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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족쇄된 민중미술…흙 패어 나무 세웠다 자유롭고자"

3년 반만에 갤러리나우서 개인전 연 '임옥상'
50년 현실비판 작품한 '1세대 민중미술가'
서정성으로 무장한 '나무그림'으로만 꾸려
평생화두 흙 화폭에…붓질로 밀고 색 얹어
"강박 벗고 예술 지평 넓히는 데 일조하려"
  • 등록 2021-02-15 오전 3:30:00

    수정 2021-03-01 오전 9:19:20

작가 임옥상이 서울 강남구 언주로 갤러리나우에서 연 개인전 ‘나는 나무다’에 건 자신의 작품 ‘나무 연작’(2021) 앞에 섰다. 지난 가을부터 일기 쓰듯 하나씩 그렸다는 4호(33×24.5㎝) 규모 60점을 퍼즐 맞추듯 엮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서울 강남 도산대로. 자동차며 의류며, 글로벌 명품매장이 앞다퉈 들어선 그 거리 안쪽에 한 갤러리가 보인다. 여기까지야 이상할 게 전혀 없다. 의아한 것은 갤러리가 아니라, 그 갤러리가 품은 또 다른 풍경인데. 투박한 흙덩이로 빚은 나무들이 거친 호흡을 내뿜는 중이니 말이다. 그래, 뭐 이것도 딱히 트집 잡을 일은 못 된다. 강남에 흙덩이 나무그림을 걸지 말란 법도 없으니. 그런데 그 흙나무를 데려다 놓은 작가 이름 석 자를 듣는다면 잠시 머뭇거릴 수도 있다. 임옥상(71), 그이니까.

임 작가를 두고 우린 ‘1세대 민중미술가’라고 부른다. 1980년대를 기점으로 진보적인 미술인들이 중심을 이룬 사회변혁운동에 참여하며 현실비판적인 작품에 목소리를 실었더랬다. 한 해, 두 해도 아니고 50년을, 그 반세기를 그렇게 살았다. 그 세월을 압축하듯, 광화문광장에 치켜들었던 촛불정신을 16m 화폭에 올린 ‘광장에, 서’(2017)란 작품을 청와대 본관에 걸기도 했다. 그러니 그이의 ‘돌연 강남 출현’이 반가움을 넘어 일단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그것도 나무란다. 80여점 모두가 나무뿐이란다. 불현듯 찾아든 봄기운에 흐드러지게 피워 올린(‘홍매와 춤추다’ 2021), 아니면 아직은 찬바람에 가녀린 꽃잎 뚝뚝 떨구고 있는 매화나무(‘봄날은 간다’ 2019, ‘봄바람’ 2021)를 앞세우고 말이다. 채 피우지도 못하고 흩어지는 꽃망울(‘풍매’ ‘무매’ 2021)에서 뚝뚝 떨어지는 서정성은 또 어쩔 건가.

임옥상의 ‘봄바람’(2018). 전시작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흙색을 고스란히 묻혀낸 고목에서 스멀스멀 피어나오는 봄기운을 분홍색 변주로 풀어냈다. 150호(227.3×181.8㎝) 캔버스 세 폭을 이어 가로길이 545.4㎝의 대작으로 완성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뭐가 달라진 건가’를 물었다. 사실 ‘왜 무엇이 변하게 한 건가’를 듣고 싶었나 보다. 기대감은 잠시 “달라진 게 없다”란 대답이 돌아왔고, “사람들은 나에 대해 선입견이 있다”는 짧은 부연이 붙었다. 맞다. 사실 임 작가의 ‘나무’는 새삼스러울 게 없다. 그이의 말 그대로 “시작할 때부터 그렸던 것”이니까. 서울대 미대 시절 남들 다 하는 추상미술을 접고 ‘임옥상만의 구상회화’를 하자고 결심한 뒤 첫 작품이 ‘나무 1·2’(1978)라 이름 붙인 당산나무였다니.

“전위미술을 한다고 난리들이던 그때 ‘이건 아니다’ 했다. 우리 현실을 비출 구상언어를 해야겠다 했다. 형식을 바꾸긴 어려우니 내용에서라도 내 얘기를 넣어야겠다 했다. 역사·전통에 걸음마 식으로 접근했던 거다.” 이후 달라진 게 있다면, 작가의 정체성이 아닌 나무의 정체성일 거다. “예전 나무가 정치체제, 자본주의, 분단현실, 이런 것들을 견뎌내는 나무였다면 지금의 나무는 생명력, 기운생동, 이런 것들을 대변하는 나무라고 할까.”

임옥상의 ‘무매 2’(2021). ‘춤추는 매화’란 뜻이다. 캔버스에 흙, 백토, 먹을 얹어 펼쳐낸 황량한 벌판, 그보다 더 척박한 나무 숨에서 꽃망울을 터뜨린 매화를 희망처럼, 선물처럼 표현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척박한 흙 밟고 일어선 절절한 생명 ‘나무’

평일 오후의 서울 강남구 언주로 갤러리나우. 임 작가가 3년 6개월 만에 연 개인전 ‘나는 나무다’에는 연이어 관람객이 찾아들고 있었다. 아무리 사전예약까지 한 ‘인터뷰’라 해도 작가를 온전히 독차지할 재량은 없었다. 과연 저이들은 달라지지 않은 작가를 만나러 왔을까, 달라졌다고 믿게 한 작품을 보러 왔을까.

“지난해 가을 은행나무를 보러 성균관 명륜당을 찾았다. 600년을 지탱한 나무가 한 해 사이에 크게 변할 건 없지만, 감동이 달랐다. 정신적인 안정감이 생겼고, 대화 같은 걸 하게 되더라. 나이를 먹었나, 여유가 생겼나, 이 자체가 좋구나 했더랬다. 게다가 그림으로 그리게 되니, 말로 주고받는 것과 몸·색·형태로 가시화하는 것은 또 달랐다.”

임옥상의 ‘풍매 5’(2021)와 ‘풍매 4’(2021). 채 피우지도 못하고 바람에 날려 흩어져지는 매화의 꽃망울을 흙판에 애써 붙들어뒀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번 전시작의 출발이라 할 ‘은행나무’(2020)는 그렇게 나왔다. 이후 “제철 음식을 찾아먹듯 석 달 가까이 나무만 그렸다”고 했다. 가을, 겨울, 봄으로 계절이 바뀌었고 은행나무는 느티나무로, 또 어떤 나목으로 번져 갔다. 일기 쓰듯 옮겨낸 4호(33×24.5㎝)짜리 그림은 어느덧 60점을 넘겼다(‘나무 연작’ 2021). 비단 그 은행나무가 아니어도 말이다. 임 작가는 나무를 두고 ‘땅의 일어섬, 하늘을 향한 생명의 의지, 땅과 하늘을 잇는 가교, 수맥, 물길’이라고 믿어왔던 터. 하지만 이번처럼 폭발적으로 들끓기는 처음인 듯했다.

그냥 거기까지라면 아무리 600살 나무라도 그저 한낱 고목일 터. 작가의 나무그림에 터질 듯한 생명력을 부추기는 요소는 따로 있다. 바로 흙이다. 그이의 나무그림은 흙으로 빚어낸 것이다. 캔버스에 흙을 바르는 게 시작이란다. 이후 흙이 얼마나 마른 상태에서 붓을 들이대느냐에 따라 두 결로 나뉜다. “흙 바른 직후 붓을 대면 나무몸통에 요철이 생기는 습식작업이 된다”고 설명했다. 나무껍데기가 벗겨지듯 흙과 먹이 마구 떨어지는 작가 특유의 마티에르는 대부분 이 작업에서 생긴다. 이후 잔잔한 꽃모양, 피부에 닿을 듯한 바람결 묘사는 흙이 굳고 난 뒤 색을 입히는 건식작업으로 만들어낸다. “혹여 내 작업이 못마땅해 지우고 싶다면 그냥 물을 뿌리고 긁어내 버리면 된다. 다른 작가들은 못하는 그걸 난 할 수 있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작가 임옥상이 서울 강남구 언주로 갤러리나우에서 연 개인전 ‘나는 나무다’에 건 자신의 작품 ‘춤추는 홍매’(2021) 앞에 섰다. 작가는 “예전 나무가 정치체제, 자본주의, 분단현실, 이런 것들을 견뎌내는 나무였다면 지금의 나무는 생명력, 기운생동, 이런 것들을 대변하는 나무”라고 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무기자).
임옥상의 ‘춤추는 홍매’(2021) 부분. 붓길을 따라 패이고 쓸리고 긁힌 흙자국이 보인다. 평생의 화두였던 작가의 흙이 나무로 다시 태어난 순간이다. 작가는 흙에 수용성 접착제를 섞어 캔버스에 얹는 기법을 스스로 터득해냈다고 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굳이 회화가 아니어도 입체든 설치든, 평생 흙을 만져온 그이다. 이번 전시작은 그 흙이 본격적으로 캔버스로 진격한 형태인데. “예전에 흙은 중간 역할밖에 못하지 않았나. 조각에서 브론즈나 쇠의 형태를 잡아주는 그 역할. 캔버스에 붙이기가 편치 않았던 거다. 내겐 끝까지 흙의 본령을 잃지 않으면서 그대로 그림으로 살려내야 하는 과제가 있었다.” 그런 척박한 흙을 밟고 일어선, 최상의 궁합을 맞춘 절절한 생명이 나무였다는 거다.

△사회비판 대신 뚝뚝 떨군 서정성…일기 같은 60점 연작도

나무가 그랬듯 물론 흙도 예전의 그 흙은 아니다. 임 작가는 “초가에 사는 것과 양옥에 사는 건 다른 마음이 아닌가”라고 에둘러 표현한다. 그이에게 ‘민중미술’이란 게 그랬다. 그저 자신과 나무를 동일시하는 그림을 그렸을 뿐인데 다들 사회비판적이라고 한마디씩 보탰고 (특히 1970년부터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 그이의 작품은 모두 민중미술이란 장르에 들게 됐다. “민중미술작가로 불리는 게 즐거웠고 감사했고 또 부끄러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 족쇄가 되더라. 그 카테고리로 나를 제어하고 속박하고 차별하는 것이. 난 그저 좋아서 했을 뿐인데.”

임옥상의 ‘부여 부산의 동매’(2020). 고향인 충남 부여의 어느 마을에 선 나목을 떠올리고 스토리를 붙였다. 동양화의 낙관처럼 붓펜으로 직접 작품명과 사인을 써넣는 작가는 이 작품에 ‘특별한’ 단상까지 붙였다. ‘누구를 위하여 이 밤에는 향기를 그치지 않는가’라고(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세상도 바뀌고 대응방식도 같을 수 없는 지금, 그런 구분이 무슨 소용이냐는 관조마저 읽혔다. “미술의 지평을 넓히는 데 일조하고 싶다. 미술이란 바다에서 마음껏 수용하고 자유롭게 표현하길 원한다.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그리든 예술가의 몫이다. 그러니 내게 주어진 영역에서 자유를 누려야 한다.”

그렇다면 서정성 물씬 묻힌 흙덩이 나무그림을 앞으로 계속 볼 수 있단 건가. “아무 계획이 없다. 그냥 가는 거다. 물을 만나면 건널 수도 있고 손을 닦을 수도 있다. 다만 내가 족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보는 이들에게도 그 자유를 느끼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흙으로 나무를 세우며 그이는 ‘일필휘지’라 했다. 손에 든 붓에 호흡과 맥박을 일치시켜 단숨에 그어낸다는 뜻이다. 떨치고 일어날 힘이 솟구치면 단 한 획에 모두 실어. 출중한 기량 덕이라고? 과연 그런가. 그보단 용기고 결단일 거다. 한 번 휘두르고 나면 다신 돌아보지 않는 게 또한 일필휘지 아닌가. 전시는 28일까지.

작가 임옥상이 ‘은행나무 2021-1’(2020) 옆에 기대고 섰다. 이번 전시작의 모티프이자 출발점이 된 그 은행나무다. 지난 가을 성균관 명륜당에서 시작한 나무그림은 가을, 겨울, 봄으로 계절을 바꿨고 느티나무로, 또 다른 나목으로 번져 나갔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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