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 넘어 기억으로]팽목항, 남은 자들에게 기억의 책임을 묻다

세월호 5주기 맞아 10일 전남 진도군 팽목항 르포
낮은 기온과 빗줄기에도 방문객들 찾아와
분향소는 기억관으로 바뀌고 유가족이 머물러 있어
세월호 참사 기억공간 조성에 대한 갈등 남아
  • 등록 2019-04-16 오전 6:09:00

    수정 2019-04-16 오전 6:09:00

지난 10일 전라남도 진도군 팽목항에는 참사 이후 지난 5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사진=김보겸 기자)


[진도(전남)= 이데일리 최정훈 김보겸 기자] 벚꽃이 만개하며 완연한 봄 날씨를 이어가던 4월. 하지만 팽목항을 찾은 지난 10일은 기온은 뚝 떨어졌고 빗줄기가 바람에 흩날렸다. 세월호 참사 5주기를 맞은 팽목항에는 아직 봄이 찾아오지 못한 듯했다.

팽목항 앞 등대길로 들어서면 방파제 한쪽 난간에는 수천 개의 노란 리본이, 리본 아래엔 희생자들을 잊지 않겠다는 듯 그림타일들이 빼곡히 붙어 있다. 노란 리본과 그림 타일을 따라가 빨간 등대에 다다르면 그 앞에 자리 잡은 하늘나라 우체통과 기다림의 의자가 눈에 띈다. 매서운 겨울을 지났는데도 여전히 꼿꼿이 서 있는 의자와 우체통은 최근까지도 사람의 손을 탄 듯 깨끗했고 그 옆에 생생한 국화꽃이 꽂혀있다.

2014년 4월16일. 제주도를 향하던 304명이 전라남도 팽목항의 낯선 선착장에서 멈췄다. 당시 이 곳은 눈물과 분노가 끊이지 않는 장소였다. 실종자 가족들과 구조 인력, 자원봉사자, 취재진까지 수만 명의 사람이 여기에 머물렀다. 그 후 스무 번의 계절이 지났고 사고를 목격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각자의 슬픔을 갖고 이 곳을 찾았다. 그들의 발걸음은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지금의 팽목항을 만들었다.

“팽목항에서 세월호 희생자들 생각만 하면 가슴이 막…” 등대 앞에서 성십자를 긋고 기도하던 강정석(45)씨는 말을 잇지 못하며 눈물만 흘렸다. 어떤 생각에 슬픈지 묻자 그는 손을 내저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남편과 함께 휴가를 내고 팽목항을 방문한 정해진(37·여)씨는 “5년 만에 처음으로 와 봤다”며 “처음엔 이 곳에 오기가 겁 나기도 했는데 막상 와보니 사람들이 다녀간 흔적을 보고 먹먹한 따스함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지난 10일 진도군 팽목항에 위치한 ‘세월호 팽목 기억관’ 내부에는 아직 돌아오지 못한 세월호 희생자 5명을 뜻하는 고무신 5켤레가 놓여 있다.(사진=김보겸 기자)


참사가 발생했던 봄날이 다가오면 하루에도 수백명이 찾는 팽목항이지만 아직 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할 수 있는 마땅한 장소가 없다. 지난해까지 분향소로 쓰이던 컨테이너에 `세월호 팽목 기억관`이라는 간판을 붙여 임시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추모음악이 흐르는 기억관 안에 들어서면 정면에 단원고 학생들의 반별 단체사진이 방문객을 맞는다. 단체사진 곁엔 다섯 켤레의 고무신이 놓여 있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단원고 남현철·박영인군, 양승진 교사와 일반인 승객 권재근·혁규 부자의 것이다.

기억관에서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컨테이너에는 세월호 희생자 고우재군의 아버지 영환(52)씨가 있다. 그는 이 곳에서 기억관을 관리하고 방문객을 맞이하며 5년째 머물고 있다. 당시 아이를 수습한 뒤 안산 집으로 갔던 그는 아직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과 팽목항이 눈에 밟혀 되돌아왔다. 그는 2015년 겨울에 들어온 하얀색 반려견 팽이, 목이와 함께 이 곳을 지키고 있다. 고씨는 “아직 사망신고도 하지 못한 아들에게 군대 영장이 나왔었는데 이제는 제대를 했다며 예비군 소집 통지서를 받았다”며 “행정 착오로 벌어진 일이지만 예비군 통지서를 보고 지나간 시간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팽이와 목이는 이 곳에서 새끼를 다섯 번이나 낳았고 스무 마리가 넘는 새끼들은 지금 전국에서 자라고 있다.

지난 10일 진도군 팽목항에 위치한 세월호 가족 휴게소에서 머물고 있는 故 고우재군의 아버지 영환(52)씨가 세월호 5주기 행사를 앞두고 방문객들에게 나눠 줄 시레기국을 만들고 있다.(사진=김보겸 기자)


이런 팽목항은 최근 변화의 기로에 섰다. 참사 이후 중단 상태였던 진도항 2단계 확장공사 재개로 `기억 공간` 조성을 둘러싼 갈등이 표면화됐기 때문. 유가족과 시민들로 구성된 팽목 기억공간 조성을 위한 국민비상대책위원회는 4.16공원 조성, 희생자 기림비와 안치소 표지석 설치, 추모기록관 건립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전남도와 진도군은 팽목항에서 조금 떨어진 서망항 인근에 세워질 국민해양안전관 내에 추모 기록관을 설치하겠다는 입장이다.

영환씨는 “세월호 참사 당시 유가족들의 슬픔과 분노, 정부의 잘못된 대처와 보도, 찾아와 준 수많은 자원봉사자의 노력. 이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게 팽목항”이라며 “이 곳 말고 다른 곳에서 기념하는 건 의미가 없다. 안 좋은 기억이건 좋은 기억이건 모든 건 팽목항에 기록돼야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의 기억이 팽목항에서 사라진다면 이젠 어디서 참사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까. 팽목항을 떠나기 전 등대길 입구에 붙은 안내문에 따라 사고 해역을 바라봤다. 멀리 보이는 섬과 바다는 참사의 기억을 잊은 듯 세월호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구름이 끼고 비가 흩날리는 이날의 날씨로 흐리고 비가 내렸던 5년 전 그 날 모습을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다.

지난 10일 진도 팽목항 등대길 앞 안내문에 따라 사고 해역 지점을 바라봤지만 섬과 바다에서는 참사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사진=김보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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