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모가 취미라는 작가 정보라…상상의 중심 여자로 옮겼다

부커상 최종후보 오른 정보라
새 소설집 '여자들의 왕' 펴내
치열하고 화끈한 여성주의 서사
“여자들 상상의 중심이 될 권리 있다”
정보라|280쪽|아작
  • 등록 2022-07-06 오전 6:40:00

    수정 2022-07-10 오후 12:22:14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여기 ‘데모’(demo)가 취미라는 작가가 있다. 세월호 유가족의 특검 서명운동을 도왔고,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출근길 지하철 시위에도 동참했다. 차별금지법과 중대재해법(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위한 오체투지 행진 때는 물론, 우크라이나 전쟁 반대 집회 현장에도 그는 있었다.

지난 4월 영국 부커상 국제부문 최종후보에 올라 주목받은 작가 정보라(46)다. 그가 최근 여성 서사에 초점을 맞춘 새 소설집 ‘여자들의 왕’(아작)을 펴냈다. 부커상 후보 지명 이후 첫 신작이다. 2008년부터 2019년에 걸쳐 작가가 천착해온 여성주의 판타지 소설 일곱 편을 엮었다. 정 작가는 “과거 많은 소설과 이야기들이 남성 위주로 쓰였던 것을 비틀어 보고 싶었다”고 했다.

소설집 ‘저주 토끼’(Cursed Bunny)로 영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부커상 국제부문 최종 후보에 올라 주목 받은 정보라 작가가 여성 서사에 초점을 맞춘 새 소설집 ‘여자들의 왕’(아작)을 출간했다. 정 작가는 1998년 ‘머리’라는 작품으로 연세문학상을 받았다. 이후 20년 넘게 글을 쓰고 있다(사진=연합뉴스).
괴상하고 아름다운 ‘보라 월드’…섬뜩한 반전, 사회참여적 삶 응축

“구출 좋아하네.”

이런 공주가 있었던가.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탑에 갇힌 자신을 찾아온 기사를 향해 칼을 들고 건들건들하게 “죽을래?” 같은 말을 내뱉는 공주 말이다. 주로 남성의 영역이었던 성경·판타지·모험 소설의 무게 중심(화자)을 ‘여자’로 옮겼다. 그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세계를 전복한다.

책의 절반을 차지하는 건, 소설집을 여는 일명 ‘공주, 기사, 용’ 3부작이다. 각각 ‘높은 탑에 공주와’, ‘달빛 아래 기사와’, ‘사랑하는 그대와’란 제목이 붙었지만 하나의 이야기로 흘러간다. 용이 지키는 탑에 있는 공주는 용맹한 기사가 나타나 구출해주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왕자가 용에게서 공주를 구해내는 서양의 판타지를 여성 중심적 구도로 다시 써낸 작품이다. “아마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라는 해피엔딩의 규칙을 따라가면서도,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종류의 결말에 당도하는지에 주목해 더욱 새롭다.

정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공주도 사람이니까 마냥 저렇게 연약하지만은 않을 것 같아서 천편일률적인 구도를 좀 뒤집어보고 싶었다”며 연작이 된 데에는 “쓰다 보니 용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고 기사도, 왕비도 다 각자의 처지와 사연이 있을 것 같아서 계속 썼더니 3부작이 됐다”고 귀띔했다.

정보라 작가의 신작 소설집 ‘여자들의 왕’(사진=아작).
표제작 ‘여자들의 왕’은 성경 속 인물인 사울·요나단·다윗의 권력투쟁에서 모티브를 얻어 여자들의 관능적 싸움으로 변주한 점이 흥미롭다. 왕좌를 두고 여자가 여자를 지키거나, 배반하는 여성 권력자들이 나온다. 작가는 “아주 농염하고 화끈한 여자들의 관능적인 권력투쟁을 써보고 싶어 시도했는데 생각보다 결과가 괜찮아서 만족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도 기존 남성 중심 서사를 뒤집는다. 작가가 대학원에서 배운 동슬라브 원초연대기와 외할머니 장례식장에서 보고 들은 집안의 역사를 바탕으로 썼다. 동슬라브 원초연대기에는 유일한 여성 군사령관 올가 공주가 등장하는데, 동슬라브 중세 역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여성 군지휘관이다. 작가는 “그게 슬퍼서 내 상상 속에서라도 올가 공주의 대를 이어주고 싶었다”고 했다.

일곱 편의 소설은 무섭고 괴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정보라 작법을 따른다. 이번에도 괴이한 상황 속 인물이 느끼는 외로움과 고립감, 허무함 등을 밀도있게 그려냈다는 평가다. 정보라 특유의 냉소적이면서도 정보라표 섬뜩한 반전 유머가 돋보인다. 약자에 대한 연대, 폭력과 거짓을 무기로 사용하는 자에 대한 분노도 스며있다.

그는 소위 ‘문학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작가 역시 “고귀하고 특별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그동안 접해보지 않았던 다른 세계를 능청스럽게 보여주며 툭툭 이야기를 펼치는데, 무서우면서도 흥미롭고, 현실감 있게 읽힌다. 그러면서도 독자를 사고하게 만든다는 점은 정보라가 구축한 ‘보라월드’ 색채라 할 만하다.

이번 소설들은 출간 전부터 ‘남자 죽이는 여자 이야기’라는 오해를 받았다고 했다. 실상은 남성과 여성을 뒤바꾼 데에서 불편함에 가깝다. 정 작가는 “치열하게 살아가는 여자들의 이야기로 읽어 주면 좋겠다. 여자들도 상상의 주인공이자 중심이 될 권리가 있다”면서 “독자들도 재미있는 경험이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부커상 후보에 오른 뒤 자신에게 쏠린 이목엔 불편함을 숨기지 않는다. 국내 장르문학 부흥이 마치 ‘저주 토끼’의 후보 지명 때문인 것처럼 쏟아지는 관심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최근 문예지 현대문학(現代文學)의 7·8월호 장르문학 특집에 스페셜 에디터로 참여한 이유다. 직접 섭외한 19명의 작가와 함께 총 20편의 작품을 싣는 이례적인 기획을 성사시켰다.

정 작가는 부커상 발표 당시 지금까지 늘 해왔던 대로 자신이 믿는 가치와 진실을 전달하기 위해 글을 쓰겠다고 했다. “끝내주게 무서운 공포 소설을 쓰는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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