을 받는다. ‘단색화’의 등장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이동엽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1977년 도쿄의 무라마쓰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며 일본에서도 인지도를 쌓는다. 앞날은 마냥 탄탄대로처럼 보였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학고재갤러리 본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동엽 개인전’은 알려지지 않은 그의 단색화 15점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다. 2013년 타계 후 열리는 전시인 만큼 회고전 성격이 짙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 2000년대 작품을 각각 4~6점씩 고르게 선보인다.

홍익대 미술교육과를 졸업한 이동엽은 일찍부터 재능을 인정받고 평생을 전업작가로 살았다. 그러나 삶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화단과의 불화 등으로 1990년대에 긴 슬럼프에 빠지며 경제난 등 곡절을 겪는다. 2000년대 들어서 다시 창작에 전념했지만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 2013년 급작스럽게 눈을 감았다. 이번 전시는 우찬규 학고재갤러리 대표가 2008년 개인전을 열었던 인연으로 유족을 설득해 어렵게 성사시킨 자리다.

이동엽 화백의 생전 모습(사진=학고재갤러리).


색채의 현란함이나 가시성보다 사유의 깊은 맛을 내는 단색화는 이제 한국미술을 대표하는 사조가 됐다. 단색화 1세대라 할 이동엽은 흰색에 유난히 애착을 보였다. 그래서 사실 언론 특히 지면에서는 소개하기 어려운 작가였다. 미세한 차이를 보이는 흰색의 붓질을 담은 그의 작품을 거친 인쇄가 따라가 주질 못했기 때문이다. 자칫 백지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동엽 작품의 첫인상은 ‘의아하다’다. 연필이나 파스텔로 그린 스케치화 같은 그림에서 작가가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말초신경계를 자극하려는 의도적인 손길 대신 그저 은은하게 사라지는 산사의 종소리인 양 무심한 붓질에 어느 순간 머리가 맑게 개고 감정이 가라앉는다. 켜켜이 쌓인 흰색의 질감은 캔버스 바깥으로 넘치지 않고 안으로 깊게 스며있다. 작품명이 ‘사이-명상’ ‘순환’ 등인 데는 이유가 있다.

윤진섭 미술평론가는 이동엽의 작품에 대해 “색과 형에 관한 극도의 절제를 통해 심오하며 숭고한 미의 영역을 확립했고 채움보다는 비움의 가치를 상기시킨다”며 “물량과 크기 위주로 승부를 거는 현대인의 가치관에 경종을 울리며 여러 욕망의 덧없음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고 평했다. 또 로랑 헤기 프랑스 생테티엔미술관장은 “이동엽의 그림에는 군더더기처럼 부가적이고 자의적인 요소가 없다”며 “눈 덮인 하얗고 넓은 들판처럼 그저 자연스럽게 존재할 뿐”이라고 극찬했다. 전시는 8월 23일까지다.

이동엽의 ‘사이’. 2000년부터 2년간 그린 작품이다(사진=학고재갤러리).
이동엽의 ‘사이-명상’. 2000년에 그렸다(사진=학고재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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