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 칼럼] 우리 사회에 희망은 있는가

  • 등록 2019-05-24 오전 6:00:00

    수정 2019-05-24 오전 6:00:00

구석마다 곰팡내 나는 눅눅한 반지하방. 여기에 거주하는 네 식구의 백수 가족. 그렇지만 가난을 벗어나려는 궁리만큼은 번뜩인다. 이들에게는 오기와 자존심도 살아가는 밑천이다. 마침내 아들이 명문대학 출신인 것처럼 속여 부잣집 과외선생으로 들어가면서 이들 가족의 종횡무진 블랙 코미디가 펼쳐진다. 현재 프랑스 칸느영화제에서 세계 영화인들의 눈길을 끌고 있는 ‘기생충’(봉준호 감독)의 스토리 전개다.

영화가 우리 사회의 모습을 다룬다고 해도 어차피 현실과는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며칠 전 경기도 의정부 어느 아파트에서 일가족 세 명이 숨진 채 발견된 사건과 비교해 봐도 그렇다. 목공소를 운영하다 빚을 진 가장이 아내와 딸을 먼저 보낸 뒤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지난 어린이날에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 30대 젊은 부부가 어린 두 자녀를 꼭 껴안은 채 극단적 선택에 이른 것이다. 이들 부부가 지난달 직장을 그만두면서 경제적 상황이 악화됐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전언이다.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것은 더이상 살아갈 희망을 놓쳤기 때문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막다른 골목에 부딪쳤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경제가 계속 가라앉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심각하다. 실직자와 파산자가 훨씬 빠른 속도로 늘어나게 될 것이다. 심지어 지금 상황이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진단까지 제시된다. 당시 초래됐던 가정 해체 등 극심한 사회적 불행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기생충’이란 영화 타이틀이 그때의 기억을 압도적으로 상징한다.

그런데도 정치 현실은 너무 태연하다. 곳곳에서 생활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아우성치는데도 아무런 역할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앞세우는 것은 당리당략뿐이다. 오히려 갖은 독설을 주고받으면서 불신을 자초하고 있다. 몇 해 전 ‘송파 세 모녀’ 사건이 발생하자 온갖 지원책을 늘어놓았건만 여전히 비극이 끊이지 않는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물론 정치권이나 정부의 역할에는 한계가 분명하다. 정부가 발 벗고 나선다 해도 각 가정의 살림살이와 채무 문제를 만족스럽게 해결해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국민에게 거둬들인 세금으로 생색내듯이 나눠주는 태도도 옳지는 않다. 세금을 걷는다고 해도 무한정 걷을 수는 없으며, 결국 국민 부담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다. 설사 눈앞에 어려운 상황이 닥쳐올지라도 조금만 참고 견디면 환하게 웃을 수 있는 내일이 밝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갖도록 이끄는 지도력이 필요하다. 과거 개발시대에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가 땀방울을 흘리면서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냈던 원동력이 바로 그러한 믿음에 있었다. 당장 허리띠를 졸라맬지언정 내일의 희망이 있다면 쉽사리 목숨을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것이 자기 힘으로 먹고사는 일이다. 일할 여력이 충분한데도 일자리가 없어 빈둥빈둥 지내는 것만큼 무기력한 것도 없을 듯하다. 이런 점에 비춰본다면 지금 추진되는 경제정책은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 경제가 뒷걸음치는 게 정책 방향과 무관할 리 없다. 희망을 심어주기보다는 한숨과 하소연만 야기하는 상황이다. 근로자들의 소득을 높여 빈부격차를 해소하겠다는 취지가 나쁠 것은 없지만 현실을 무시한 정책으로 도리어 경제 전반이 후퇴하게 된다면 바람직한 정책이라고 평가받기는 어렵다.

앞서 의정부 비극사건에서 혼자 살아남은 10대 아들의 얘기가 귓전을 때린다. “식구들이 전날 밤 둘러앉아 살아가는 고민을 나누던 중 서로 껴안고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제 그는 어떤 희망을 갖고 살아갈 것인가. 우리 사회가, 정부가, 정치권이 답변해야 할 질문이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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