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가 만났습니다]①'괴테석학' 전영애 "오랫동안 공들인 좋은 것 전하고파"

홀로 '괴테 전집' 번역 나서
'파우스트' 시작으로 20여권 낼 예정
"첫 번역처럼 설레고 떨려"
묵묵히 일 했더니 길 생기더라
  • 등록 2019-06-19 오전 6:32:42

    수정 2019-06-19 오전 6:32:42

전영애 교수는 “올해 괴테학회에서 주는 ‘괴테 금메달’은 스승인 비루스 교수가 받게 됐다”며 “스승보다 제자가 먼저 상을 받아서 늘 죄송한 마음이었는데 너무나 기쁘다”고 말하며 웃었다(사진=이윤정 기자).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괴테처럼 큰 사람을 안다는 것 자체가 너무 기쁘다. 괴테는 언제나 자신에게 가장 절실한 걸 시로 썼다. ‘파우스트’만 해도 60년에 걸쳐 쓴거다. 요즘 뭐든지 빨리빨리 쉽게 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이런 시대에 오랫동안 공들인 좋은 것을 전하고 싶었다.”

경기도 여주시 보금산 자락에 자리 잡은 ‘여백서원’. 스스로 일이 많아 ‘노비’라 칭한 독문학자 전영애(68) 전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는 5년 전부터 직접 지은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옛날에는 이만한 서원을 지키려면 노비가 3명은 있어야 했단다. 하지만 전 교수는 혼자 모든 관리를 하고 있어 ‘3인분 노비’라고 했다. 2016년 정년퇴임 이후 낮에는 서원을 돌보고 밤에는 연구하는 ‘주경야독’ 생활을 하고 있다. 아버지의 호인 ‘여백(如白)’을 따서 지은 서원은 ‘맑은 사람들을 위한 책 집’이다. 본관을 비롯해 작은 정자인 ‘시정’, 외국 작가·학자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 ‘우정’, 작은 전시를 할 수 있는 갤러리 등을 갖추고 있다.

최근 여백서원에서 만난 전 교수는 “간간히 독일에 가서 강연도 하고 있어 요새는 ‘5인분 노비’쯤 된다”고 말하며 웃었다. 이어 “이곳에 오면 경치와 전망대를 꼭 보고 가야한다”며 기자에게 서원 구석구석을 안내했다. 전망대로 올라가는 산자락에는 괴테의 시를 적어놓은 비석이 곳곳에 놓여있다. 전 교수는 “도시의 건물만 보고 지내다 이곳에 오면 다들 숨통이 트인다고 한다”며 직접 시를 낭독해주기도 했다.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월마토’)에는 서원을 개방하는데 많을 땐 50여 명 정도가 이곳을 방문해 ‘힐링의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사진=이윤정 기자).


△홀로 괴테전집 번역 나서

평생 독일 문학 연구에 몰두해 온 전 교수는 2011년 동양인 여성 최초로 독일 바이마르 괴테학회가 주는 ‘괴테 금메달’을 수상하면서 화제가 됐다. 괴테학회가 1910년부터 괴테 연구에 이바지한 사람들에게 주는 최고의 영예로 관련 학자들에게는 ‘노벨상’ 수상과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사실 전 교수는 퇴임 이후 더 바쁘다. 총 20권에 달하는 괴테 전집 번역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첫 시작이 내달 1일 출간되는 ‘파우스트’다. 괴테 전집을 번역하는 일은 중국에서는 국가가 주도해서 할 만큼 방대하고 어려운 작업이다.

“개인이 괴테 전집을 모두 번역하는 사례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기존의 영어판을 중역하거나 한글 번역본을 참고하지 않고 원전 그대로의 ‘파우스트’를 내 어감만으로 고집스럽게 번역했다. 마치 첫 번역작업처럼 설레고 떨린다.”

괴테 사후에 나온 전집 바이마르판은 본문만 143권에 달한다. 주석이 많이 달린 뮌헨판은 33권 가량이지만, 한권이 보통 1000~1500쪽이라고 한다. 전 교수는 이 가운데 스무 권 정도를 선별해 전집을 만들고, 연구서 네 권을 더해 낼 생각으로 번역 작업을 하고 있다. ‘파우스트’와 ‘서·동 시집’ 등 가장 어렵고 방대한 책과 ‘식물변형론’ 등 자연과학 서적까지 포함하고 있다.

“‘파우스트’ 번역은 정말 큰 작업이었다. ‘파우스트’를 소설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총 1만2000행으로 이뤄진 정교한 시다. 원문처럼 운문의 느낌을 살리기 위한 과정이 힘들었다. ‘파우스트’가 어렵다보니 그간 편집자들이 쉽게 표현한다고 부호도 집어넣고 당대 문법에 맞게 고치기도 했다. 그걸 다시 원위치시켜서 한줄 한줄 원형을 복기한 거다. 자꾸 보다 보면 내 번역의 오류도 나오기 때문에 막판까지도 정말 고생을 했다.”

전 교수는 2009년 최민숙 이화여대 독어독문학과 교수와 괴테의 자서전 ‘시와 사랑’을 공역했고, 같은 해 국내 최초로 ‘괴테 시 전집’을 번역해 펴냈다. 그간 출간한 번역서는 ‘데미안’ ‘나누어진 하늘’ ‘보리수의 밤’ 등 60여 권에 달한다.

오롯이 혼자서 전집 번역을 자처하고 나선 건 국내에 번듯한 괴테 전집 하나 없는 것이 안타깝고 자존심이 상해서였다. 여러 사람의 힘으로 나온 경우도 있었으나 마무리가 없는 경우도 많아 직접 나서기로 했다는 것이다.

“어렵게 공부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뜻했던 것을 할 수 있었던 건 너무나 큰 축복이었다. 그간 받았던 걸 세상에 돌려줘야 한다는 마음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은 빚을 갚는 과정이다.”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사진=이윤정 기자).


△오랜 집념으로 독문학 ‘외길’

괴테의 ‘서·동 시집’(1819)은 주옥같은 시편들과 그의 방대한 오리엔트 연구를 묶은 책이다. 시편은 말할 것도 없고 산문편 ‘보다 나은 이해를 위하여’는 지금도 ‘오리엔트학의 대헌장’이라고 불리는 중요한 논설이다.

전 교수에게도 ‘서·동 시집’은 잊을 수 없는 책이다. ‘서·동시집’에 대한 질문을 하자 “이야기가 끝도 없어서 재료(책) 좀 준비하겠다”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백서원 본관 주방에는 수십 권의 ‘서·동시집’이 빼곡히 꽂혀있다. 괴테는 평생 시를 썼는데 본인이 시집을 완성해서 낸 건 ‘서·동시집’이 유일하다고 한다. 전 교수는 “독일과 한국을 왕복하면서 살았는데 그 사이 공백을 메워준 책이어서 너무 귀하다”고 했다.

“‘서·동시집’과 ‘연구서’를 합해서 두 권의 번역서를 냈다. 연구서의 경우 독보적인 괴테 연구자인 독일 헨드릭 비루스 교수의 ‘괴테 서·동시집 연구’를 번역한 것이다. 아무래도 낯선 독일어 원문이 많이 들어가다보니 오타들이 발생했다. 비루스 교수가 수정을 해주면서 2판·3판까지 찍게 됐다. 그러다보니 재고가 문제여서 수정되기 전의 초판과 재판의 남은 책들을 내가 다 샀다. 주방 책꽂이 한 면을 ‘서·동시집’이 전부 채우게 된 ‘웃픈’ 사연이다.”

모든 작업은 전 교수의 지독한 ‘집념’에서 나왔다. 독일 프라이부르크 고등연구원 시절엔 걸핏하면 연구소에서 밤을 지샜다. 방학 동안에만 건너간 독일에서 5년간 독일어 저서를 4권이나 냈다. 아이 두명을 키우는 ‘워킹맘’으로서 해낸 일이라고 하니 대단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710년부터 독일 바이마르에 자리잡은 유서깊은 호프만 서점(HOFFMANN’S BUCHHANDLUNG)에 전 교수의 ‘괴테의 서·동시집 연구서’가 진열되기도 했다. 전 교수는 괴테 탄생 250주년 여름, 독일 뒤셀도르프 기념 학회에서 만난 홀레 씨를 잊지 못한다. 괴테학회 재정감사였던 홀레 씨는 죽기 직전 독일문학 희귀본 200여 권을 전 교수에게 남겼다. 이 희귀본에는 ‘괴테 서·동시집 초판본’(1819)과 ‘파우스트’(1854) 등이 포함돼 있다.

“독일에는 괴테, 베토벤 등 유명한 예술가들도 많지만 그 사람들을 있게 한 홀레와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부럽다. 인생을 너무 계산적으로 살 필요는 없다. 비록 도중에 이 길이 맞는지 알 수는 없다 할지라도, 자신의 일을 성심성의껏 하면 그 안에서 길이 반드시 생긴다. 본업에 충실하면서 반듯하게 사는 것이 결코 손해보는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전영애 교수는

△1951년 경북 영주 출생 △서울대 독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독일 프라이부르크 고등연구원 수석연구원 겸임(2008~2013) △독일 바이마르 괴테학회 ‘괴테 금메달’ 수상(2011)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재직(1996~2016)

여백서원 본관 내부(사진=이윤정 기자).
여백서원 본관(사진=이윤정 기자).
여백서원 가을전경(사진=여백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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