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2년에 발간된 ‘이왕가박물관소장품사진첩’에 당시 이왕직 차관이었던 고미야 사보마쯔(1859~1935)는 우리나라의 최초 박물관인 ‘이왕가박물관’이 동·식물원과 함께 조선 5대 궁궐인 창경궁에 설립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창경궁은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이 1883년 세 명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창덕궁 동쪽에 세운 궁궐이다. 이후 왕과 왕가의 출입이 잦았고, 임금이 문신들과 경전이나 역사서 등을 강론하기도 했던 유서깊은 곳이었다.
최근 국립고궁박물관은 이왕가박물관이 촬영한 유리건판 사진 16점을 온라인으로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된 사진 속에는 창경궁 전각을 전시실로 사용했던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줘 눈길을 끈다. 이왕가박물관은 창경궁 내의 명정전, 경춘전, 환경전, 통명전 등 400여평에 이르는 건물 일곱 채를 수리해 전시관으로 사용했다. 왕이 있던 궁궐로서 역사·문화적 가치를 지닌 장소가 어떻게 일본인에 의해 위락 시설로 전락할 수 있었던 걸까.
1907년 일본은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이토 히로부미(1841~1909)를 경성에 파견했다. 이토는 을사조약을 위반했다며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이완용과 정미 7조약을 체결해 대한제국 정부의 각부 차관을 일본인으로 임명했다. 이때 이토의 최측근이었던 고미야는 당시 궁내부 차관 겸 제실재산정리국장에 임명돼 창덕궁 공사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고종 뒤를 이어 즉위한 순종을 고종과 격리시키기 위해 순종을 창덕궁으로 이어했다. 그리곤 겉으로는 순종을 위안하기 위한 시설이라는 명분을 내세웠 박물관 및 동·식물원을 만들었지만 결국 황실의 상징인 궁궐을 격하시키고자 했다.
심지어 이왕가박물관이 전시할 유물을 사모으기 시작하면서 도굴까지 성행했던 것을 전해진다. 이왕가박물관은 왕실 전래품이 주요 전시품이 아니라 외부에서 구입 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박물관은 문을 연 지 4년만에 무려 1만2000점이 넘는 소장품을 마련할 정도로 많은 유물을 사들였다. 특히 고려청자 애호가로 알려진 이토는 큰 돈을 들여서까지 청자를 매입했고, 이에 일확천금을 꿈꾼 일본인들이 도굴을 해 가면서 청자 수집에 뛰어들었다.
이렇듯 아픈 역사를 가진 이왕가박물관은 1938년 소장품 가운데 미술품을 덕수궁으로 옮겨가면서 이왕가 미술관으로 통합됐다. 그 이전까지 박물관은 조선총독부 박물관과 함께 매년 3만 9180명이 방문하는 유원지로 이용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