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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헌의 혁신@미술]<15> 튀는 화풍에 박리다매…'베네치아 이단아' 판 뒤집었다

▲틴토레토와 '공짜 마케팅'
스승 티치아노와 차별화…과장원근법 극단명암법
공모전 무상기증 승부수, 빨리 제작해 싸게 판매도
받는 자 아닌 주는 자로 돈 아닌 영향력 높이려 해
동료들 숱한 배척 속에서 '상황 이끄는' 혁신가로
  • 등록 2020-09-25 오전 4:10:00

    수정 2020-09-25 오전 4:10:00

틴토레토가 그린 ‘최후의 만찬’(1592∼1594).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과 극단적인 대조를 이룬다. 어두운 실내에 대각선으로 놓인 식탁, 식탁의 중앙을 벗어난 예수, 예수보다 크게 그린 제자들이 거칠게 움직이고 있다. 여기에 만찬의 주역들보다 동작이 더 큰 남녀 하인들까지 나서 틴토레토의 역동적이고 파격적인 화풍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 틴토레토는 ‘최후의 만찬’을 여러 점 제작했는데, 이 그림이 그가 사망하기 몇 달 전 완성한 마지막 작품이다. 365×568㎝ 크기의 캔버스 유화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산 조르조 마조레 교회 소장.


미술은 사람을 움직였습니다. 밥으로만 채울 수 없는 풍요와 평화를 안겨줬으니까요. 그림의 힘이고 조각의 에너지입니다. 하지만 미술의 역할이 이뿐이라 한다면 미술을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문명을 이끌고, 의식을 뒤집고, 결정적으로 돈의 흐름을 주도했던, 그것을 못 본 겁니다. 미술의 사조와 양식이 탄생할 때마다 세계경제에는 ‘변화의 그림’이 걸렸습니다. 바로 ‘혁신’을 주도했던 겁니다.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이주헌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미술로 이룬 혁신’의 현장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상으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이주헌 미술평론가] 16세기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화가 틴토레토(본명 야코포 로부스티·1518∼1594)는 다방면으로 혁신적인 화가였다. 미학과 조형어법도 혁신적이었고, 자신의 작품을 알리고 인정을 받는 방식도 혁신적이었다. 하지만 틴토레토는 “베네치아의 예술적 고아”로 치부될 정도로 당시 대부분의 동료화가들로부터 소외되고 배척당했다. 독불장군 같은 기질과 성격 탓도 있었고, 개성적인 조형으로 시대를 앞서간 탓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비우호적인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그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해냈다. 서양미술사가 자랑하는 위대한 거장이 됐다.

틴토레토는 염색공(이탈리아어로 틴토레 tintore)의 21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래서 별칭이 틴토레토(tintoretto 작은 염색공. 염색공의 아들)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일찍부터 아들의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는 그를 당대의 거장 티치아노(1488∼1576)에게 데려갔다. 그러나 틴토레토는 불과 며칠 만에 그의 화실에서 쫓겨났다. 워낙 재주가 뛰어나 스승이 그를 시기해서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고, 자신만의 성향이 확고했던 어린 틴토레토가 스승의 스타일을 따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거나 그렇게 짧게 만났다가 헤어졌지만, 틴토레토는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내내 잃지 않았다. 다만 매사에 티치아노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 그와 구별되기를 원했다. 평생에 걸친 그 지독한 차별화의 노력이 그를 티치아노에 버금가는 예술가로 만들어놓았으니 그야말로 자존심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독자노선’을 걷는 동안 티치아노는 그를 계속 백안시해 큰손들이 후원하는 것을 방해하고 공모경쟁이 있을 때는 다른 화가에게 그 몫이 돌아가도록 손을 쓰곤 했다.

△규범 깨부순 틴토레토…역동적 화면 창조

티치아노와 달라지고자 한 틴토레토의 노력은 그의 개성과 맞물려 그를 매우 진취적인 화가로 만들었다. 스승 티치아노는 정연한 구성과 풍부하고 부드러운 색조가 특징이었다. 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의 르네상스 고전주의 미학을 계승한 것이다. 하지만 틴토레토는 이런 고전주의적인 규범을 깨버리고 비대칭적이고 역동적인 구성과 강렬한 명암 대비, 격정적인 정서의 표출을 선호했다. 오늘날의 관객이 봐도 매우 당차고 개성적인 그림이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가 장 폴 사르트르는 틴토레토를 “최초의 영화감독”이라고 평했다.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고 박진감이 넘친다는 것이다.

틴토레토의 혁신성을 잘 보여주는 그림의 하나가 ‘최후의 만찬’(1592∼1594)이다. 유명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1495∼1497)과 비교해 보면 틴토레토의 그림이 얼마나 튀는 그림인지 금세 알 수 있다. 다빈치의 작품은 테이블이 화면과 수평이다. 당연히 공간이 매우 정적이고 인물의 배치도 균등한 편이다. 티치아노 역시 다빈치와 유사한 형식으로 ‘최후의 만찬’을 그린 적이 있다. 그러나 틴토레토의 ‘최후의 만찬’은 도저히 그 선례를 찾기 어려운, 매우 혁신적인 그림이었다.

일단 보는 이의 시선이 예수와 제자들보다 위에 있다. 그리고 테이블은 화면과 수평이 아니라 대각선을 이루고 있고 과장된 원근법으로 인해 뒤로 갈수록 급격히 물러선다. 화면이 전체적으로 지극히 어둡고 대부분의 인물은 윤곽 부분만 밝게 빛난다. 극단적인 명암법이다. 터치도 상당히 거칠다. 당시에는 지나친 표현 과잉, 감정 과잉으로 여겨졌지만, 바로 이 개성적이고 현대적인 표현이 그의 그림을 매우 역동적인 드라마로 만들어줬다. 그 역동성은 17세기 바로크의 대가 루벤스(1577∼1640)를 거쳐 19세기의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1798∼1863)와 제리코(1791∼1824), 그리고 드 쿠닝(1904∼1997)을 비롯한 현대의 추상표현주의자들에게 이어져 서양미술사의 중요한 조형전통이 됐다.

역동적인 화면의 창조자답게 틴토레토는 그림을 매우 빨리 그렸다. 이 성향 또한 매우 뜸을 들이며 천천히 그리는 스승 티치아노와 대비됐는데, 그림을 얼마나 빨리 그렸는지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1485∼1547)란 화가는 “내가 2년은 걸렸을 양의 작품을 틴토레토는 단 이틀 만에 해냈다”고 할 정도였다. 그래서 ‘프레스테차’(prestezza·신속하다는 뜻)가 그의 별명이 됐다. 물론 그림을 빨리 제작하다 보니 거친 터치가 그대로 드러나 그만큼 미완성의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 거친 붓놀림은 훗날 인상파 화가들이 적극적으로 구사하게 되는, 시대를 앞서가는 혁신적 표현이었다.

△빠른 붓놀림…마케팅서도 빛 발해

흥미로운 사실은, 이런 빠른 붓놀림으로 틴토레토가 조형적 차원을 넘어 마케팅 차원에서도 혁신의 빛을 발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564년 종교단체 ‘스쿠올라 그란데 디 산 로코’ 벽화 프로젝트였다. 이 벽화는 원래 공모경쟁을 통해 설치하기로 돼 있었다. 스쿠올라 그란데 디 산 로코는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평신도 종교단체로, 단체의 장려한 건물을 회화로 장식하기로 하고 틴토레토와 베로네세(1528∼1588)를 비롯한 다섯 명의 대가들을 대상으로 지정 공모경쟁을 실시했다. 각자 스케치한 것을 토대로 나름의 구상을 프레젠테이션하기로 한 날, 경쟁자들은 입을 크게 벌리고 다물지를 못했다. 틴토레토가 이미 완성작을 만들어 해당 벽에 설치해버린 것이다.

틴토레토의 ‘자화상’(1588). 머리카락과 수염, 입고 있는 옷의 감촉까지 손끝에 전해질 만큼 선명한 질감 표현이 특징이다.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소장.


경쟁자들은 분노했고 주최 쪽은 당황했다. 한바탕 큰 소란이 일어났다. 주최 쪽은 틴토레토가 공정한 경쟁의 룰에서 벗어났다며 그림을 떼어내고 그를 제외하려 했으나 “무상으로 기증하겠다”는 틴토레토의 한마디에 그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스쿠올라의 정관에 따르면 무상으로 기증하는 모든 물품은 무조건 받아들이게 돼 있었다. 분노한 경쟁자들은 이를 갈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워낙 그림을 빨리 그리다 보니 남들이 스케치할 시간에 그는 유화 대작을 제작할 수 있었고, 또 ‘전략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다 보니 그것을 무상으로 기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틴토레토는 한 술 더 떠 천장 장식화까지 무상으로 제작해주겠다고 약속하고 실천했다.

바로 이런 방식이 그가 즐겨 쓴 마케팅 방식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공짜 마케팅’이라 할 수 있겠다. 스승 티치아노의 경우에는 그의 작품을 한 점 사려면 귀족들도 ‘줄을 서서’ 오래 기다려야 했다. 티치아노는 작품을 천천히 제작했고 매우 비싸게 팔았다. 반면 틴토레토는 빨리 제작해서 싸게 팔았다. 작품 제작비 정도면 만족해했고 심지어는 스쿠올라 그란데 디 산 로코의 사례처럼 무상으로도 곧잘 건네줬다. 다른 동료 미술가들이 아무리 배척하고 견제하려 해도 이런 그를 ‘제압’할 수는 없었다. 일례로 스쿠올라에 성심껏 호의를 베푼 이듬해 그는 결국 그 단체의 멤버로 받아들여졌고, 이후 스쿠올라로부터 수십 점의 주문을 받아 경제적으로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

△돈에 매인 ‘을’ 아닌,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갑’

예술가로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코앞의 돈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값을 높이는 데 전력을 다했다. 돈 욕심만 크게 부리지 않는다면 명성과 영향력이 먹고사는 것쯤은 지장이 없게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오히려 작품을 싸게 팔거나 공짜로 줘 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인기와 영향력에 대한 ‘지분’을 갖게 했다. 그럼으로써 그의 성공을 자신들의 성공으로 공유하게 했다. 그렇게 그는 ‘받는 자’가 아니라 ‘주는 자’, 돈에 매인 ‘을’이 아니라,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갑’이 됨으로써 오히려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가 됐다.

틴토레토는 티치아노를 필두로 베네치아 화단이 자신을 배척하려고 꽁꽁 묶어둔 속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유롭게 자신의 예술을 추구해 미술사의 중요한 혁신을 이뤄내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 그는 예술가로서 탁월한 리더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개성을 중시하고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예술가는 사람들을 이끄는 조직의 리더로서는 맞지 않을 때가 많다. 하지만 뛰어난 예술가는 상황을 이끄는 ‘상황의 리더’가 된다. 티치아노는 그렇게 숱한 배척과 어려움 속에서도 상황을 리드함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혁신가가 됐다.

※ 스쿠올라 그란데 디 산 로코(Scuola Grande di San Rocco)

1478년 설립한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자선기관이다. 지역상인이 중심인 평신도 단체로, 역병이 돌 때 기원을 올리는 성인 ‘성 로코’의 이름을 땄다. 그런데 정작 이 단체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자선활동보다 건물이다. 광범위하게 그려진 틴토레토의 작품들이 실내장식으로 들어 있기 때문. 우선 1564년 이 단체가 마련한 공모전에서 다른 화가들을 제치고 잽싸게 선점해 걸었던 벽화 ‘성 로코에 대한 찬미’를 시작으로 틴토레토는 1565년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모습을 마치 영화 장면처럼 그린 ‘십자가 책형’을, 또 1567년까지는 예수의 수난을 표현한 여러 점의 그림을 차례로 그려 건물을 장식했다. 1576∼1581년에는 위층 메인홀의 천장화 ‘청동뱀의 기적’(1577)을 비롯해 벽화 25점을 그렸고, 1582∼1587년에는 지상층 홀에 예수와 마리아의 일생을 그린 대작 8점을 더 완성했다. 결국 24년에 걸쳐 틴토레토는 신·구약성서를 망라한 성화 70여점을 이곳에 걸고 붙인 것이다. 건물 자체가 틴토레토의 거대한 대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어찌 보면 틴토레토는 빈곤한 사람들이 찾아오는 기관에 그림으로 성서를 옮겨내고 가난한 이들도 걸작 미술품을 감상할 기회를 만들어줬던 셈이다. 스쿠올라 그란데 디 산 로코는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틴토레토의 작품들이 벽과 천장을 장식하고 있는 스쿠올라 그란데 디 산 로코의 위층 메인홀 전경. 건물에 들어서는 순간 광범위하게 걸리고 붙은 틴토레토의 작품 수에 놀라고 작품 규모에 한 번 더 놀라게 된다. 1564년부터 1587년까지 24년에 걸쳐 틴토레토는 신·구약성서를 망라한 성화 70여점을 그려 이곳을 장식했다. 건물 자체를 자신의 거대한 대표작으로 만든 셈이다.


△이주헌 미술평론가는…

미술로 삶을 보고 세상을 읽는다. 좀 더 많은 이들이 미술을 통해 일상의 풍요를 누리도록 글 쓰고 강연하는 일이다. 소명으로 여긴다고 했다. 발단이 있다. 홍익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돌연 일간지 기자가 되면서다. 그림에 관심을 잃어서가 아니라 그림을 막은 생계 때문이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 그리자 했다. 하지만 ‘투잡’은 쉽지 않았다. 미술담당 기자생활에서 얻은 필력과 생각을 가지고 현장으로 나왔다. 미술을 대중과 제대로 연결하는 미술평론가의 ‘진정한’ 역할, 그것을 해보자 했다. 그렇게 가나아트 편집장을 하고, 학고재 관장을 오래 한 뒤 서울미술관 초대관장까지 지냈다. 지금은 양현재단 이사로 있으면서 온전히 글과 강연에만 집중하고 있다. 지은 책이 수십 권이다. 굳이 대표작을 꼽자면 ‘신화의 미술관’(2020), ‘리더의 명화수업’(2018), ‘역사의 미술관’(2011), ‘지식의 미술관’(2009),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 1·2’(200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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