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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이정훈 기자] `파리의 독립운동가`라고 불렸던 서영해 선생은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무장투쟁론과 양대 축을 이뤘던 외교독립론을 대표한 인물이었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을 무대로 활약하면서 임시정부의 외교 및 선전활동에 주력했다.
본명이 서희수였던 그는 190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7세에 불과했던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수배되는 처지가 되자 아예 상하이 임시정부로 건너갔다. 이 때 이름을 영해로 바꿨다. `임시정부의 막내`라는 별명을 가졌던 그는 당시 임시정부 어른들이 “부모님이 걱정하시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유했음에도 심부름을 하며 독립운동을 배웠다. 마침 임시정부에서 당시 유일한 국제기구인 국제연맹 본부가 있던 파리를 외교독립 거점을 삼으면서 프랑스어 인재를 키우기 위해 그에게 프랑스 유학을 권유했다.
1920년 12월31일 프랑스를 단 한마디도 못했던 서영해는 혈혈단신 파리로 건너갔는데, 훗날 그는 “내 이름처럼 태산을 끼고 북해를 넘는 기개로 구체적 계획은 없었지만 흉중은 세계정복이라는 포부로 가득찼다”며 그 시절을 회고했다. 리세(유치원부터 고교까지 교육과정)에 입학, 12년 과정을 6년만에 마친 그는 부족한 체제비로 인해 학업과 일을 병행하면서도 1929년 파리신문학교(에꼴 드 주르날리즘)를 졸업했다.
1929년 쓴 자서전 격인 소설 <어느 한국인의 삶의 주변>을 출간해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프랑스어 소설로, 단군신화부터 `3·1독립선언서`까지 한국 역사를 꼼꼼이 수록해 한국을 유럽에 알리는 첨병 역할을 했다. 또 <심청전>, <흥부와 놀부> 등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이후 프랑스가 1945년 임시정부를 사실상의 정부로 인정하면서 그 해 주파리특파원 주법대표를 역임했고 임시정부의 외교특파원과 최초의 주불(駐佛)대사로 임명됐다. 당시 임시정부 외교에서 `미국에는 이승만, 유럽에는 서영해가 있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였다. 특히 서영해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식 직전 김구의 대일선전포고서를 파리에 있는 일본대사에게 통고하기도 했다
서영해와 오스트리아 출신 여성 예술가 엘리자와 1937년 파리에서 정식 결혼식을 올리고 1939년 아들까지 낳았다. 그러나 히틀러에 의해 1938년 오스트리아가 합병되자 임신한 엘리자는 고향 빈으로 돌아갔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둘은 재결합하지 못했다. 1946년 26년 만에 귀국한 서영해는 연세대와 이화여대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며 국내 정치상황을 살폈다. 서영해는 정치적으로 이승만보다 김구쪽에 가까웠다.
이후 서영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중국에서 죽었다거나, 프랑스로 갔다거나 월북했다는 얘기까지 설이 분분했다. 부산지방보훈청이 발간한 <부산독립운동사>에는 `중국에서 행방불명`으로 기록돼 있다. 반면 1956년까지 상하이 조선인민인성학교 교사로 재직했던 서영해의 사진이 남아있고 당시 이 학교 교장이던 선우혁이 북한으로 건너간 만큼 그와 함께 북으로 갔다는 추측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