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삼지 않겠다’ 이례적 면죄부..망설이던 先보상 ‘급물살’

부추기는 금감원‥면죄부 '비조치의견서' 줘
그전까지 꺼리던 은행권 기반 흔들리자 배상
모럴해저드 우려‥투자자 책임원칙도 훼손
  • 등록 2020-05-22 오전 5:00:03

    수정 2020-05-22 오전 9:17:48

[이데일리 장순원 기자] 작년 해외 금리연계 파생결합펀드(DLF) 사태가 막 터졌을 당시 은행들의 태도는 지금과 달랐다. 투자손실에 대한 적극적인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컸지만, 은행권은 분쟁조정절차 결과가 나오면 배상하겠다며 완강히 버텼다.

은행이 고객과 ‘사적화해’를 바탕으로 보상에 나서면 법이 엄격히 금지한 ‘손실보전 금지조항’을 위반할 수 있다는 점을 내세웠다. 자본시장법 55조에 따르면 금융회사는 투자상품을 팔 때 사전에 수익을 약정하거나 사후에 보상해서는 안된다고 명시돼 있다. 보상할 수 있는 경우는 금융회사 스스로 판매과정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투자자와 사적화해를 했을 때, 또 법원의 판결, 금융감독원 분쟁조정위원회가 배상을 결정했을 때만 예외적으로 허용한다.

결국 법원이나 금융당국의 판단 이전에 보상에 나서면 자신의 불완전판매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는 모양새가 된다. 이는 추가적인 법적 책임으로 이어질 수 있다. 보수적 은행권에서는 이런 식의 선보상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배경이다.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에서 투자자들이 사모펀드 손실 보상을 요구하며 시위하고 있는 모습.(사진=뉴스1)
버티던 은행들, ‘선보상’으로 선회


그런데 반년도 안돼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KB증권(호주 부동산펀드), 신영증권(라임 펀드) 등이 먼저 나서 보상을 결정했고, 하나은행(이탈리아 헬스케어펀드)까지 가세해 선보상에 나섰다. 최근에는 라임펀드를 판 7개 은행이 투자금액의 약 50%를 가지급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이렇게 달라진 것은 금융당국과 은행의 이해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윤석헌 금감원장 취임 이후 소비자 보호는 금감원의 최우선 목표다. 금감원은 이번에 은행권이 자율적 보상에 나서도록 사실상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게 금융권 시각이다. 금감원은 투자자에 대한 선보상이 손실보전 약정을 금지한 자본시장법 55조 위반이 아니라는 내용을 담은 ‘비조치의견서’까지 은행에 써 줬다. 검사나 제재과정에서 선보상을 문제 삼지 않겠다는 일종의 ‘사전 면죄부’다. 금감원이 이런 비조치의견서를 보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은행이 부실판매의 책임을 인정하고 자율배상에 나서는 것을 막을 이유는 없다”면서 “비조치의견서가 나갔다고 해도 검사와 제재는 법과 원칙에 따라 진행된다”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윤 원장이 야심차게 추진했던 키코 배상도 지지부진한 상황”이라며 “금감원으로서는 은행권의 협조와 소비자 보호 강화라는 실적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다 PB기반 무너질라..‘고객 달래기’

은행 스스로도 흔들리는 영업기반을 지키려는 측면도 있다. 사고가 터진 해외 사모펀드에 투자한 투자자들 대부분은 은행의 큰손 고객이다. 펀드의 손실이 확정되고 분쟁조정이 끝나려면 적어도 3년 이상 걸리는데 이 기간 큰손들의 목돈이 묶이게 된다. 이들이 등을 돌리면 은행의 주요 먹거리인 자산관리(WM) 부문이 통째로 무너질 수 있는 상황이다.

급속한 자금유출은 이미 현실화하고 있다. 올해 3월 말 기준 국내은행의 사모펀드 판매 규모는 23조5805억원이다. DLF 사태가 수면 위로 떠오른 작년 7월 말 판매 잔액이 29조51억원이었던 것에 비하면 18.7% 급감했다. 최근에는 조금이라도 위험한 자산을 담은 사모펀드는 투자자들이 거들떠도 보지 않는 분위기다. 은행권에서는 고객 이탈 속도를 늦추지 못하면 자산관리(WM) 기반이 완전히 무너질 수 있다는 절박감이 나올 정도다. 시중은행의 한 PB팀장은 “고객 항의전화에 신규 영업은 포기한 지 오래”라며 “하루종일 돈을 빼겠다는 고객을 설득하느라 진이 빠진다”고 하소연을 했다. 은행권 한 관계자는 “고객에서 일부라도 피해보상을 나서는 모습을 보여야 고객 이탈 속도를 늦추고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금감원 제재 과정에서 도움이 될 것이란 계산도 깔렸다. 소비자 보호를 강조하는 금감원의 주문을 수용하는 모습을 보이면 징계를 낮출 수 있다는 기대에서다. 일종의 DLF 학습효과다.

‘투자자 보호’ vs ‘도덕적 해이’

투자자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다. 현재 은행권에서는 투자 원금의 최대 50%를 먼저 돌려주는 방안이 거론된다. 이 돈을 받은 뒤라도 또 분쟁 조정이나 법원 판단이 유리하게 나오면 나머지 차액도 보상받을 수 있다.

다만, 금융권 안팎에서는 이런 선보상이 나쁜 선례가 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금융회사나 투자자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긴다는 측면에서다. 무분별하게 금융상품을 사고판 뒤 문제가 터지면 보상을 요구하거나 이에 응하며 제재를 피하는 분위기를 조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형 법무법인 소속의 한 변호사는 “지금과 같은 사적보상은 투자자들의 성향과 관계없이 일률적으로 배상하는 방식”이라면서 “원칙과 기준이 없는 사적화해와 보상의 부작용은 고스란히 금융기관과 국민의 몫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금감원의 태도를 문제 삼는 목소리도 있다. 소비자보호에 파묻혀 투자자 자기책임이라는 금융시장의 대원칙을 약화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고동원 성균관대 법학대학원 교수는 “사적화해를 통한 배상도 넓은 의미에서는 손실보전에 해당할 수 있다”면서 “비조치의견서 발부는 신중히 결정했어야 할 사안”이라고 말했다.
[그래픽=이데일리 문승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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