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지 없다…'위기의 영국' 시장 쇼크 막으려 또 돈풀기(재종합)

영란은행, 무한정 장기국채 매입 결정
'파운드화 쇼크' 대응 위해 또 돈 풀기
'감세안 유턴' 없자 BOE가 총대 멨다
"뒤죽박죽 통화정책"…곳곳서 비판론
시장 안도했지만…'일시적 반등' 분석
  • 등록 2022-09-29 오전 6:27:53

    수정 2022-09-29 오전 6:27:53

[뉴욕=이데일리 김정남 특파원] 영국 영란은행(BOE)이 결국 시장 개입에 나섰다. 새 정부의 대규모 감세안 탓에 파운드화 가치가 역대급 폭락하자, 가격이 추락하는 장기국채를 무한정 사들여 금융시장 쇼크를 막겠다는 것이다. 이에 글로벌 금융시장은 다소나마 안도했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고육지책이라는 혹평이 많다.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자 돈줄을 조였다가, 눈앞의 시장 대혼란을 막으려고 다시 돈을 푸는 것이기 때문이다. 갈팡질팡 하는 영국 정책당국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면 중장기적으로 파운드화 가치는 더 고꾸라질 수 있다.

앤드루 베일리 영국 영란은행(BOE) 총재. (사진=AFP 제공)


BOE, 무한정 장기국채 매입 결정

28일(현지시간) 로이터 등에 따르면 BOE는 이날 금융시장 안정 차원에서 다음주부터 시행할 계획이었던 장기국채 매각을 다음달 말까지 한 달간 중단하는 동시에 필요한 만큼 제한 없이 장기국채를 다음달 14일까지 다시 매입하기로 했다. 이번 국채 매입은 영국 재무부가 전액 보상한다.

앞서 BOE는 최근 두 차례 연속 50bp(1bp=0.01%포인트) 기준금리를 올리는 빅스텝을 밟았다. 이와 함께 최근 10여년간 지속했던 양적완화(QE)를 끝내고 장기국채를 팔기로 결정했다. 인플레이션이 치솟자 돈줄을 조이겠다는 의지를 보여 왔다.

그런데 이 계획은 시작도 못 해보고 끝날 조짐이다. 새로 출범한 영국 정부가 발표한 감세안으로 인해 파운드화 가치가 역대 최저치 폭락하는 등 시장이 대혼란을 겪자, BOE가 이날 전격적으로 시장 개입을 선언해서다. BOE는 휴짓조각으로 전락할 위기에 놓인 영국 국채를 무한정 사들이는 과정을 통해 가격을 회복시킨다는(국채금리 하락) 복안이다. 돈을 다시 풀어서 급한 불을 끄겠다는 것이다. 영국 싱크탱크 재정연구소(IFS)에 따르면 이번 감세안은 1972년 이후 가장 큰 규모다.

BOE는 이날 시장 개입을 두고 “최근 영국과 글로벌 자산시장에서 나타나고 있는 심각한 가격 조정을 예의주시해 왔다”며 “이같은 기능 장애가 지속하거나 혹은 더 악화한다면 영국은 금융 안정성에 있어 중대한 위험을 겪을 수밖에 없고 실물경제 유동성 흐름도 급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영국 가계와 기업의 신용 상태가 악화하는 위험을 미리 줄일 준비가 돼 있다”고 강조했다.

BOE 입장에서는 사실상 선택지가 없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 등의 권고대로 감세안을 철회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BOE가 꺼낼 수 있는 카드는 금리 추가 인상과 대규모 국채 매입 정도다. 다만 긴급 회의를 통해 금리를 더 올리면 추가로 국채금리는 폭등하고 파운드화는 폭락할 가능성이 높다. 시장 쇼크가 더 심화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난해 말부터 이어 왔던 긴축 기조를 접더라도, 시장부터 살려놓으려면 국채 매입 외에 뚜렷한 방도가 없는 게 냉정한 현실이다.

“뒤죽박죽 통화정책”…비판론 커

BOE의 깜짝 카드에 시장은 일단 안도했다. 파운드·달러 환율은 이날 장중 1파운드당 1.0915달러까지 상승했다(파운드화 강세·달러화 약세). 파운드화 위기설이 불거질 당시 환율은 1.03달러대까지 폭락했다.

글로벌 금융시장 전반에서 위험 선호가 살아났다. 뉴욕증권거래소에서 대형주 중심의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 지수는 전거래일 대비 1.97% 상승한 3719.04를 기록했다. 뉴욕상업거래소에서 11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은 4.65% 오른 배럴당 82.15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지난 7월 18일 이후 가장 큰 오름 폭이다. 주요국 통화 대비 달러화 가치를 지수화한 달러인덱스는 줄곧 112대에서 움직이면서 ‘갓달러’ 재앙은 약간 누그러졌다.

야누스 핸더슨의 베서니 페인 채권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BOE가 시장이 불안할 경우 QE를 다시 한다는 의지를 보이면서 투자자들이 영국 국채에 안전장치가 있는 것으로 다소 안심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그저 미봉책이라는 비판론이 많다. 돈을 풀어 시장에 안도감을 주면 당장 위기는 넘길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영국을 향한 투자 가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금융시장 반등 역시 일시적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모하메드 엘 에리언 알리안츠 수석경제고문은 CNBC에 나와 “BOE가 QE라는 ‘라라랜드’에 더 오래 머물러 있을수록 낮아지는 금리, 혼란스러운 시장, 우스꽝스러운 개입, 왜곡된 자산 배분 등으로 출구를 찾기 더 어려워진다”며 “(이번 조치는)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해야 하는 일과 반대인 만큼 정책 일관성 결여를 부각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영국 투자은행(IB) 하그리브스 랜스다운의 수잔나 스트리터 선임분석가는 “BOE가 정책을 뒤죽박죽으로 하고 있다”며 “정치적으로 정책 선회를 꺼리는 정부가 완강히 버티고 있는데 대한 좌절의 흔적”이라고 말했다. 새로 출범한 영국 정부가 정치적인 타격을 염려해 감세안 철회를 주저하자, 중앙은행인 BOE가 대신 총대를 멨다는 것이다.

앤드루 그리피스 재무부 부장관은 이날 “정부의 감세 정책은 옳다”며 “영국 경제의 경쟁력을 키울 것”이라고 말했다. 쿼지 콰텡 재무장관의 사임을 포함한 ‘감세안 유턴’은 없다는 의지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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