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정조의 '천도의 꿈' 품은 '화성'을 거닐다

경기 수원 화성 성곽길
화성의 중심 ‘화성행궁’
정조의 정치실험의 결정체
팔달문~서장대~장안문~창룡문까지
5.7km 원점회귀 코스
  • 등록 2020-03-27 오전 5:00:00

    수정 2020-03-27 오전 5:00:00

수원 화성을 대표하는 장안문. 화성의 북쪽 대문으로 정문 역할을 하는 곳이다. 수원 화성의 정문답게 그 규모가 웅장하다. 팔달문과 같이 성문의 바깥에는 이중 방어 역할을 하기 위한 반달 모양의 옹성을 쌓은 것이 특징이다.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화성(華城·경기도 수원)은 ‘정조의 도시’였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옮겨왔으니, 선산이 있는 화성은 그의 고향과도 같았다. 화성 곳곳에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근대적 신도시이면서 실학의 실험장이자, 그 결정체가 바로 화성이었다. 또 정조의 통치이념인 ‘작성지화’(作成之化·만들어냄으로써 발전을 꾀함)의 체현이었다. 정조는 화성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정조. 그의 정치실험의 장이자 깨어나기 시작한 조선의 새로운 출발지가 바로 화성이었던 셈이다. 전국에서 들려오는 꽃 소식으로 봄기운이 완연한 3월의 어느 날, 화성 성곽길에서 정조의 야망과 웅지가 느껴졌다.

수원 화성의 중심인 ‘화성행궁’. 왕이 지방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물기 위해 짓는 별도의 궁궐이다. 그중 가장 규모가 크고 중심이 되는 곳이 화성행궁이다.


◇천도의 꿈을 꾸게 한 ‘화성’

화성행궁을 먼저 둘러보는 게 순서다. 행궁은 왕이 지방으로 행차를 나갈 때 임시로 머물기 위해 짓는 별도의 궁궐을 말한다. 정조는 수원에 신도시를 만들고 한양에서 수원에 이르는 주요 경유지에 여러 행궁들을 지었다. 그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중심이 되는 곳이 화성행궁이었다.

의문이 들었다. 정조는 옷을 기워 입을 정도로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했다. 그는 왜 대규모 역사를 벌였을까. 알려진 바와 같이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서였을까. 정조는 즉위한 후 사도세자의 복권을 위해 ‘묘’를 지금의 융릉으로 이장한다. 조선 땅에서도 가장 좋은 명당으로 손꼽히던 곳. 당시 이곳에는 수원부가 있었다. 정조는 수원부와 마을을 통째로 옮기고, 이곳에 화성을 지었다. 사도세자의 복권, 그리고 이장, 화성 건설까지 무려 13년이 걸렸다.

화성행궁 복내당


이는 단지 효심 때문이 아니었다. 사도세자의 영전에 머리를 조아리게 하는 것은 왕권에의 복속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정치판의 대대적인 물갈이로 이어진다. 정조실록에는 “호위를 엄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요, 변란을 막기 위한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나의 깊은 뜻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조의 정치실험은 멀고도 험한 길이었다. 짐작컨대 정조는 화성으로 왕도를 옮기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화성은 1794년 착공해 1796년에 완공했다. 둘레는 약 5.7km, 성벽 높이는 4~7m에 달했다. 땅속에도 깊이 1m를 파 기초를 다졌다. 성을 건축하는데 들어간 벽돌 수만 무려 70만장에 육박할 정도였다. 2년 9개월(장마 등 공사를 못한 기간을 제외하면 약 2년 6개월)의 짧은 시간이었다. 실학자 정약용이 설계했고, 채제공이 축성 책임을 맡았다. 당시 정약용은 거중기를 만들어 성곽 건축 시간을 크게 단축했고,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주었다. 일제강점기와 6.25 한국전쟁으로 성곽의 많은 부분이 파괴됐다. 하지만 건축설계서인 ‘화성성역의궤’가 남아 있어 복구가 가능했다.

수원화성 서장대에서 바라본 수원시내와 성곽


◇‘성곽길의 꽃’ 수원 화성을 걷다

수원화성 남포루 성곽길
성곽길을 걸어볼 차례다. 길은 어느 지점에서 시작하더라도 원점 회귀가 가능하다. 5.7km 성곽을 모두 걸어도 좋고, 여의치 않다면 일부만 걸어도 좋다. 남문인 팔달문에서 시작해 남포루, 서포루, 서장대를 거쳐 화서문, 북포루, 장안문을 지나 화홍문과 방화수류정까지 이어지는 코스가 가장 일반적이다. 봄기운 물씬 풍기는 성곽을 따라 이어진 길은 운치가 넘친다. 옛 성벽과 도심의 빌딩이 어우러진 경치도 이색적이다.

들머리는 팔달문. 여기서 남포루를 지나 서남암문까지 이어지는 길은 가파른 계단이다. 암문이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잘 알지 못하도록 만든 출입구. 화성에는 위치에 따라 여러 곳에 암문을 만들었다. 계단을 오르고 뒤돌아서면 수원 시내의 멋진 풍경이 내려다보인다. 여기서 서장대까지는 성곽을 따라 평탄한 길이 이어진다.

서장대는 수원 화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장대란 성곽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 화성에는 서장대와 함께 동장대 두 곳이 있다. 서장대는 정조대왕이 직접 이곳에 올라 군사지휘를 한 곳이기도 하다. 현판에 걸린 ‘화성장대’(華城將臺) 편액은 정조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서장대 뒤쪽으로는 서노대가 자리하고 이다. 군사지휘소인 서장대를 방어하는 중요한 시설이다. 쇠뇌라 불리는 다연발 활을 쏠 수 있는 시설이다. 누각 없이 돌을 쌓아 높은 대를 만들어 적의 공격을 감시하거나, 적이 접근했을 때 쇠뇌를 쏘아 공격할 수 있다.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 두 곳이 있다. 서장대 아래쪽으로는 시야가 트여 있어 날씨가 좋을 때에는 수원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화성행궁의 전체적인 모습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수원화성 서장대에서 바라본 수원시내


화서문까지는 내리막길이다. 화서공원을 지나면 화서문 옆에 우뚝 솟은 서북공심돈이 있다. 건물 안에서 적의 동태를 살피며 공격도 가능한 시설로, 축조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화성에서만 볼 수 있는 구조물로, 우리 건축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다.

서북공심돈에서 성곽을 따라가면 장안문이다. 화성의 북쪽 대문으로 정문 역할을 하는 곳이다. 수원 화성의 정문답게 그 규모가 웅장하다. 팔달문과 같이 성문의 바깥에는 이중 방어 역할을 하기 위한 반달 모양의 옹성을 쌓은 것이 특징이다. 수원 화성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왕도를 옮기려 했던 정조의 포부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기득권 세력과 결별하고 강력한 개혁정치를 펼치고자 했던 정조. 화성에는 왕도정치의 꿈과 이상이 깃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미완의 역사로 남았다.

수원화성 서장대


◇여행팁= 한국관광공사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안전여행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 여행 전에는 △개인 차량을 이용한 여행계획 수립 △사람이 덜 밀집한 여행장소 선정 △마스크, 휴대용 손세정제 등 준비 △개인용 휴대용 컵과 상비약 준비 △여행지 폐쇄 여부 확인 △확진환자 이동경로 확인 등이다. 여행 중에는 △적절한 휴식 △물을 자주 마시고 익히지 않은 음식 주의 △발열과 호흡기 증상 발생시 여행 중단 권고 등이다. 여행 후에는 △확진환자의 이동경로와 날짜가 겹칠 경우 발열과 호흡기 증상 발생 시 질병관리본부 콜센터(1339) 또는 관할 보건소에 상담 후 조치하기 등이다.

젋은 연인들이 수원화성 성곽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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