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전문기자칼럼] 천재화가의 아내로 산다는 것

  • 등록 2020-08-13 오전 3:30:00

    수정 2020-08-13 오전 9:18:48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가난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리고 싶은 남편을 돕지 못하는 건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

처음에는 다들 꺼내놓는 ‘포장된 추억’이려니 했다. 세월이 흐르면 사랑과 미움은 뒤섞인다고들 하니. 그런데 얘기가 흐를수록 ‘아차’ 싶었다.

마치 신앙처럼 예술을 했다는 화가는 “그림 외에는 아무데도 관심이 없었”단다. 수입의 70%로 물감을 사고, 대한민국 최고의 화구로 작업하면서도, 오로지 캔버스의 크기가 문제였다는 사람. 100호(162×130㎝)는 소품이었다고 했다. 끊임없이 확장해야 하는데 번번이 작은 캔버스가 발목을 잡았다는 거다. 아내는 결단을 했다. 화실을 마련해주자. “좋지도 않은 집이었지만 그걸 팔고 가장 싼 땅을 보러 다녔다. 경기 안성에 그때 돈으로 쌀 한 말 값이던, 한 평에 6000원짜리 땅을 찾아냈고 2000만원을 들여 장만했다.” 길이 3∼4m는 우스운(마지막 작품은 1000호[840×350㎝]였단다) 빛나는 대작을 쏟아낸 안성 스튜디오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1983년 일이다. 결국 화가는 소원을 이뤘다. 하지만 그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7년 뒤 그만 세상을 떠나버린 거다. 마흔아홉이었다. 아내는 많이 울었다고 했다.

한국의 기하추상을 만들고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이승조(1941∼1990) 화백의 아내 고정자(72) 여사가 털어놓은 얘기다. 이 화백은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추상세계를 연 인물이다. ‘파이프’처럼 생긴 원통모양 단위를 소재 삼아 스스로 ‘핵’(核)이라 칭한 기계미학적 회화를 빼냈다. 세상이 산업화하는 속도에 맞춘 시대적 풍경을 지독하게 엄격한 작업방식으로 대단히 고집스럽게 담아냈다.

하지만 그의 아내에게는 미칠 바가 못 됐다. 자신의 엄청난 작품들을 아내는 최고의 컬렉션으로 지켜내고 있으니. 죽을힘을 다했을 30년을 말이다. 게다가 자신의 ‘30주기 회고전’에서 아내가 “아름다운 죽음이었다”고 회상하게 되리란 건 더더욱 상상도 못했을 테고. 전업주부였던 아내는 그새 가장 확실한 ‘이승조 전문가’가 됐다. 예컨대 이 화백의 작품 중 금속성 광택이 나는 그림이 몇 점 있는데. 그 안에 심은 은색이 “중국집 철가방에서 딴 것”이란 귀띔을 누가 해주겠는가.

그 ‘30년’이 묘하게 오버랩 되는 또 다른 화가의 아내가 있다. 수화 김환기(1913∼1974)의 아내 김향안(1916∼2004) 여사다. 수화가 떠나고 그이는 꼬박 30년간 남편의 작품을 지켰다. 환기미술관을 세우고 철두철미하게 작품을 관리하며 거장의 예술혼을 빛내는 일에만 고군분투했더랬다. 그럼에도 ‘수화 20주기 전’이자 ‘금혼기념전’을 앞두고 쓴 1994년 일기에서 그이는 “50년은 참으로 긴 시간이다. 혼자 살아남아서 이 지루한 시간을 맞는다”라고 썼다.

두 아내의 공통점이라면 ‘남편의 천재성’에 굴복해 머뭇거리지 않았다는 거다. 거리낌 없이 “사람은 가고 여기 그의 예술은 남았다”(김향안)고 했고, “작품은 아직도 진행 중”(고정자)이라고 했다. 두 아내 덕에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환기미술관에 걸려 있고(‘수화시학’ 전), 이승조의 ‘핵’은 안성 스튜디오에서 외출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 걸려 있다(‘30주기 회고전: 도열하는 기둥’). 걸작을 화가가 만들었다? 천만에. 그들의 아내가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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