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으니 없다고 할까…진짜 풍경은 '사각'에 있더라"

아라리오뮤지엄서 개인전 연 작가 이진주
14m 대형 삼각틀 둘러싼 동양화법 회화
연결 없는 작가의 상징으로 이야기 풀어
프레임 안 사각지대, 다른세상 감추기도
"'본다'는 근본적 의미, 재해석해야 할듯"
  • 등록 2020-09-28 오전 3:30:00

    수정 2020-09-28 오전 3:30:00

작가 이진주가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서 연 개인전 ‘사각’에 건 자신의 작품 ‘사각’(2020) 옆에 섰다. A자형 삼각틀로 제작한 프레임을 둘러싼 설치회화는 총길이 14m에 달한다. 작가 옆 그림은, 서사와 상징으로 뒤덮인 전체 작품 중 한쪽 면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사물이 눈으로 보이지 않는 각도’ ‘관심이나 영향이 미치지 못하는 구역’ ‘사정거리에 있으면서도 쏠 수 없는 범위’. 사전이 무심하게 뜻풀이를 해준 ‘사각’(死角)이란 거다. 흔히 ‘사각지대’라고 말하는 이는 한자어 그대로 ‘죽은 각’을 말한다. 그 형편으로 몰아넣은 처지·여건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상황이 어떻든 ‘사각’은 반드시 한 방향을 가리킨다. “당신은 봐야 할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거다. 시야에 장애가 있든, 주의를 놓치고 있든, 세상이 장난을 치든 말이다.

어쩌면 영원히 품을 수 없는 ‘숨은’ 가치일지도 모를 그것. 그런데 그 ‘사각’을 한 번 보여주겠다고 나선 이가 있다. 작가 이진주(40)다. 완벽하지 않든, 비딱한 것이든, 설명할 수 없든, 불완전한 보기가 되든. 굳이 왜 그렇게까지?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니까. 최소한 못 보고 있는 게 있다는 건 알려야 하니까. “정작 봐야 하는 진짜 풍경이 ‘사각’에 있기도 하니까.”

하지만 더 복잡한 문제가 있다. 원체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그 사각을 어떻게 ‘보이는 것으로’ 꺼내놓을 건가. 서울 종로구 율곡로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 연 개인전 ‘사각’은 그 매듭을 풀고 실체를 드러낸 자리다. 그저 ‘숨은 그림 찾기’ 정도려니 했다면, 작품이 누르는 무게감에 적잖이 당황할 수도 있다.

△14m 그림으로 A자형 프레임을 감싸 만든 ‘사각지대’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 한 번이라도 가봤다면 짐작이 될 거다. 이곳 공간구조는 들어서자마자 발아래를 내려다보게 돼 있다. 오래전 소극장으로 썼던 곳을 개조 없이 전시장으로 사용하고 있으니까. 어두운 객석에서 밝은 무대를 바라보는 식이랄까. 작가에겐 더 어려운 장소다. 하얗고 반듯한 화이트큐브에 익숙한 그들을 고민에 빠뜨리기도, 상상력에 시달리게도 하니까.

이진주의 설치회화 ‘사각’(2020)을 전시장 입구에서 내려다봤다. 거꾸로 보이는 A자형의 프레임과 회화작품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래전 소극장으로 썼던 곳을 개조 없이 사용한 공간구조의 특성상 전시장은 마치 어두운 객석에서 밝은 무대를 바라보는 듯하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렇게 바라본 이 작가의 무대, 아니 전시는 커다란 구조물 한 덩이로 포문을 연다. 리넨에 채색한 그림을 양옆에 건, 마치 뱃머리처럼 보이는 뾰족한 삼각프레임이 당장 시선을 끄는데. 정확하게는 거꾸로 보이는 A자형. 보이지 않는 그 속을 보이겠다고, 진짜 사각지대를 제작한 거다. 이른바 ‘설치회화’를 만든 셈인데. 표제작인 이 ‘사각’(2020)의 전체둘레는 14m. 작가는 “관람객이 위에서 내려다볼 때는 ‘불완전한 보기’로, 곁에서 걸을 때는 ‘눈높이를 맞추는 보기’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작가는 A자형의 두 면을 두른 가로 488㎝씩의 그림 두 점 외에, A자형 안쪽에는 한 소녀를 어깨에 얹은 한 여인 그린 작품을 칠흑같은 검은 바탕에 걸어뒀다.

‘죽은 각’을 의도한 작품은 이뿐만이 아니다. 높이 260㎝의 설치회화 ‘(불)가능한 장면’(2020)도 있다. 각각 왼쪽 면에 날개를 단 나무판 앞뒤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은 여인을 세운 그림을 들였다. 하나를 보면 마땅히 하나를 잃어야 하는, 절대 한눈에 들일 수 없는 무한한 사각을 품었다고 할까.

이진주의 설치회화 ‘(불)가능한 장면’(2020). 날개가 달린 높이 230㎝ 나무판 앞뒤에 올린 양면화 중 한 면이다. 두 여인을 마주 세워 서로의 얼굴을 ‘감췄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형태가 어찌됐든 이 작가 그림의 특징이라면, 결코 연결되지 않는 장구한 스토리가 읽힌다는 거다. 아이들이 벽 뒤에 숨어 있고, 뿌리째 뽑힌 식물이 나뒹굴고, 흙탕물에서 작대기로 하얀 천을 건져내고. 이들 동떨어진 소재·형체가 뭔가 말을 하는 듯한데. 그럼에도 작가는 “이야기의 얼개를 일부러 피했다”고 했다. 한 토막을 던지는 순간 결국 작품은 한 토막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설령 많은 오해를 낳을지언정 뉘앙스만으로 에둘러 가는 편이 낫겠다”는 거다.

의도가 적중했는지, 이 작가의 작품을 두곤 다채로운 감상이 오간다. 따뜻하다, 쓸쓸하다, 정감있다, 불안하다 등등. “맞다. 양가적이다. 부정적인 시각도 있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정말 기쁠 때도 두려움이 생기지 않던가. 세계를 마주할 때 생기는 극단의 감정을 작품에 다 녹인다.”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의 벽에 건 이진주의 회화 ‘그것의 중심’(2017).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매달린 묵직한 돌, 그 가지의 중심을 잡고 있는 손, 그 손에 쥔 연필. 아슬아슬한 세상의 풍경을 온갖 오브제의 연결로 대신 풀어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독특한 건 무수한 ‘상징’이다. 팬티스타킹만 신은 여인이 그렇고, 몸을 잃어버린 손이 그렇고, 물과 천이 그렇다. 이들은 오래전부터 작가만의 도상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가령, 누군가가 입은 옷은 그 자체로 연출력이 강렬하다. 옷이 내뿜는 정보가 불필요하다 싶어 다 제거하고 팬티스타킹만 남겼다. 그제야 내가 표현하려 한 인물과 잘 맞아떨어지더라. 탄력있고 따뜻하지만 외부 충격에는 약한 성질을 가진.” 그렇다면 손은? “손이 가진 표정 때문이다. 얼굴만큼 다양하지 않은가. 때론 대놓고, 때론 숨어서 여러 사건을 암시한다.”

이진주의 설치회화 ‘사각’(2020) 중 한 면의 부분. 벽 뒤에 숨은 아이들, 뿌리째 뽑혀 나뒹구는 식물, 몸을 잃은 손 등 작가의 서사를 입은 온갖 상징이 들어차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남편 이정배 작가, 설치회화 프레임 제작해

사실 이번 전시에서 ‘핵’이라 할 설치회화의 프레임을 만든 이는 따로 있다. 이 작가의 남편 이정배(46) 작가다. 이 작가와 홍익대 동양화과 동문이기도 하는 한 남편은 그림보단 조소작업을 활발히 하는 중이다. 두 작가의 공통점이라면 정통을 고수하진 않더라도 태생을 잊진 않았다고 할까. 동양적으로 붓질을 하고, 동양적으로 나무·레진을 다듬는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동양도 서양도 아닌 중립적인 세상을 열어젖히는데, 바로 ‘확장’이다. 이를 연결고리 삼아 두 작가는 함께 2인전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만큼, 남편은 이름 한 줄 올리지 않은 순수한 조력자로 몸을 감췄다. ‘작가 이진주 전’의 사각이 있다면 그건 ‘작가 이정배’다.

작가 이진주가 자신의 작품 ‘사각’을 사이에 두고 남편 이정배(오른쪽) 작가와 나란히 섰다. 이정배 작가는 이번 아내의 개인전에서 ‘핵’이라 할, 설치회화의 프레임을 제작했다. 그 프레임 덕에 두 작가는 ‘나란히’ 서기는 했지만, 서로를 볼 수 없는 서로의 ‘사각지대’에 잠시 머물게 됐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간 이 작가는 평면이면서 입체를 탐한 작업을 해왔다. 지층의 단면을 끊어낸 듯 ‘저지대’(2017) 아래 세상을 보여주고 ‘가짜우물’(2017)이란 속 깊은 세상을 눈앞에 들이대기도 했다. “우리 동양화는, 중국의 관념산수와 구분하기 위해 ‘진경산수’란 말을 썼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객관적인가는 또 다른 문제다. 나조차 감히 진경을 끌어와서 진짜 풍경이라 우기고 있는 건 아닌지.”

시작은 ‘본다는 게 뭘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부터란다. “사진으로 찍힌 객관적·환상적인 풍경과 우리가 감각하고 기억하는 풍경은 다를 거란 생각이 들더라. 그런데 우리의 소통은 보통 주관적인 것이 본질을 이루지 않는가. 결국 ‘본다’를 다시 해석해야 할 듯했다.” 그렇다고 무모하게 욕심을 부린 것도 아니다. 그래도 못 보는 것은 지나쳐 버려도 괜찮다고 한다.

그래. 결국 세상을 다 들여다볼 순 없으니까. 무슨 짓을 해도 못 보는 부분은 생기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이렇게 시도는 하지 않았나. “뻔하고 익숙한 캔버스”로는 아쉬워 “더 적합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작품을 보여주겠다고. 그럼에도 여전히 보지 못한 ‘사각’은 더 있을 터. 드러낸 것보다 드러낼 게 궁금한 건 역시 기대감 때문일 거다. 전시는 내년 2월 14일까지.

이진주의 회화 ‘저지대’(2017). 지층의 단면을 끊어낸 듯 땅속 세상까지 보여주고 있다. 가로세로 550×222㎝ 규모의 대작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작가의 작품 4점 중 한 점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는 걸지 않은 그림이다(사진=이진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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