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헌의 혁신@미술]<17> "막장 연극에 초대합니다"…대중 열광시킨 블루오션

▲'대중화 전략'으로 한계 극복한 호가스
18세기 영국귀족·미술애호가 자국화가에 인색
대중콘텐츠로 전향·집중하며 스토리텔러 자처
속물권력자 비판하는 연작…서민 위한 판화도
시대 제약·한계 뛰어넘어 기회로 바꾼 혁신가
  • 등록 2020-10-16 오전 4:10:00

    수정 2020-10-16 오전 9:16:12

호가스의 유화 연작 ‘유행에 따른 결혼’ 중 ‘결혼계약’(1743년경). 당시 영국 상류사회에 팽배해 있던 부도덕한 결혼 세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이 연작은 부와 명예의 맞교환을 전제로 맺은 정략결혼이 희비극적 결말로 가는 단계를 하나씩 꺼내 보여준다. 총 여섯 점의 연작 중 첫 번째인 ‘결혼계약’은 공허한 사치와 방종으로 치닫던 부부관계가 결국 파국을 맞는 막장연극의 서막에 해당한다. 영국 런던 내셔널갤러리 소장.


미술은 사람을 움직였습니다. 밥으로만 채울 수 없는 풍요와 평화를 안겨줬으니까요. 그림의 힘이고 조각의 에너지입니다. 하지만 미술의 역할이 이뿐이라 한다면 미술을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문명을 이끌고, 의식을 뒤집고, 결정적으로 돈의 흐름을 주도했던, 그것을 못 본 겁니다. 미술의 사조와 양식이 탄생할 때마다 세계경제에는 ‘변화의 그림’이 걸렸습니다. 바로 ‘혁신’을 주도했던 겁니다.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이주헌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미술로 이룬 혁신’의 현장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상으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이주헌 미술평론가] 코로나19로 인류의 생명과 건강이 크게 위협받고 경제도 많이 위축되고 있지만 이 어려운 환경도 하기에 따라서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바로 그런 자신감, 그런 희망이 요구되는 시대다. 그런 측면에서 18세기 영국 화가 윌리엄 호가스(1697∼1764)는 되새겨볼 만한 가치가 있는 예술가다. 호가스는 당시 영국 화단의 구조적 모순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도저히 성취할 수 없자 그 구조에 매달리기보다 틀 밖으로 뛰쳐나가 성공한 화가다. 그럼으로써 제약과 한계를 기회로 바꿨다. 그렇게 영국미술사에서 혁신의 아이콘이 됐다.

호가스가 살던 당시 영국의 귀족과 미술애호가들은 자국 출신의 미술가들을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탈리아와 프랑스, 네덜란드 등 전통적인 ‘미술 강국’의 거장들에게 더 관심이 많았다. 이런 배경에는 오래전부터 영국 왕실에서 홀바인(1465?∼1524)이나 반 다이크(1599∼1641)처럼 대륙의 실력 있는 화가들을 궁정화가로 초빙해온 역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 답답한 현실 앞에서 호가스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함으로써 답을 찾았다. 귀족과 애호가들의 눈에 들기가 쉽지 않다면, 아예 이 ‘레드오션’으로부터 벗어나자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고는 고급 예술과는 거리가 먼 서민들을 향해 나아갔다. 이른바 ‘블루오션’을 찾은 것이다. 다른 많은 화가들이 어떻게 해서든 제도 안에서 성공하려고 눈물겨운 투쟁을 벌일 때 그는 그렇게 과감하게 제도에서 벗어났다.

△대중, 조형적 성취보다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에 더 관심

호가스는 꼼꼼하게 대중을 관찰했다. 귀족이나 미술애호가들과 달리 대중은 조형적 성취나 세련된 스타일 같은 것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미술은 시각예술이지만, 대중은 미술작품 앞에서 늘 이야기부터 찾았다. 얼마나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지닌 작품인지 그것에 더 관심이 많았다. 이를 깨달은 호가스는 스스로 ‘시각예술가’이기 이전에 ‘스토리텔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미술작품의 승부를 조형이 아니라 스토리에서 찾은 것이다. 호가스는 그렇게 콘텐츠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

당시 영국에서는 오페라 형식을 빌린 서민적인 음악극 ‘발라드 오페라’가 인기를 끌고 있었다. 또 영웅이 아니라 시민을 주인공으로 한 가정비극이 연극무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늘 억압과 모순에 치여 사는 대중은 그렇게 권력자나 기득권자, 속물들을 비판하고 인간의 어리석은 행위를 풍자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에 착안한 호가스는 자신의 콘텐츠도 그와 궤를 같이하는 방향으로 잡았다. 그렇게 해서 ‘근대의 도덕 주제’라는 타이틀 아래 마치 하나의 도덕 드라마를 보는 듯한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스토리를 중시한 호가스는 자신의 그림이 일종의 연극이란 생각을 갖게 됐다. 그래서 그 스스로 ‘극작가’와 ‘연출가’가 돼 스토리를 전개하고 이미지를 구성했다. 아무래도 단품으로는 스토리를 다 담기가 어려워 연작을 많이 제작했다. 당시로써는 매우 혁신적인 그의 그림은 대중을 열광하게 만들었고, 결국 그는 당대 최고의 예술가 자리에 올랐다. 이렇게 스토리로 승부를 봐 정상에 오른 까닭에 그는 화가이면서도 “셰익스피어 다음가는 희극작가”란 찬사를 듣게 됐다.

△극작가·연출가 자처한 호가스…‘유행에 따른 결혼’ 등 연극 같은 연작 제작

여기서 그의 대표작 ‘유행에 따른 결혼’ 시리즈를 살펴보자. 이 작품은 모두 여섯 점으로 이뤄진 연작이다. 첫 번째 그림 ‘결혼계약’(1743년경)은 정략결혼을 위한 흥정이 주제다. 무대는 어느 백작의 저택이다. 저택 안에서 백작과 상인이 자식들의 결혼 조건을 꼼꼼히 따지고 있다. 맨 오른쪽에 그린 백작은 지금 발을 다쳤음에도 애써 우아한 포즈를 취하며 자신의 가계가 얼마나 대단한지 상인에게 설명하고 있다. 가계는 대단한지 몰라도 그는 지금 돈이 매우 아쉽다. 허영에 들떠 살다 보니 씀씀이가 헤퍼졌다. 그림 맨 왼쪽에 그린 백작의 아들도 허영에 들떠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값비싼 프랑스식 패션으로 잔뜩 멋을 부렸고 거울을 보느라 다른 데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 이렇듯 형편은 아랑곳하지 않고 낭비하며 사는 영국 귀족들, 그로 인해 오늘 돈에 ‘아들(가문)까지 파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백작의 아들과 나란히 앉은 처녀는 상인의 딸이다. 그녀는 신랑이 될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곁에 있는 변호사와 시시덕거린다. 바로 이 장면에서 우리는 이 정략결혼이 가져올 미래의 비극을 예견할 수 있다.

호가스가 그린 나머지 다섯 점의 그림은 이후의 상황을 특유의 드라마식 전개로 보여준다. 신부의 지참금으로 방탕한 삶을 살던 신랑은 바람을 피우다가 성병에 걸리고, 무료해진 신부는 앞선 그림에서 시시덕거리던 변호사와 연애에 빠진다. 이를 알고 두 사람을 덮친 신랑은 결국 변호사의 칼에 찔려 죽고, 변호사는 체포돼 교수형에 처해진다. 남편도 잃고 애인도 잃은 신부는 그 막막한 현실로부터 출구를 찾지 못하고 끝내 자살하고 만다. 당시 영국의 귀족이나 부유층은 이렇듯 정략결혼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화가는 이 그림을 통해 그들의 ‘일그러진 욕망’을 호되게 비판함으로써 대중으로 하여금 쾌감을 맛보게 했다.

호가스의 유화 연작 ‘유행에 따른 결혼’ 연작’ 중 ‘러브호텔’(1745). 호가스의 회화작품이 인기를 끌자 대중적 보급을 위해 제작한 판화작품이다. 신부의 불륜 현장을 급습한 신랑이 칼에 찔려 죽어가고 있고, 살인자가 된 변호사는 오른쪽 창으로 달아나고 있다. 회화작품에서는 인물들의 동선이 반대 방향으로 진행한다.


대중의 관심을 사고 크게 인기를 끌었다 해도 그림이 팔리지 않으면 화가로서는 생존하기가 쉽지 않다. 어차피 영국의 귀족과 미술애호가들은 그에게 큰 관심이 없었고 당시 가난한 서민들은 값비싼 유화를 사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명성과 인기를 얻었다 해도 살아가기는 여전히 팍팍하지 않았을까. 아니었다. 호가스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 가능한 판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

호가스는 인기를 끈 자신의 그림을 판화로 다시 제작해 팔았다. 사실 그는 회화에 입문하기 전, 판화공방에서 먼저 일을 했다. 아버지가 빚으로 5년 동안 옥살이를 할 만큼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정규 교육 코스를 밟을 수 없었다. 그래서 기술자에 가까운 판화공의 길로 먼저 들어섰고, 그 경험이 그로 하여금 일찍부터 판화가 갖는 대중예술로서의 장점과 잠재적인 가능성을 두루 이해하게 했다. 그러니까 ‘대중화’란 블루오션으로 나아간 이상 호가스는 그 스토리부터 표현 형식, 나아가 미디어까지 일관되게 대중과 코드가 맞아야 한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이를 실행할 능력 또한 두루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일반 대중이 유화를 사기는 어려워도 판화는 얼마든지 살 수 있다. 판화야 수요만 있다면 같은 그림을 수없이 찍어낼 수 있으므로 유화에 비해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장점이 있다. 예상대로 그의 회화가 관심을 받고 인기를 얻을수록 그의 판화 또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얼마나 잘 팔렸는지 그 인기에 편승해 그의 판화를 그대로 베껴 파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올 정도였다. 자신의 권리가 침해당하는 것을 묵과할 수 없던 호가스는 의회에 청원을 해 판화 원작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저작권법을 제정하게 했다(1734년 호가스법). 법의 보호까지 받게 된 그의 작품은 유럽 여러 나라에 널리 팔려나갔고, 이후 그의 작품과 유사한 스타일의 시사풍자화는 죄다 ‘호가시안’(a Hogarthian scene)이라고 불리게 됐다.

호가스가 동시대의 다른 예술가들처럼 기존의 제도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전긍긍했다면 결과가 어땠을까. 오늘날 미술사가 평가하는 그런 대가의 반열에는 결코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호가스는 애초에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지는 못했지만, 결국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얻었다. 이 모든 게 그의 앞에 놓인 제약과 한계 덕이었다. 그게 새옹지마가 됐다. 그런 점에서 때로 한계는, 한계로 위장한 기회다. 혁신은 빈번히 한계 혹은 위기와 함께 찾아온다.

※ “셰익스피어 다음가는 희극작가”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윌리엄 호가스(1697∼1764)는 어린 나이에 판각가의 도제가 돼 판화·삽화기술을 익혔다. 비록 하는 일은 소소했지만 야망은 컸다. 명예와 부를 거머쥘 수 있는 역사화가가 되는 것. 이를 목표로 거의 독학으로 그림공부를 하던 중 우연찮은 기회를 잡는다. 영국 왕 조지 1세의 궁정화가인 제임스 손힐 경의 집에 들어가 소묘수업을 받게 된 것이다. 5년쯤 뒤인 1729년에는 손힐 경의 딸과 결혼도 했다. 호가스의 결혼생활이 어땠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도덕적 교훈을 주제로 화면을 마치 연극무대처럼 꾸민 회화 연작은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매춘부의 편력’(1731∼1732), ‘난봉꾼의 편력’(1732∼1735), ‘유행에 따른 결혼’(1743∼1745), ‘새우 파는 소녀’(1740∼1745) 등이 연달아 나왔다. 호가스 스스로 ‘그림으로 쓴 희극’이라 했던 시리즈다. 실제인물을 모델로 세상의 병폐를 날 세워 풍자한 통찰력은 미술계뿐만 아니라 문학계에까지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는데, 근엄하게 꾸짖기보다 ‘그렇게 살다간 저 꼴 나기 십상’이라는, 마치 셰익스피어의 위트 넘치는 희극에 색을 입힌 듯한 느낌을 줬던 것이다. 덕분에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기세에 눌려 자국의 예술에 열등감을 갖고 있던 영국문화의 환경 전반을 극복하는 데도 적잖은 역할을 했다. 그 공적 덕인지 1757년부터 조지 2세에 이어 조지 3세의 궁정화가로도 활약할 수 있었다. 비록 역사화가는 못 됐지만 역사는 제대로 쓴 인물로 남았다.

호가스가 그린 자화상 ‘화가와 그의 퍼그’(1745). 호가스는 18세기 영국 화가들이 처한 ‘레드오션’에서 벗어나 아예 고급 예술과는 거리가 먼 서민을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 ‘블루오션’을 찾았다. 시각예술가이기 이전에 ‘스토리텔러’가 되기로 작정하고 작품의 승부를 조형이 아니라 스토리에 걸었다. 영국 런던 테이트갤러리 소장.


△이주헌 미술평론가는…

미술로 삶을 보고 세상을 읽는다. 좀 더 많은 이들이 미술을 통해 일상의 풍요를 누리도록 글 쓰고 강연하는 일이다. 소명으로 여긴다고 했다. 발단이 있다. 홍익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돌연 일간지 기자가 되면서다. 그림에 관심을 잃어서가 아니라 그림을 막은 생계 때문이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 그리자 했다. 하지만 ‘투잡’은 쉽지 않았다. 미술담당 기자생활에서 얻은 필력과 생각을 가지고 현장으로 나왔다. 미술을 대중과 제대로 연결하는 미술평론가의 ‘진정한’ 역할, 그것을 해보자 했다. 그렇게 가나아트 편집장을 하고, 학고재 관장을 오래 한 뒤 서울미술관 초대관장까지 지냈다. 지금은 양현재단 이사로 있으면서 온전히 글과 강연에만 집중하고 있다. 지은 책이 수십 권이다. 굳이 대표작을 꼽자면 ‘신화의 미술관’(2020), ‘리더의 명화수업’(2018), ‘역사의 미술관’(2011), ‘지식의 미술관’(2009),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 1·2’(200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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